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하니 우리하니

강아지풀은 이삭 줄기 끝에 긴 털이 달려 있다. 연녹색이나 자주색이다. 이삭 모양이 강아지 꼬리를 닮았다. 중국에서는 구미초(狗尾草), 일본에서는 구자초(狗子草)이니, 3국 모두 ‘개꼬리풀’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영명은 푸른 여우꼬리(Green foxtail)다.

우리나라 고전 가운데 강아지풀을 검색하면 모두 28건이 나온다.
“농부가 어찌 낭유(稂莠) 때문에 파종을 폐하겠습니까?”
다산시문집’ 제19권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보충하면 강아지풀은 한낱 잡초의 대명사였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강아지풀을 잡초라는 의미의 ‘기음’으로 쓰기도 했다. ‘김’은 이를 줄인 말이다. 농부는 모름지기 ‘낭유’를 뽑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말이다.

“모두 다 소인들만 심어 놓고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여 (중략) 마치 강아지풀이 무성하여 아름다운 곡식이 그 속에 파묻힌 것과 같으니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는가?”
‘성호사설’ 제13권 종군자법(種君子法)에서 인용했다. 일종의 소인배를 강아지풀에 비유한 말이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기를, 낭유(莨莠)를 없애지 않는다면 좋은 곡식의 해가 되고, 간웅(奸雄)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직(社稷)의 화(禍)가 되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태조실록(1394) 2월 21일 기록으로,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글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는 ‘수크령 랑(莨)’자를 씀으로써, ‘낭유’가 수크령이나 미치광이풀, 그리고 가라지풀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덕(德)에 해를 끼치는 물건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강아지풀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간사한 무리였다.

조선의 이규경이 펴낸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야곡초(野穀草)’란 말이 나온다. 이는 곧 강아지풀, ‘랏’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강아지풀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야생초였다. 이는 가라지조[開羅叱粟]를 말하는 것으로 죽이나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랏’은 강아지풀보다는 낟알과 이삭[穗]이 더 큰 ‘수강아지풀’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강아지풀은 쌀과 보리에 섞어서 밥을 해 먹기도 했던 구황작물로 곡물인 조의 원종(原種)이다. 그러나 무조건 뽑아 버려야 하는 기음이었으니, 비유적인 표현으로 소인배, 간웅으로 취급했다.

아래는 태종실록(1403년 4월 4일)의 사간원 상소문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낭유(稂莠)를 기르는 자는 곡식[禾稼]을 상하고, 간궤(奸宄)에게 은혜롭게 하는 자는 양민을 해친다.”
‘낭유’는 ‘강아지풀’로, ‘해초(害草)’를 말한다. 여기에서 ‘강아지풀 랑(稂)’ 자와 ‘가라지 유(莠)’ 자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강아지풀과, 금강아지풀이나 피[稗]를 이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에서는 ‘랑(稂)’은 모양이 메조와 같은 가라지이고, ‘유(莠)’는 가라지의 다른 종류로 울타리 근처에 사는 작은 ‘강아디(지)풀’이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구미초(狗尾草)•광명초(光明草)•아라한초(阿羅漢草)와 같은 별칭이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일종의 어휘사전이요 백과사전이다. 구미초는 생김새를, 광명초는 생약명으로 그 효능을 본뜬 말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라한(Arhan)은 불가에서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른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줄여서 ‘나한’이라고 하고, 더 이상 배우거나 닦을 것이 없다는 의미의 무학(無學), 의역해서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이는 이미 생사를 초월하여 배울 만한 법도가 없게 된 경지에 이른 부처를 말한다. ‘용상(龍象)’ 또한 물속의 용과 땅 위의 코끼리처럼 큰 힘을 지닌 아라한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다. 그런가 하면 태종실록(1403, 영락)에서는 불가(佛家)의 언어, 오역(五逆)을 경계하고 있다. 이는 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의 악행을 말하는데, 아라한을 죽이는 일이 곧 아비나 어미를 죽이는 일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불교는 도입 초기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아주 강고한 호국신앙 정신으로 무장했다. 외적의 침입은 물론 내란이나 천재지변 등 국난기에는 전국의 승군이 누구보다 먼저 구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자연스럽게 한말의 승려의병은 일제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저들은 한국의 사찰을 억압•해산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 공포한다. 그러나 불교는 동학(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와 더불어 항일민족종교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니까 강아지풀은 역사적으로 반드시 뽑아버려야 하는 기음이요, 해초요, 소인배요, 간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행한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은 불교 최고의 지위를 개꼬리풀로 깔아뭉갠 조선의 만행은 두고두고 씁쓸하다. 어디 그뿐이랴.
조선의 숭유배불책과 일제의 불교 탄압은 하다못해 풀이름에 이르기까지 중을 비하하는 멸칭을 덧씌우기에 이른다.

사진 출처 :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위 사진은 시곗바늘 방향으로 중대가리풀, 중대가리나무, 까마중, 광대수염, 광대나물을 가리킨다. 모두 중을 비하하는 멸칭이다.

중대가리풀은 말 그대로 열매 모양이 승려의 머리처럼 생긴 데서 유래한다. 다른 말로 토방풀이다. 토방(土房)이란 뜰이나 마당을 뜻한다. 마당이나 뜰에서 자라는 풀로 제격이다. 구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애기구슬꽃'으로도 불린다.

중대가리나무 또한 마찬가지다. 열매가 삭발한 스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지만 엄연히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다. 머리꽃나무 또는 구슬꽃나무다. 좋은 이름을 두고 굳이 혐오스러운 표현을 쓴다는 것은 상스럽다.

감자, 가지, 고추, 토마토는 가지과 작물이다. 이들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주는 해충이 있다. 28점 무당벌레다. 애벌레, 성충 할 것 없이 이파리를 몽땅 거미줄처럼 만들어 버릴 정도로 먹성 좋은 녀석이다. 이들과 한집안이다 보니 농부들은 까마중을 재배하거나 방치한다. 까마중을 일종의 시정마(始情馬ㆍTeaser Horse)로 부리는 셈이다. 시정마란 몸값 비싼 씨수말이 교미를 하기 전까지 암말을 애무해 줌으로써, 암말을 최대한 흥분 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귀하신 수말이 성질 사나운 암말에게 채이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한껏 달아오른 시정마는 씨수말의 교미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아무튼 까맣고 반질반질하게 익은 열매를 보고 ‘까만 중의 머리’를 연상했다니 너무 천박하지 않은가? 산림청에서 사투리라고 한 까마중이, 깜두라지, 먹딸, 강태, 개꽈리가 훨씬 정겹다.

광대수염의 일본 이름은 오토리코소[踴子草, 용자초]로 춤 추는 광대꽃이다. 이를 직역하다 보니 그랬겠지만, 순백의 꽃잎이 승무를 추는 승려의 흰 고깔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광대나물도 마찬가지다. “일본명 호도께노자(仏の座)는 꽃을 받치고 있는 꽃싼잎[苞葉, 포엽]의 모양이 마치 부처님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를 닮은 데서 유래한다. 한자명 보개초(寶蓋草) 역시 ‘보물(부처)을 싸고 있는 풀’이라는 뜻으로, 꽃이 마주하는 포엽에 싸여 있는 모양을 말한다.”(한국식물생태보감, 김종원)

아무려면 스님을 그토록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할 수 있을까? 부처를 광대에 견준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지만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그래도 아직 그런 이름을 고집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무지하고 무례하고 배타적 인간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는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광신자가 아닐까?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까까머리였다.
때가 되면 할머니의 부름을 받고, 옆 동네 아저씨가 우리 집 마당으로 마실을 오셨다. 그때마다 머리통을 쥐어잡힌 나는 발가벗겨진 채 닭장 옆 포도나무 그늘 아래 앉아야 했다. 애걸복걸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지만 소용없었다. 얄미운 어른들은 막무가내였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악을 쓰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사정없이 등짝을 갈기면서 날 옥죄었다. 누군가는 곰방대를 물고 인물평까지 늘어놓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보기만 해도 무서운 삭도(削刀)로 수십 번을 밀고 또 밀었다. 속절없이 끌려 온 친구들은 처음부터 이 징한 꼴을 지켜보며 함께 들썩거렸다.

지금도 그 당시 어른들의 의도는 알 수가 없다. 그 흔한 기계독(機械毒)을 없애려고 그랬는지, 머리숱을 풍성하게 해 주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면 손님마마로부터 손주를 보호하려는 액막이였든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행위였음은 분명하다.

날이 춥다. 미세먼지 자욱하다. 코로나 때문인지 너나없이 남 탓에 여념이 없다. 우짖던 새 모두 숨고 바람도 자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부룩한 풀숲 새 빛바랜 강아지 떼가 흐느적거린다.

 

오요요
얼러러러
오메, 우리 강아지

삽작문 밖 뛰쳐나와
안고 돌고 업고 돌고
갱상도 방애꼬
둥개둥개 둥가야
덩실덩실 춤사위
혀굴리는 소리
아, 할머니...

흔해서 천한가
천해서 흔한가
지천으로 피어
속없이 웃던 강아지풀
살갑게 꼬리 흔들며 날 반기고
뒤돌아보면 ‘안농’ 하며 허리 굽히고

갯가에 핀 강아지풀 물새들 길벗 되고
풀숲에 핀 강아지풀 풀새들 쉼터 되고
뒤란에 핀 강아지풀!
우리 하니 토끼 되고
우리 하니 다람쥐 되고
우리 하니 갈매기 되고....

눈 뜨면 아슴아슴하고
눈 감으면 덩두렷하고

하니하니하니야,
니가 두르던 마스크 보며
하삐가 눈을 감을 수밖에

오요요
얼러러러
오메, 우리 강아지....

 

2021년 12월  22일 06시 06분, 우리 하니는 태어난 지 731일 만에 하늘로 되돌아갔다.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박춘근 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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