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안녕하신가

9월 13일(화) 오후

해장국을 좋아하지만, 한 그릇을 다 먹기엔 양이 많다. 그렇다고 둘이 가서 하나를 주문할 배짱은 없다. 괜히 속 보인다고 타박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꿩 먹고 알 먹기가 따로 없다. 포장을 하면 양이 훨씬 많다. 한 그릇 값이면 둘이 넉넉히 먹을 수 있어 더 좋다. 집에 와서 끓이니 한 냄비 가득하다. 아내는 선지보다 내장을 더 좋아한다. 선지를 많이 건져 먹었다. 생태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그러느라고 일부러 능곡까지 에둘러 돌아왔는데…. 내 딴에는 시장한 아내를 위해, 내장이 듬뿍 담긴 해장국 끓여 놓고 기다리던 참인데…….

“아니, 점심은 밖에서 드시고 오라고 했잖아?”

집에 오자마자 밥상을 물리려던 내게 아내가 한 말이다. 이러다 진짜 확진 판정이라도 받으면 영락없이 다락방으로 숨어야 할 판인지도 모른다. 입맛대로 할 수가 없어 말없이 입맛만 다시고 있는데, 불현듯 부아가 치민다. 결국 한 마디 되쏘고 들어왔다.

“먹기 싫음 냅둬. 내가 이따 먹을게!”

하릴없이 책상 앞에 앉아 씩씩거리는데,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오늘따라 해장국이 왜 이렇게 많아? 구미가 당기는데…. 당신도 좀 더 먹지?”
독백인지 방백인지 갖은 너스레를 떨면서 달게 먹긴 먹나 보다.

아내는 아마 동네 언니나, 무슨 회장님이랑 전화하고 있을 거다. 아니면, ‘◌◌’ 여사랑 원도 한도 없이 수다를 떨고 있겠지. 그러다가 생각난 듯이 불쑥불쑥 한 마디씩 내쏘는 모양이다. 오늘따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심통이 사납게 들린다. 유난히 땍땍거린다. 그악스럽기까지 하다.

“되도록 거실에는 나오지 말고.”
“문밖으로 나올 땐 마스크 잊지 마.”
“빨랫거리는 그냥 구석에 쌓아두면 돼.”
“자기 전에 이 닦고, 문 닫고, 이불 차지 말고.”
“그러기에 왜 그리 빨빨거리고 다녀!”
“오늘부터 선우도 원이도 접근 금지닷!”
“풀이 한 자는 올라왔을 텐데, 배추에 약 치고 추비 주고, 갓씨랑 파씨도 뿌려야 하는데 언제 할라구?”

불을 껐다. 반듯하게 천장을 보고 눈을 감는다. 순간, 비문증인가? 눈앞에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별똥별이 수없이 스러지고 되살아난다. 애써 다시 눈을 감는다. 금세 엎어졌다 모로 눕는다. 덮은 이불 두 발로 내지르다, 다시 끌어안고 이내 비비꼬듯 깔아뭉갠다. 답답하다. 벌떡 일어나 창문, 쪽문, 화장실까지 문이란 문은 몽땅 열어젖힌다. 후련한 게 아니라 오히려 어지럽다. 콧물이 도질까 봐 다시 문을 닫는다. 침대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 매만지며 노래를 청해 본다. 김민기를 듣다가 정태춘을 따라부른다. 잠든 우리 하니를 하늘로 떠나보내면서, 딸과 사위가 부르던 자장가! 메기의 추억을 예닐곱 번쯤 흥얼거린다. 오늘 밤, 꿈에서라도 우리 하니를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뭐해? 여태 안 자고!”

마스크를 쓴 아내가 문을 빠끔 열고 차반을 들이민다. 사과 몇 쪽과 술빵 두 조각, 그리고 생수 한 병이 보인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불다가 스스로 위리안치되고 말았지만, 좀 그렇다. 뭐라고 한소리 하려는데, 벌써 문이 닫힌다. 무슨 말을 해도 생긋거리는 아내다. 실없는 장난이나 투정에도 역정 한 번 내지 않는 아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아내다. 그 믿음 여전한데, 왠지 오늘은 딴사람 같다.

아내는 유튜브를 달고 산다. 그래서 심심할 틈이 없을 거다. 이 시간에도 트로트를 부르다가, 김장 채소 재배 강의를 듣다가, 옷이랑 그릇 광고를 엿보다가, 수국 삽목이랑 베고니아 잎꽂이를 검색하다가, 재미없다 싶으면 며느리랑 딸이 보내 준 동영상을 보면서, 한밤중에도 거리낌없이 박장대소를 할 거다.

“오쿠쿠, 우리 새끼, 선우야!”
“짝짜꿍 짝짜꿍, 우리 원이 짝짜꿍!”

 

손주들의 사랑법(2022.09.10. 이아름)
손주들의 사랑법(2022.09.10. 이아름)

 

베란다 불도 꺼지고 사방이 조용하다. 마스크를 단단히 여미고 거실로 나갔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숨소리만 색색거린다. 슬며시 이불을 덮어 주는데, 미간을 옴찔거린다. 예민하다. 차마 불을 끄지 못하고 아내방을 나섰다.

오만 가지 잔상만 어른거린다.
지난주부터 요 며칠 새 만난 이들을 떠올려 본다.
추석 연휴 때 다녀간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달리 떠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시간 강사로 3일간 출강했지만, 아이들한테 옮은 건 아니겠지. 천장에 생긴 곰팡이 때문에 실리콘 기사 한 분이 다녀갔는데 베란다와 창밖에서만 작업하다 갔으니 그분도 아닐 거야. 서류 사본 떼러 복음병원에 20여 분 머물다 온 것밖에 없다. 나다닐 때 자차로 다니고, 식당이건 찻집이건 극장이건 간 적이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는다.

지난 9일 저녁, 처남의 강력한 권유로 강화도 나들이를 다녀왔다. 강화읍에 있는 조양방직 카페다. 1933년, 민족자본으로 처음 설립한 방직공장이었는데 1958년에 문을 닫고 단무지 공장과 젓갈 공장을 거치며 폐허가 됐다. 2017년에 회색빛 시멘트 건물 외관을 그대로 살리고, 방직기계가 있던 기다란 작업대는 커피를 마시는 테이블로 개조한 곳이다(2019, 한국관광공사). 다목적 쉼터라고 할까. 워낙 너른 곳인데다가, 추석 전날이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어 손주랑 뛰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조양방직 카페에서(2022.09.09. 이아름)
조양방직 카페에서(2022.09.09. 이아름)

 

지난 12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오후에 행주나루터에서 김형인 회장(한국전통연보존협회)을 만났다. 때마침 관계자들 앞에서 100개가 넘는 가오리연을 세트로 엮은 줄연을 시연하고 계셨다.

태풍 뒤끝은 제법 더웠다. 정다겸 원장(대한민속문화원)이 따라 주는 찬물을 잇따라 들이켰다. 맞다! 내놓는 귤, 배, 복숭아도 냉큼 달게 먹었다. 방패연 날리는 방법을 익히느라고 여러 고수와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다. 연줄을 풀고 당기다가 때로는 얼레를 주고받으며 뛰기도 했다. 그렇다! 고작 1시간 남짓 머물렀지만, 거기서 사달이 난 게 틀림없구나. 대문짝만한 독수리연을 건네주며 손주 갖다주라고 깔깔 웃던 김형인 선생 얼굴이 와락 덮친다!

 

한국전통연보존협회 회원들이 고양평화공원에서 날리는 줄연(2022.09.12, 정다겸)
한국전통연보존협회 회원들이 고양평화공원에서 날리는 줄연(2022.09.12, 정다겸)

 

다시 끈지게 눈을 붙여 본다. 베개를 두세 개씩 포갰다가 다시 모두 밀쳐내고, 방석을 죽부인 삼아 다리 틈에 끼웠다가 내치고, 다소곳이 손 모아 배를 감쌌다가 메치고 엎어치고, 만세를 부르다가 팔짱을 지르고, 요가 원생이 되었다가 역도 수습생으로 둔갑하고…. 아, 얼마나 뒤척였을까. 모로 누워 무릎을 감싸 안고 굼벵이처럼 구부린 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켰다. 일없이 채널을 돌렸다. 0번부터 999번까지 참 많기도 하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대들고 죽이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다시 먹고 마시고…. 뭣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부질없이 그저 리모컨을 누를 뿐 굳이 무슨 의미를 두고 진득하게 보려는 건 아니니 당연하다.

오랜만에 친환경 다목적 세정제로 화장실을 청소해 볼까. 전립선 골다공증 심혈관에 좋다는 건강기능식품을 하나씩 먹어 본다. 아내를 위해 까짓것 고칼슘 고단백 눈 영양제까지 구매한다. 전기요를 깔았다가 향수도 뿌려 보고, 염색 하고 가발을 쓴 뒤에 기능성 수트를 입어 본다. 발바닥이 편하고 키도 커 보인다니 얼마나 좋은가. 멀티 슈즈를 쌍으로 구매하고, 아내를 위해 피부의 운명을 바꿔 준다는 화장품과 콜라겐 크림 팩도 샀다. 내친김에 지난 5월, 결혼기념일을 놓쳐버렸으니 몇 달 앞당겨 치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귀걸이 반지 팔찌 목걸이 등 쥬얼리 세트도 구매했다.

그렇다고 김건희 여사가 차고 다닌다는 발찌까지 사 줄 생각은 없다. 어차피 나와는 태생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깎아내릴 일은 아니다. 그냥저냥 살아가고 싶지만 어쩌랴? 그걸 보고 '김 여사의 소박한 패션' 운운하며 받아쓰고 뭇 백성 부추기는 쓰레기 기자나, 이를 본뜬 나머지 그게 순식간에 품절 상태라는데 괜히 짜증이 난다. 무당질 일삼는 같잖은 것들이나 하는 짓으로 보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무당벌레 무당개구리 무당거미 무당가뢰 무당게 무당선두리 무당파리 무당알노린재 모두 공통점은 ‘무당’이 형용하는 동물이다. 즉, 이 무당류의 벌레들은 태생부터 위장과 협박의 달인이다. 동족과 이민족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죽이는 일이 일상이요, 본업이다. 또 겉이 화려할수록 훨씬 더 강한 독기를 내뿜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보통 사람이 가까이할 무리는 절대 아니다.

그나저나 다리 밑으로 나동그라진 이불을 그러당겨 보지만, 잠들기는 글렀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딱하다. 요리조리 빈둥빈둥, 데굴데굴 뒹굴뒹굴 호들갑스레 오두방정을 다 떨었지만, 여전히 눈만 멀뚱멀뚱. 급기야 속옷만 입고 걸어 다니는 여자 모델을 훔쳐보다가 책장 유리 너머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들딸 사위 며느리 손주가 부끄러워 바로 텔레비전을 껐다. 야심한 밤에 그런저런 생쇼를 다하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진저리 나는 몽상의 끝은 어디일까? 오늘도 청승맞고 잔망스러운 밤이 이어지고 있다.

물소리에 눈을 떴다.
베란다 곳곳에 크고 작은 화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거실과 전실에 있는 것까지 보태면 600여 개쯤 된다. 아내의 반려 식물들이다. 우리집 베란다에는 쓰레기통이 2개 있다. 딸은 ‘쓰레기통에서도 향기가 나는 우리집’하며 잘 웃는다.

 

필자의 집 거실과 베란다 정경(2022.09.14. 김이숙)
필자의 집 거실과 베란다 정경(2022.09.14. 김이숙)

 

여전히 목이 칼칼하다. 이물질이 낀 듯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가래를 뱉었다. 염사는 없지만 약을 먹기 위해 선식을 찾았다.

아내는 아까부터 들락거린다. 아쿠아로빅을 하러 다니는 일행이 아파트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지만, 내심 내가 더 기다려진다. 아내는 나가려다 말고 다시 ‘아직?’을 연발하며 문 앞에서 서성인다. 이토록 애타게 무얼 기다려 본 적이 있었던가.

08시 18분, 드디어 문자(아래 우측)가 왔다. 일산서구보건소에서 ‘음성’을 통보한 것이다. 문자를 확인한 아내는 부리나케 신발을 끌면서 나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소리 하는데  속사포를 쏘는 줄 알았다. 

“찌개 끓여놨으니까 챙겨 드세요. 세탁기 다 돌면 건조기 넣어 주고, 오늘은 어디 나갈 생각 말아요. 이따 원이 보려면 거실 전실 청소 좀 하고…. 나, 가요.”

09시 02분에 문자가 다시 왔다. 역시 일산서구보건소에서 보냈다. 내용도 거의 똑같다. 아마 담당 부서가 다른지 발신 번호가 다르다. 뭐가 또 미심쩍었는지, 친절하게도 확인 문자를 보낸 것이다.

이에 견주어 지난 2월, 보건소에서 받은 확인서(아래 왼쪽)는 그 효력과 유효 기간, 그리고 주의점이 명시돼 있다. 문재인 정부를 정치방역으로 규정한 윤석열 정부에서는 단순 명료하게 ‘음성’임을 2차례 통보하고 있다. 달라진 게 뭘까? 이를 보고 예단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방역’과 ‘과학방역’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리송하다.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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