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실잠자리

아침, 저녁 가리지 않는다.
드난꾼, 만석꾼 할 것 없다.
강더위에 불가물이 잇따르니
저마다 비실비실 흐리멍덩하고
더수기, 어깻죽지 축축 처지고
천생만물(天生萬物)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바닥을 드러낸 내정 저수지(경남 산청, 2022-07-16, 박춘근 )
바닥을 드러낸 내정 저수지(경남 산청, 2022-07-16, 박춘근 )

 

어디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마땅한 쉼터 찾아 둘레둘레하더니
앞뒤 재지 않고 단박에 문산행 경의선에 몸을 실었것다.
 

그 와중에도
돈내, 똥내가 싫은 녀석은
풀내, 흙내 풍기는 깡시골을 찾았을 거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몸치레할 새도 없이
까실까실 메마른 풀빛 그대로
죽살이치고 문간방 귀퉁이에 앉아 할딱할딱

 

문산행 경의선 열차 노약자 석 광고판에 기대고 앉은 묵은실잠자리(2021-08-07, 박춘근)
문산행 경의선 열차 노약자 석 광고판에 기대고 앉은 묵은실잠자리(2021-08-07, 박춘근)

 

그러고 보니
교통약자석이라.
너나없이 닮은 데가 참 많다.
 

잔털 솜털
코털 머리털
살비듬 잔비늘
갖은 부푸러기 널춤을 추고
몇 년 묵은 때꼽재기 찐득거리는데,
 

애써 눈감고 코 막은 너나 나나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고 했거늘
말뚝이도 낯을 돌리고 말걸, 두 냥 반짜리 인생!
 

끄으윽 게트림 소리
에잇취 재채기 소리
쿨룩쿨룩 줄기침 소리
갸릉갸릉 가래 끓는 소리
드르렁 퓨우 코 고는 소리
예서제서 들려오는 소리, 소리, 소리.
그 소리 따라 마스크 뒤에서 너울대던
비말 죄다 흩뿌리니 일마다 하품에 딸꾹질이라,

 

아는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묵은 때, 보는 것만으로도
입내 땀내 암내 쉰내 누린내 고린내가 드러치고 만다는걸.
오그라지고 짜그라진 얼굴만으로도 역겨움을 유발하는
설움 많고 눈물 헤픈 생이여, 이승이여, 벙글지 못한 늙음이여!

 

광고판 틈새 덕지덕지 도사리고 있는 묵은 때꼽재기 
광고판 틈새 덕지덕지 도사리고 있는 묵은 때꼽재기 
잔털, 솜털, 코털, 머리털, 살비듬, 잔비늘 따위 갖은 부푸러기가 널춤을 추고 있다.
잔털, 솜털, 코털, 머리털, 살비듬, 잔비늘 따위 갖은 부푸러기가 널춤을 추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덜너덜 시트에
되는대로 들이밀고
몸뚱어리 팽개치니
콧병 든 병아리처럼
꼴에 꾸벅꾸벅 끄덕끄덕
세상에 속 편한 놈 따로 없구나.
 

그런 날 내리보며
코는 벌름벌름
눈은 끔벅끔벅
무슨 말을 할듯할듯
접힌 날개 옴짝달싹 않고
손발가락 부비적거리는 실잠자리 한 마리!
 

저래 봬도 나배기요
한해 묵은 녀석이라
집도 절도 없는 몸이
민낯 그대로 알몸까지 내놓고
무슨 꿍심 그리 많아 칼날북풍 내치고
삼동설한 한뎃잠을 다디달게 잤을까마는,
 

아서라, 이승 반 저승 반 하다가 동장군이 업어 갈라.
올 시한에는 잠자리 부접대듯 하지 말고,
허청에 내걸린 덕석이든 거적때기든
제발 진득하게 눌러앉아 눈 좀 붙이렴
.

 

아까부터 손바닥을 간질이던 녀석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격자무늬 날개 바르르 떨며 머리 위를 맴돌더니만,
순간 이동하듯 풍산역 단풍나무 너머로 휘리릭…….
아스라이 가무러지는 묵은실잠자리!
사람 사는 세상 두 번 다시 기웃거리지 마라.
두리번거리지 말고 어여 가라.
잘 가라.

 

여름이 끝날 무렵 물가 주변 풀밭이나 무덤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묵은실잠자리는 생김새도 수수해서 갈색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약한 모습과 달리 추위에 견디는 내성이 강해 영하의 겨울 날씨와 눈보라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영어 이름도 시베리아 겨울 실잠자리이다. 대체로 무기력한 상태지만 끈질기게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따뜻한 봄이 오면 활기를 되찾아 먹이 활동과 번식 활동을 시작한다. (출처 : 글/사진 김태우·국립생물자원관 동물자원과 환경연구사)
여름이 끝날 무렵 물가 주변 풀밭이나 무덤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묵은실잠자리는 생김새도 수수해서 갈색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약한 모습과 달리 추위에 견디는 내성이 강해 영하의 겨울 날씨와 눈보라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영어 이름도 시베리아 겨울 실잠자리이다. 대체로 무기력한 상태지만 끈질기게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따뜻한 봄이 오면 활기를 되찾아 먹이 활동과 번식 활동을 시작한다. (출처 : 글/사진 김태우·국립생물자원관 동물자원과 환경연구사)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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