“아빠아빠!”

딸 전화다. 이른 아침이다. 지 어미 말고 내게 전화한 걸 보면 아마도 고만고만한 일이렷다. 아니나다를까 ‘하니’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달라는 ‘엄명’이다. ‘하니’는 만 두 살에서 딱 21일 못 미친 손주다. 아비로서 당연히 들어주어야 하는 ‘부탁’은 아니다. 엄연한 ‘청탁’이다.
한 번쯤 으름장을 놓고 볼까 하다가 참았다. 아서라, 딸내미 맘 상할라. 그런데 망설이고 말고가 어딨는가. 내가 아니면 데려다 줄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하랴. 평소에는 김 서방이 등원시켰는데, 오늘은 1교시 수업을 바꾸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는 그린에듀 교육지원단을 파견한 68교 모두 학교 평가회를 하는 주간이다. 일 년을 돌아보며 거리낌없이 그동안의 잘잘못을 짚어보고 서로 보탬이 되는 말을 주고받는 날이다. 코로나가 아니라면 교장실에서 사과도 한두 쪽 먹으면서 정리(情理)를 회상하는 날이기도 하다. 사실, 일 마치고 팀원들끼리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다 글렀다. 딸 전화를 끊자마자, 신북초교 지원팀장에게 전화했다. 손주가 날 붙잡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집을 나섰다. 간밤에 비가 내렸나 보다. 거리가 촉촉하다. 바람 끝이 제법 쌀쌀하다. 서울에는 눈까지 내렸다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하니’는 벌써 등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크에 모자, 목도리까지 두르고 옷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하니’는 문에 쫑긋 귀를 대고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다. 현관 번호 누르는 ‘삐삐’ 소리에 창문 너머로 ‘하삐’를 확인하고, ‘까르르, 끼악’ 소릴지르며 뛰쳐들어가던 ‘하니’다. 이내 되돌아와 내 손을 낚아채고 볼을 부여잡고 다솜짓 마다하지 않던 ‘하니’! 열없이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 요쪽조쪽 내닫던 ‘하니’!

오늘은 그런 ‘하니’가 아니었다. 조만한 아이가 뭘 알겠냐마는 어딘지 모르게 시큰둥한 표정이다. 그닥 반기는 기색도 없이 하삐를 흘끔 쳐다보고는 그만이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다리 벌린 채 뜀박질만 방방 계속한다. 09시 30분, 머쓱해진 어미가 서둘러 가방을 메 준다. 기침이 멎은 줄 알았더니 콜록 소리가 여전하다. 콧물은 잡혔을까? 지 어미가 마지막 남은 거라면서 물약을 챙겨준다.

어미가 먼저 꼬옥 안고 “안녕!” 하며 등을 떠민다. ‘하니’도 마지못해 “안녕” 하고 손을 흔든다. 생각이 난 듯 아기를 안고 있는 이모(산후 도우미)한테 다가가 제법 격식을 차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꾸벅거리며 “안녕” 한다. 방문을 여니 찬바람이 ‘쉬이익’ 들어친다. 이모가 갓난아기를 감싸 안는다. 얼른 문을 닫았다.

‘하니’는 으레 현관 앞에 철퍼덕 앉아 두 다리를 내뻗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하삐’만의 특권이다. ‘하니’가 그렇게 나한테 특명을 내렸다. 어쩌는가 보려고 지 아비가 신발 한 짝을 들면 기어이 그걸 뺏어서 “하삐” 하며 건네준다. 현관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서 엄마한테 다시 “안녕” 한다.

승강기 앞에 섰다. 내림 버튼을 누른다. 예의 다리찢기를 하면서 다시 폴짝폴짝 뛴다. 서너 번 뛰더니 제풀에 겨웠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숫자를 응시한다. 숫자가 바뀔 때마다 큰소리로 외친다.
“이일, 이이, 사암, 사아….”

승강기가 도착하자 “시입~싸!”라고 외친다. 채 열리지 않은 승강기 문에 조막손을 대고 두드린다. 동시에 입으로 “또또또옥”하고 주문을 왼다. 문이 열리자 버튼 ‘1’을 누른다.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있는 대로 치세운다. 눈 한 번 끔벅이지 않고 승강기 숫자판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시입싸~암, 시입~이, 시~빌….”

1층에 이르자 “이일”하고 외치며 뛰쳐나간다. 이윽고 내 차를 발견하고 “하삐”하며 반색한다. 번쩍 안고 자리에 앉혔다. 밸트를 매어 주고 시동을 켰다. 오른손을 번쩍 든다. 날 바라보고, “츄~바알!” 하더니 씨익 웃는다.

걸어도 1~2분 거리다. 차에 태우고 가다 보면 2~3분이 걸린다. 비상등을 켠 채 어린이집을 향한다.

“하니야,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밥도 꼭꼭 씹어 먹고, 약도 잘 삼키고…. 알았지, 이쁜 하니?”

알아듣건 말건 나 혼자 주저리주저리 되뇌었다. 말끝마다 ‘하니’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허공을 보고 “으응”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해야지 하면, 따라서 “네”하고 큰소리로 받는다. 동글동글 반짝반짝! 금세 또르르륵 흘러내릴 것 같다. 또롱또롱한 머룻빛 눈망울이, 흐리멍덩한 하삐를 맑힌다.

어린이집이 보인다. 전에는 9동 입구에서부터 곧잘 딴짓거리를 부렸다. 번히 알면서 갈래길에 이르러 앙탈스레 벋지르면서 반대쪽으로 내달았다. 그럴 때마다 어미, 할미 할 것 없이 진땀을 뺐다. 욕은 욕대로 보면서 ‘하니’한테 인심은 인심대로 잃으니 누가 선뜻 나설까. 아내는 필시 딸래미랑 짰을 것이다. 간밤에 설레발놓을 때부터 미리 낌새채지 못한 내 잘못이다. 아내는 아쿠아운동 간다고 아침도 먹지 않고 어느새 사라졌다. 못할 짓은 다 내 차지다.

오늘은 제법 의젓하다. 앙탈해도 별수없다고 깨단했을까? 갈래길에서도 고분고분하다. 말없이 졸졸 날 따라온다. 102호이다. 큼지막한 딸기 문양이 문을 통째로 장식하고 있다.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이 열린다. 선생님이 마냥 웃는 얼굴로 반가이 맞는다. ‘하니’ 손을 잡아끌면서 가방을 받는다. ‘하니’는 무덤덤하게 긴 의자에 앉는다. 대견하다 싶어 “하니, 안녕!” 하며 뒤돌아서는 순간 ‘하니’가 갑자기 “빠앙!”하고 울음보를 터뜨린다.

여리디여린 저 작은 아기가 얼마나 잘망스러웠을까?
뜨악한 얼굴로 다급하게
“하니야!”
하고 부르는데, 선생님도 참 웃지나 말지….
"그냥 가세요.”
하더니 문을 닫아 버린다.

방울방울 눈물짓는 하니 너머로,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쉼 없이 들려온다. 하릴없이 우두커니 서서 어린이집 창문만 바라본다. 빨간 딸기 문양만 도드라졌다. 어린이집 귀퉁이 돌아서다 말고 되돌아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 '하니'는 울음 밑이 긴 아이가 아니다. 잦아들었나 보다. 시동을 켰다. 하니가 앉았던 자리를 매만지며 어르고 다독인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안쓰러움 억누르려니 아리아리하다.

어제는 분명히 웃으면서 “안녕” 했는데….
손까지 흔들면서 “하삐하삐” 했는데….

어린이집에서는 추운 날이지만 하루에 한 번씩 바람을 쐬어 준다고 했다. 우리 '하니'(사진 왼쪽)는 그날부터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보내 준 사진(2021.12.03.). 
어린이집에서는 추운 날이지만 하루에 한 번씩 바람을 쐬어 준다고 했다. 우리 '하니'(사진 왼쪽)는 그날부터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보내 준 사진(2021.12.03.).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박춘근 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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