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내리건대, 해의 차례는 임인년 오월 병오 초하루 스무여드렛날 경술, 이른바 2022년 6월 26일
후학 형광석은 청정한 몸가짐과 경건한 마음으로 감히 밝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우러러보며
백범 김구 선생 영전에 아뢰오니,
낯설고 물선 이역만리(異域萬里) 중국에서 바람을 밥처럼 잡수시고 차디찬 이슬을 이불처럼 덮고 자는 몹시 처절하고 참담한 시련을 견뎌내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오신 백범 선생이시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만3천리 대장정, [상하이(上海, 1919.4.11. 임정 수립)~항저우(杭州, 1932)~자싱(嘉興)~하이옌(海盐)~쩐장(鎭江, 1935)~난징(南京)~한커우(漢口)~창사(長沙)~광저우(廣州,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重慶, 1940)~상하이~서울 경교장(京橋莊, 1945.11.2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은 문자대로 풍찬노숙(風餐露宿)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연속이었고, 특히 윤봉길 의사의 중화민국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 의거(1932.4.29.)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피는 마르고,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고난을 견뎌내고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이겨내도록 이끌어 오신 선생이시여!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서 김순영(金淳永) 선생과 곽낙원 선생의 외동아들로 태어나시어,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와 그를 앞세운 세력에 목숨을 빼앗기시고, 1949년 7월 5일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三義士)가 영원히 쉬시는 효창공원에 영면하신 백범 선생이시여!
조선왕조 말기의 문란(紊亂)한 현실을 투철하게 통찰하고 18세에 동학에 입문한 후 19세에 태생지인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일대의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고 항일 의병에 참여하셨으며, 1895년 을미년 일본이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1905년 을사늑약 등처럼 나라에 절체절명의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온몸으로 구국 대열에 앞장선 연유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하고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는데도 학교를 세워 교육에도 힘쓰고 농촌 부흥 운동에도 힘을 기울이셨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가운데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술회하신 말씀과 같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해방을 맞이한 조국의 장래를 심히 걱정스럽게 바라보시면서 우리 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민으로 자리매김하고 살아 나아가길 염원하셨던 백범 선생이시여!
당신께서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에서 말씀하셨죠.
“나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마음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원하는 나라로 나아가는,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 사이의 협곡에서도 양쪽 풀을 뜯어 먹으며 꿋꿋이 나아가야 하는 대한민국을 굽어보시고 보살펴주소서.
이렇게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비추는 청명한 하늘, 혼령으로 오셔서 ‘높은 문화의 힘’을 키워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굽어보시옵소서.
단기 4355년, 대한민국 104년, 서기 2022년 6월 26일
묵념 ~ ~ ~
독축(讀祝): 형광석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