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하는 형용 모순의 시대(2)

천진 아기, 그리고 숫백성

천진(天眞)은 곧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참된 마음’을 일컫는 불가의 용어다. 여기에서 나온 천진난만(天眞爛漫)은 ‘하늘에서 타고난 그대로 핀 꽃과 같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감히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수식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로지 티 없이 맑고 꾸밈이 없는 ‘아기’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한편 ‘손을 대지 않아 본디 그대로 있는’, 또는 ‘손을 타지 않아 깨끗한’을 의미하는 말이 있다. 즉, ‘천진’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숫-’이다. 예컨대 숫하다(순박하고 어수룩하다), 숫지다(순박하고 인정이 두텁다), 숫눈(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 숫보기(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 수컷(손을 대거나 변하지 아니한 본디의 순수한 것), 숫처녀, 숫총각, 숫색시 등과 같이 쓰인다,

아기는 하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천진난만의 표상이다. (사진은 필자의 외손주 하니, 오늘로 23개월 28일째이다.)
아기는 하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천진난만의 표상이다. (사진은 필자의 외손주 하니, 오늘로 23개월 28일째이다.)


‘아기’ 말고 ‘숫’과 어울리는 한 무리가 더 있다. ‘백성’이다. 예로부터 ‘숫백성’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거짓을 모르는 순박함이 백성의 본디 성품이다. 반면에 ‘숫’이나 ‘천진’의 상대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많다. ‘약다’, ‘섞이다’, ‘더럽다’, ‘탁하다’, ‘야하다’, ‘천하다’, ‘꾸미다’, ‘엉큼하다’, ‘사사롭다’, ‘교활하다’, ‘야비하다’ …. 당연하지만, 이런 말은 ‘아기’나 ‘백성’과 함께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과 찰떡궁합을 보이는 말은 무엇일까? 어딘지 모르게 이 땅의 ‘위정자(爲政者)’를 수식하는 말로 제격이다.

다시 말하면 ‘숫’이나 ‘천진’은 위정자나 정치가와 함께 쓸 수 없다. 형용하는 말이 형용을 받는 말과 모순되는, 의미상 양립할 수 없는 말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형용 모순(形容矛盾)’이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되풀이하고 이를 금과옥조처럼 널리 퍼뜨리고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

형용 모순의 효시, 그리고 대물림

물론 형용 모순의 효시는 따로 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으로 맺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그것이다. ‘자유 조선’, ‘만고의 빨찌산’, ‘절세의 애국자’, ‘해방의 은인’, ‘위대한 태양’ 모두 김일성을 형용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태양의 위엄 빛내신 인민의 령도자’, ‘주체의 락원 가꾸신 행복의 창조자’, ‘자주의 기치 높이 든 정의의 수호자’는 1997년 ‘김정일 장군의 노래’ 구절이고, 2015년 ‘김정은 장군 찬가’에서는 “장군은 강대한 조선의 기상이요, 조선의 심장이요, 영원한 우리의 행복이요, 눈부신 세기의 태양”이란다. 얼마나 낯간지럽고 오글거리는가?

어찌 이에 버금가랴마는 이 땅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 형용 모순의 역사가 있다. 또 현재한다. 어쩌면 김가네를 본뜬 것인지도 모른다.

“공보실에서는 민족의 영도자 리 대통령 각하의 존영을 전국 각급 학교에 배치해서 자라는 학생들로 하여금 각하의 위훈을 추앙케 하기 위해서 12월 12일 갈홍기 공보실장은 전국의 학교 공보 관계관을 통해서 분배했습니다.”

e영상역사관에 수록된 대한뉴스 제72호(1955년 제작)에서 인용한 것이다. ‘각하의 위훈을 추앙케 하기 위해서’ ‘민족의 영도자 리 대통령 각하의 존영’을 전국의 교실에 걸어 두었다. 다행이라면 ‘각하의 존영’을 안방이나 대청마루에 걸지 않았다. 배지를 만들어 사람들 가슴에 달게 하지도 않았다.

출처 :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 72호, 「대통령 각하 존영 전국교육기관에 배부」
출처 :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제 72호, 「대통령 각하 존영 전국교육기관에 배부」


그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인 3월 26일이면, 해마다 온 나라에 대통령 찬가가 울려 퍼졌다. 바로 ‘우리 대통령’이다.

1.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 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 / 그 이름 기리기리 빛나오리라.

2. 오늘은 리 대통령 탄생하신 날 / 꽃피고 새 노래하는 좋은 시절 / 우리들의 리 대통령 만수무강을 / 온겨레가 다 같이 비옵나이다.

3. 우리들을 리 대통령 뜻을 받드러 / 자유 평화 올 때까지 멸공 전선에 /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위는 당시의 어법 그대로 옮겨 적은 ‘우리 대통령’의 전문이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80살 생일을 맞아 박목월이 작사하고 김성태가 작곡했다. 이듬해인 1956년에 대통령 공보실에서는 ‘방송어린이노래회’가 부른 2분 16초 분량의 합창곡을 제작한다. 이는 e영상역사관의 ‘대통령기록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경의라기보다는, 이승만 개인을 우러르는 ‘찬송가’이다.

▲ 공식 석상에서 이승만 찬가를 부르는 방송어린이노래회 어린이들(출처 : e영상역사관 갈무리) ▼ ‘우리 대통령’에 맞추어 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즐겼다(사진 출처 : 나무위키)
▲ 공식 석상에서 이승만 찬가를 부르는 방송어린이노래회 어린이들(출처 : e영상역사관 갈무리) ▼ ‘우리 대통령’에 맞추어 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즐겼다(사진 출처 : 나무위키)

 

김일성 우상화와 개인숭배 사상은 필연적으로 김일성을 교주로 하는 신흥 종교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북조선 인민 모두 김일성교를 신봉하는 광신주의자로 둔갑한다. 그래서 ‘김일성 수령’의 말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항구적으로’ 추구하는 이념이 되고 경전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우상화와 신격화는 하수인들의 광기로 치닫는다. 이승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들에게 이승만 생일은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해야 했다. 거리낌 없이 그를 ‘국부’나 ‘국보’라 칭한다. 나아가 ‘서울시’를 ‘우남시’로,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으로 고치려고 꾀를 부린다.

아부의 달인, 이익흥의 송수탑과 우남로

1955년 6월 15일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는 함태영 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적 행사가 열린다. 경기도지사 이익흥이 이승만의 팔순을 기념해 기획한 ‘송수탑’ 제막식이다. 높이 8미터의 팔각탑 꼭대기에는 비상하는 청동 봉황새를 조각했다. 이익흥은 “국부 리 대통령 각하 제80회 탄신 기념사업으로서 「대통령 리승만 박사 송수탑」 제막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같은 날 남한산성에서 광주까지 이어지는 ‘우남로’를 개통한다.

이 행사를 주관한 이익흥이 누구인가? 1956년의 ‘이승만 대통령 방귀 사건’으로 회자하는 위인이다. 부영주 선생이 밝힌 칼럼(뉴제주일보, 2017.5.14.)의 일부를 옮긴다.

“이승만 대통령이 광나루에서 낚시를 하던 중 방귀를 뀌자, 옆에 있던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익흥 내무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하고 아부했다는데, 그런 사람이 대통령을 보필하고 장관 노릇을 하면 대한민국의 명의(名義)가 서겠는가!…. 당시 시중에서는 이 장관이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 출신인데, 이 대통령에게 아부해 출세 가도를 달린다는 얘기가 회자할 때였다. 이 장관이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했지만, 1956년 8월 1일 자 국회 속기록엔 아직도 그 발언 내용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남산공원과 부산의 용두산공원 모두 ‘우남공원’이 되고, 남산 팔각정은 ‘우남정’으로 이름을 고쳐 부른다. 우남회관(서울 세종문회회관 자리), 우남송덕관(뚝섬), 우남도서관(대전 연정국악원 자리), 우남기념도서관(중앙대학교)이 세워진다. 도처가 우남천지로 둔갑한다.

(출처 : 공유마당, 국가기록원)
(출처 : 공유마당, 국가기록원)

 

자연스럽게 그의 흉상이 곳곳에 세워지고, 김일성 동상보다 큰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 송덕관, 송수탑(頌壽塔), 기념탑을 세우고, 기념 우표•지폐•주화도 제작한다. 그렇지만 “돈을 접으면 이승만의 얼굴이 반으로 구겨져 훼손된다는 이유로 2년 후 발권이 중지되고, 1958년부터 한복 대신 양복 차림의 초상화를 오른쪽에 ‘모셨지만’ 4·19혁명 후인 1962년부터 지폐에서 그의 얼굴은 사라졌다.”(정준모, 시사저널, 2014.4.23.)

1956년 8월 15일, 이승만 탄생 80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신궁(朝鮮神宮)이 있던 자리에 이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선다. 이는 1955년 10월 3일 개천절에 착공해서 이승만이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에 맞춰서 완공한 것으로, 그의 나이와 같은 81척(약 25m)에 달하는 동양 최대 규모의 동상이었다. 대지 면적은 3,000평, 좌대는 270평이었고, 8각의 좌대에는 면마다 그의 생애를 조각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그가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 뒤, 그해 8월 시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이승만 동상, 철거되는 동상(출처 : 한겨레신문, 2020.1.8.)
이승만 동상, 철거되는 동상(출처 : 한겨레신문, 2020.1.8.)

 

1958년에 제작한 이 대통령 탄신 82회 영상 자료(8분 41초)를 보면, 당시의 시대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경무대 관저에는 아침부터 자유당 간부를 비롯하여 국회와 사법계 요인들, 삼군 수뇌부, 군무위원 전원, 재한 외국 사절들, UN군 고위 장성들이 모여든다. 수도 서울은 경축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중앙청에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거리마다 무희와 가수들이 탄 꽃전차와 꽃버스가 흥을 돋우고, 이를 구경하는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한다.

오후 2시 중부 소방서에 마련된 진열대를 중심으로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군악대 퍼레이드에 이어 제트 편대가 비행하는 가운데, 각종 병기가 위엄을 드러낸다.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 ‘친람’하는 가운데 경축 무술 대회, 마라톤 대회, 농악 행렬이 이어지고, 무료 공개된 ‘창경원’과 덕수궁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소공동 공보관에서는 ‘우남 전시회’를 개최하고, 시립극장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그린 연극 ‘풍운’을 상연한다.

단 한 순간의 공연•합창•매스 게임을 위해, 겨우내 동동거리며 ‘예행연습’에 시달렸을 어린이•학생•장병•가수•무희•배우 들……. 이 모두 이승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아, 이승만은 곧 대한민국의 ‘왕’이었고, 이승만 정권은 ‘절대 왕정’이었다!

밤이라고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주재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의 밤’이 펼쳐진다. ‘우리 대통령’ 합창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지막 내레이터가 자못 비장하다. 민망하고 유치하고 느끼하기 그지없는 형용 모순의 극치를 보여 준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오색의 불꽃이 퍼지고, 이렇게 해서 ‘민족의 빛’이며 ‘인류의 등대’이신 ‘리 대통령 각하의 「무량의 장수」를 빌고’, 아울러 ‘만세의 봄빛이 길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가운데 밤은 고요히 깊어갔습니다.”

82회 생일 잔치 이모저모(출처 : e영상역사관, 대통령 기록 영상, 「이승만 대통령 생일」)
82회 생일 잔치 이모저모(출처 : e영상역사관, 대통령 기록 영상, 「이승만 대통령 생일」)

참고 사이트 :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2307&mediadtl=9182&gbn=DT

(계속)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박춘근 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