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부산 영도 <태종사 수국>한마당 행사에서 어머니가 수국을 배경으로: (출처 하성환)
2020년 7월 부산 영도 <태종사 수국>한마당 행사에서 어머니가 수국을 배경으로: (출처 하성환)

 

이틀 전이 어머니 생신 일이다. 그러나 이젠 어머니 얼굴을 봴 수 없다. 부산 영도엘 가도 어머니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환한 얼굴로 반기던 그 모습이 그립다.

장인 어른 추모 기일을 맞아 나흘 전 부산엘 내려갔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들어가 가만 가만 어머니 유품을 만지다 그만 자리에 누웠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제 2주가 흘렀다. 여전히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 같고 꿈만 꾸는 것 같다. 슬픔을 위로 받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가슴엔 여전히 그리움과 슬픔만 가득하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교직을 영원히 떠나고 영도 어머니 집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오래 사셔 봐야 4-5년을 더 사실까. 어머니는 지난 해 간 수술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지난 해 5월 동생이 보낸 문자를 보고 가슴이 철렁 했다. "형님, 연락 드리면 곧장 부산으로 내려오세요." 임종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 졸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의료진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두 동생들이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렇게 동생들 간병 덕분에 어머니는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기사회생 했다.

그렇게 위기를 넘겼고 7월 방학을 맞아 큰아들인 나는 한 달 간 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손을 잡고 해양대 앞 아미르 공원을 거닐고 싶었다. 수국이 도열한 기다란 그 길을 따라 같이 산책하고 싶었다. 힘들면 벤치에 앉아 옛날이야기도 들어드리고 싶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인 학생들끼리 우리말로 대화하면 일본인 교사가 "고레! 조센징" 하면서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도 다시 듣고 또 듣고 싶었다. 나아가 한국 전쟁 와중에 가슴에 맺힌 남모를 이야기도 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백신을 맞지 않았고 걸을 힘조차 없으셔서 바깥으로 나가기를 꺼려하셨다. 홀로 여름날 저녁 늦게 까지 산책을 하고 현관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근심 어린 눈으로 큰아들을 맞아 주었다. 육십이 넘은 아들임에도 여름날 어둑어둑한 늦저녁에 들어오면 늘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6남매 큰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6남매 중 가장 순한 순익이 삼촌이 돌림병으로 돌아가셨고 열다섯 살에 갑자기 한국 전쟁을 맞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분 모두 17살에 결혼해 임실군 관촌 논밭을 일구며 자수성가 했다. 일제 강점기 외할아버지는 손수 야학을 열어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지주 집안', '마을 유지'라는 이유로 추석 전날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관촌 철교 밑에서 총살 당했다. 그때 나이 33세였다. 너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외할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혹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시작하면 외할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실성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한국 전쟁은 어머니에게 가혹한 현실로 다가왔다. 당장 어머니는 전쟁 전 다니던 전북고녀(오늘날 전주여고)를 중퇴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도 막막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쟁 1년 전에 태어난 막내 광익이 외삼촌을 등에 없고 오늘은 이 마을, 그리고 내일은 저 마을 아랫동네를 전전하며 젊은 처자 젖을 얻어다 먹였다. 외할머니는 큰 충격으로 젖이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을 건사했다. 이모와 삼촌들이 장성하도록 돌보았고 하나둘 결혼도 시켰다.

말단 공무원인 아버지 월급으론 생활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곗돈으로 목돈을 만들고 직접 우유대리점도 하셨다. 시댁 식구 8남매 맏며느리로서 어머니는 시댁에 정성을 다했다. 성품이 친할아버지를 닮아 온순한 경엽이 막내 삼촌과 순금이 고모를 부산으로 오게 했다. 새벽녘 우유대리점 일을 하면서 큰아들인 글쓴이와 4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 생신을 앞두고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글라디올러스> 생화를 부모님께 올렸다(출처 : 하윤숙)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 생신을 앞두고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글라디올러스> 생화를 부모님께 올렸다(출처 : 하윤숙)

 

물론 막내 여동생은 스스로 학비를 벌었고 스스로 대학을 마쳤다. 자라면서 우리 4남매 가운데 가장 부모님 사랑을 받지 못한 막내 여동생임에도 어느 자녀 이상으로 부모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살피며 깨끗한 아파트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부족하지 않게 용돈도 넉넉히 드렸다.

지난 해 막내 내외와 함께한 어머니 생신일 모습. (출처 : 하성환)
지난 해 막내 내외와 함께한 어머니 생신일 모습. (출처 : 하성환)

 

한의사인 사위의 보살핌 또한 컸다. 몇 번의 위기를 여동생 내외의 보살핌과 남동생의 극진한 간병으로 어머니는 위기를 잘 넘기셨다. 어머니는 강한 분이셨다. 지나고 생각하면 그 시절이 고맙고 그립다. 어머니 생신이나 아버지 추도 일에 모두 모여 가족 사랑을 나누던 그 시간들이 그리움으로 남는다.

부모님이 계신 <실로암 공원 묘원> 입구(출처 : 하성환)
부모님이 계신 <실로암 공원 묘원> 입구(출처 : 하성환)

 

어느 겨울날 새벽 기도를 가셨던 어머니는 귀가해서 큰아들인 나에게 그러셨다. 추운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느 할머니에게 당신 "겉옷을 벗어서 건네주었다"고 하셨다. 아들인 나는 어머니께 "잘하셨어요. 어머니!"라고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항상 선잠을 주무셨다. 그러다가 무슨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들리면 곧바로 일어나셨다.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해방, 그리고 전쟁과 독재로 점철된 시대! 어머니는 그 험난한 시대를 선잠을 자며 살아오셨다. 큰아들이 서울에서 야학 교사를 하며 대학 시절을 보내는 걸 걱정하셨다. 방학 때 어쩌다 부산 집으로 형사가 찾아 오면 어머니는 큰아들이 어찌 될까봐 걱정어린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불안한 시대를 견디셨다.

이제 어머니는 영면에 드셨다. 선잠을 주무실 필요도 없이 영원히 안식을 누리길 마음으로 빌어본다.

"어머니, 이젠 천국에서 평안을 찾으시고 편히 쉬세요!"

어머니 생신 일을 하루 앞두고 부모님 묘소 앞에서(출처 : 하성환)
어머니 생신 일을 하루 앞두고 부모님 묘소 앞에서(출처 : 하성환)

 

하늘을 쳐다봐도 눈물이고 거리를 둘러봐도 온통 슬픔이지만 두해 전 먼저 하늘길로 떠난 누님을 천국에서 해후했을 거라 생각하니 슬픔은 저만치 물러선다. 내년에 어머니 손잡고 해양대 앞 아미르 공원 수국 꽃길을 산책하고 싶었지만 이젠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됐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못 다한 마음을 천상에 전하고 싶다.

 

"어머니, 편히 쉬십시오. 살아 생전 어머니 뜻을 잘 받들어 남은 동생들과 의 좋은 형제로,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지내겠습니다. 사랑해요. 어머니!"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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