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남미 원주민이 유럽에 보상을 요구했다. 앞서가는 듯 보이는 유럽의 문명은 누구 희생으로 꽃피운 것인가? "수탈된 대지"에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주목한 15세기 포토시는 해발 5000미터가 넘는 고지에 번쩍거리는 은광이 있었고 당시 원주민은 섬광이 두려워 접근하지 않았지만, 지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유럽인이 휘두른 채찍으로 족쇄와 쇠사슬에 묶인 원주민들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현재 유럽은 가능할 수 없었다. 원주민 후손은 유럽에 원금이 아니라 이자를 요구했다는데, 응한다면 유럽 경제는 즉시 무너지리라.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 나우루 공화국은 화려한 축제의 찰나를 보냈지만, 지천이라 생각한 인광석이 동이 난 지금은 몹시 우울한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영겁의 세월 남태평양의 바닷새들이 배설해 쌓이고 쌓여 돌처럼 굳은 인광석은 식민지 쟁탈에 혈안인 유럽의 식량 증산에 기여했다. 열강의 수탈로 절반 이하로 남은 인광석을 국유화한 나우루 공화국도 잠깐 횡재를 구가했지만, 바닥을 드러내자 비참해진 상황은 인광석에 국한하지 않는다. 검은 황금인 석유는 아니 그럴까? 석유보다 많이 남은 석탄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 6월 12일, 헌법재판소 앞은 일요일에도 모여든 인파로 분주했다. ‘아기 기후 소송’이 제기된 현장이었다. 2030년까지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2018년 기준으로 40퍼센트 줄인다면 현재 아이들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다. 이산화탄소 배출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정 이후 줄어들까? 오히려 늘어나기만 하는데, 2030년은 8년 남았다. 어떤 조상도 자기 아이의 내일을 위험하게 물려준 적이 없건만, 8년 후 청소년이 될 우리 아기의 생명은 풍전등화다. 그래서 ‘아기 기후 소송단’이 헌법재판소 앞에 모여야 했다. 아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의 시행령은 위헌이기 때문이다.

6월13일 태아와 어린아이 62명으로 구성된 아기기후소송단이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서울 중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사진 출처 인터넷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53029.html)
6월13일 태아와 어린아이 62명으로 구성된 아기기후소송단이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서울 중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사진 출처 인터넷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53029.html)


마침 햇살이 뜨거운 일요일 오전, 헌법재판소 정문에 아기를 안고 모인 엄마와 아빠, 그리고 “화석연료 탐욕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던 60세 이상의 노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6세 아기와 참석한 산모는 “이 세상에 탄소 1그램도 배출하지 않은 아기의 내일을 위해 참여한다”라고 선언했고,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고통스럽게 살아갈 어린이들이 불쌍하다.” 지나치는 어른을 향해 아이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내일의 권리를 요구하며 “당장 탄소배출을 줄여 달라!” 호소했다. 그리고 ‘60+기후행동’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기들의 안전한 내일을 위해 “맑은 공기, 파란 하늘, 푸른 숲, 물고기 가득 뛰노는 강과 바다를 우리 아기들에게 물려달라!” 간절하게 요구했다.

인광석의 존재를 모르던 나우루 공화국이 불행한 나날을 보냈을 리 없다. 풍요로운 남태평양에서 안락한 삶을 지속했겠지만, 강렬한 쾌락을 안겨주자마자 사라진 인광석은 마약 같았다. 고장이 나면 수선하기 귀찮아 한 대 더 샀던 최고급 승용차들이 마당마다 폐차로 버려진 작은 섬이지만, 예전의 행복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까? 마음먹고 행동하기 따라 불가능하지 않지만, 현실은 장담하기 어렵게 만든다. 해수면이 올라가지 않나? 인광석과 다름없이 마구 퍼올리며 펑펑 소비하는 화석연료는 일부 지역을 돈방석에 올려놓았지만, 한계가 드러난다. 무한해 보이던 원유와 석탄뿐 아니라 시베리아의 메탄도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텐데, 기후위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미래세대는 어떤 파국과 만날까?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탄소중립을 2050년보다 10년 이상 빠르게 달성하라고 종용하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해 탄소 발생의 주요 책임 국가들의 실천 행동은 더디기만 하다. 화석연료 소비가 견인하는 경제성장이 조금만 처져도 대책을 서두르지만, 기후위기로 파국을 만날 게 점점 분명해지는 미래세대의 내일에 대해 지나치게 둔감하다. 남의 일 보듯 무심하지만, 위기는 가혹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만나는 “기후위기는 미래 세대가 나중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아이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라고 격정을 토한 젊은 아빠는 칭얼대는 세 아이를 대신해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2000년 미래 세대의 자산인 새만금 갯벌을 보전해 달라던 어린이의 환경 소송을 우리 법원이 기각했다. 시대착오적 판단이었다. ‘법인’이라 해서, 기업에 인격을 부여하는 세상이다. 생명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도 소송이 가능한 세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리의 ‘미래 세대’의 생존은 누가 지켜야 하나? 사람의 분별없는 개발로 터전을 잃는 동식물을 대리하는 소송을 받아들이는 현실은 우리 법원에 언제까지 예외이어야 할까? 걸음마를 배워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우리 아기의 작지만 애절한 목소리는 엄마와 아빠가 대신한다, 우리 법원은 마땅히 귀를 열어야 한다. 미래 세대의 가녀린 목소리를 경청해야 옳다. 

 

1988년 인하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환경 관련 강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이야기>(이상북스 2019) 외 다수의 저서를 발간했다. 

 

 

*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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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미경 편집장 

 

박병상 독자  Brilsymb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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