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고 곱씹는다. 정치가는 모름지기 <바로 잡는 사람>이다. 그래야 한다. 하다못해 초등학생들도 이를 익히 알고 있다! 전교어린이회장은 물론 학급의 회장, 부회장, 줄반장, 조장 할 것 없이 ‘장(長)’ 자가 붙은 이라면 본인 스스로 앞장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그 자리를 온전히 버팅길 수가 없다.


물론 필자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는 그렇지 않았다. 급장이나 애향단장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분단장이나 서기만 돼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으레 군림하기 일쑤였고, 선생이 아닌 학교 ‘소사’의 자식만 돼도 엄청난 특혜를 누렸다. 신작로에 자갈을 깐다고 할머니 대신 울력을 나다니던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저들의 일탈과 횡포마저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저들의 눈에 띄면 옴치고 뛸 수조차 없다. 흰소리, 잡소리, 가리는 아이들이 아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내키는 대로 내쏘는 아이들이다. 실제로 그들의 정치의식은 언제나 내 경험이나 준칙을 초월한다. 저들의 깝치는 재주는 난다 긴다 하는 선생들도 어쩌지 못할 때가 많다. 바담풍 하면서 바람풍 하라면, 시쳇말로 영이 서겠는가?
마찬가지다. 솔선수범하지 않는 위정자! 그대는 초등학생만도 못한 저열아(低劣兒)다.

 

<초등 사회 개념 사전>에서는 ‘정치’를 “사람들 사이의 견해차나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정치가는 곧 그런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을 주도하는 사람이다. 소위 정치가를 자임하는 당신은 능숙하고 불편부당한 ‘해결사’가 돼야 한다. 그런데 ‘해결사’는 중의적 표현(重義的表現)이다. 즉,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나, 채무 따위에 관련된 일을 맡아 폭력으로 해결해 주고 돈을 받는 폭력배’를 이르기도 한다. 조폭 같은 위정자가 없는지 눈 크게 뜨고 살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무리를 모리배(謀利輩)라고 한다.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이로움(利)을 꾀(謀)하는 무리(輩)다. 한편, 정치가와 결탁하거나 정권을 이용하여 세속적 야심을 채우려는 무리가 정상배(政商輩)다. 이 둘의 속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팔도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바로 정치꾼이다. 그러니까 정치꾼은 모리배나 정상배와 짬짜미를 즐기면서 애면글면 패악질을 부추기는 사특한 집단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정치’는 혼탁하고, ‘정치가’를 찾기 어렵다. 자연스레 ‘정치’는 이제 정치가의 전유물일 수 없다. 다행히 그들이 더럽힌 ‘정치’가 초등학교에서 살아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정치’를 익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 실천하고 있다.

 

필자가 퇴임하기 이태 전, 서울대조초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전교어린이회장으로 당선, 임명장을 받은 학생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정견 발표 당시 그가 한 말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학교 급식은 무상급식이다. 우유를 포함한다. 특별히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어린이는 보호자가 연초에 우유 급식 중단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누구나 우유를 마셔야 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아이들이 우유 마시기를 싫어한다. 아이들이 집에 간 뒤에 보면 책상이나 신장 속, 화장실이나 화단 구석에 우유갑이 나뒹굴기 일쑤다. 사물함 속에서 꼬리꼬리한 냄새가 진동한다면 이는 필시 오랫동안 처박아 둔 우유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타협을 한답시고 ‘먹기 싫으면 솔직히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아라. 그러면 급식 도우미 할머니나, 화장실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드릴 수가 있지 않으냐?’고 했더니……. 맙소사, 잘 마시던 아이들까지 내놓는 바람에 우유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자기가 당선되면 ‘흰 우유’를 ‘초코 우유’로 바꾸겠다고 공언한 후보가 나타났다. 그는 짬날 때마다 지지자들과 함께 교실을 돌아다니며 ‘초코 우유’를 내세웠다.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데, 솔직히 버려지는 ‘흰 우유’가 얼마나 아깝냐고 하소연했다. 그게 주효했는지 그는 당선이 됐고,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이들은 당선자 뒤를 쫓아다니면서 ‘내 초코 우유’를 달라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일부 학생들은 유권자를 속인 거짓 공약이라면서 당선 무효를 주장했다. 요는 그 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선풍적인 지지를 유도한 ‘초코 우유’가 아니라면 당선은 택도 없었을 것이라고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급기야 4학년 아이들까지 ‘내 말이 그 말’이라며 한동안 성가시게 쫓아다녔다.

급기야 당선자의 아버지는 학교장을 찾아와 우유 교체를 호소했다. 하지만 ‘흰 우유’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불변의 교육 지침이었다. 흰 우유를 능가하는 완전식품은 없고, 상대적으로 가공우유의 당 함량이 지나치게 높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용 일체를 자기가 부담할 테니, 전교생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초코 우유를 먹여 달라고 읍소했다. 역시 안 될 말이다. 2014년 당시 누구든 학교 안으로 빵 한 조각 들일 수 없고, 보안관 모르게 들인 물품은 바로 신고하고 돌려주던 때였다.

 

<한국 죽백초등학교>와 <미국 샌디에이고 도일초등학교>의 전교어린이회장 선거 포스터(교육부 블러그, 2018. 03. 20.)

 

우리 사회에는 ‘흰 우유’라는 지침과 규정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초코 우유’라는 사탕발림으로 유권자를 속이고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 그딴 짓거리가 이젠 초등학생들에게도 통하지 않지만, 지금도 요동치는 곳이 있으니 이 땅의 정치판이다. 숫제 밤낮으로 눈 가리고 아웅질이다. 시계를 조금 거꾸로 돌려 보자.

 

1992년, 학술단체협의회에서 6공화국 백서 – 노태우 대통령의 44가지 잘못 –를 펴냈다. 당시 필자(필명 박불휘)는 전교조 연구부 소속으로 <잘못 19> ‘가난한 학교, 시드는 아이들’을 집필했다(백서, 282~302쪽).

91년 6월 30일 현재 교육부가 밝힌 <대통령 공약 사업 추진 현황>에 따르면, 이미 ’89년과 ’90년에 <청소년 교육환경 개선>이나 <농어민 자녀 교육 여건의 개선> 모두 완료된 사업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업을 달성하는 데 소요된 경비를 계산하니 학생 1인당 4원 꼴인 4천만 원에 불과했다. 옹색하다 못해 몰염치한 노태우 정권의 민낯이다. 해방 이후 그때까지 세계적 명물로 부상한 콩나물교실, 매머드 학교, 2부제 수업, 비인간적인 학교 시설과 교구 설비, 교직원의 척박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 구조, 총교육비의 70.7%를 차지하는 살인적인 사교육비 규모 등 열악한 교육 조건은 최고 통치자의 교육 홀대를 반증한다.

그 결과, 민자당 -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인이 몰래 모여 3당을 합당하여 만든 정당 - 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1990.12.31. 법률 제4303호)을 날치기 통과함으로써, 국책 사업의 대부분을 노골적으로 지방교육청사업으로 이관하고 만다. 이로써 ‘생니 뽑아 틀니를 박는’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교육비 강화라는 본질과는 거리가 먼, 교육세 영구화를 획책하였다. 당연히 주어야 할 ‘흰 우유’는 고사하고, 초콜릿 맛 풍기는 ‘초코 우유’마저 요리조리 빼돌리며 학생에게 먹일 ‘우윳값’마저 정권 유지비로 유용한 것이다. 노회한 저들의 술계를 어찌 다 헤집으랴. 겉으로는 백년대계라며 한없이 추기지만, 교육은 늘 그렇게 찬밥이었고 아이들은 천덕꾸러기였다. 문교부라는 곳간지기조차 힘도 의지도 없으니,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식으로 이놈 저놈 지르고 보는 게 교육재정이었다.

 

「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이뤄진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 모인 김종필(오른쪽부터), 노태우, 김영삼」 (출처 : 한겨레신문, 2018.06.23.)“(민주자유당은)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범하여 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존속한 한국의 집권 보수정당. 창당부터 개명 당시까지 계속 여당이었으며 약칭은 민자당. 현재 원내 정당인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뿌리이다.”(나무위키)

 

그로부터 29년이 지났다.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국민의 나라, 모든 특권과 반칙, 불공정을 일소하고 차별과 격차를 해소하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아닌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재인미터 4주년 평가’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의 교육 부문 <공약 완료>는 8.93%로, 10개 부문의 점검 대상 가운데 8위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교육의 공약 이행률이 낮은 것은 전체 공약 중 66.07%가 진행 중으로 평가될 만큼 장기 과제가 많고, 보수 야권과 기득권의 저항이 큰 탓도 있겠지만, 여당의 압도적 국회 의석수를 고려하면 전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의지 부족에 기인한다.

 

주요 부문별 공약 이행도 평가 결과(문재인미터 4주년 평가)

 

나는 이제 “교원에 대한 예우와 처우를 개선하고 신분 보장을 강화함으로써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교육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1991년 5월 31일 제정된 교원지위법(법률 제4376호)을 중심으로 임금 부분을 되짚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법은 1985년의 민중교육지 사건과 1989년의 전교조 결성에 대한 대응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체교섭권의 주요 부문을 배제하고, 모든 단체행동권을 박탈했다. 따지고 보면 교원의 지위와 보수가 특별히 우대받도록 특별법을 제정할 정도로, 교권은 추락하고 저임금에 허덕여야 했다.

생각해 보라. 지자체 행사 때 국민학교장의 자리를 우체국장이나 면사무소장보다 우대하라는 명문만으로 교원의 지위가 향상되는가? 지금도 본법 시행령 제5조 ②항에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그가 주관하는 행사 등에 교원을 참여시키는 경우에는 좌석 배치 등에 있어서 교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한마디로 실효성 없는 선언적 규정이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해묵은 필자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계속)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박춘근 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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