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과 병마용 - 진(秦)과 실크로드의 여명

▲ 2015년 8월 1일(토)부터 9일(일)까지 한겨레 주주.독자들과 함께 실크로드 핵심구간인 하서주랑 가욕관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서안은 일곱 번째, 하서주랑은 세 번째지만 이번 여행은 좀 특별했다. 중국이 21세기의 실크로드 구상을 내놓고 이 지역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뒤로는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9월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학 강연에서 30억 명을 포괄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그 다음 달에는 인도네시아 국회 연설에서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공동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한자로 경제벨트는 ‘经济带(경제대)’라 하고 실크로드는 ‘絲綢之路(사주지로)’라 한다. 각각의 끝 글자인 ‘대’와 ‘로’가 묶여 ‘일대일로(一带一路, One Belt One Road)’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광활한 사막에 대한 동경과 오아시스 도시들, 대상(隊商)과 낙타 행렬에 대한 상상 속에 황량한 유적의 잔해들을 훑어가는 것이 실크로드 여행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같은 곳을 가도 거기서 실크로드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함께 했다.

 

우리 일행은 서른 명의 비교적 대규모 여행단이었다. 인솔자인 여행사 이 사장, 해설자인 나, 그리고 스물여덟 분의 호기심에 가득한 여행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많은 인원이 출발하다 보니 비행기 이륙보다 두 시간 반이나 빠른 일곱 시에 인천공항에 모였다.

 

여행 짐 싸는 것부터 공항 가는 길, 공항의 분위기 등 여행의 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이 좋지만, 이처럼 새벽같이 움직이는 것은 정말 싫다. 일정을 다소 손해 보더라도 느긋하게 일어나 오후 비행기를 타고 움직이길 원한다. 그러나 가급적 많은 손님을 실어야 하는 항공사의 비행기 배정은 늘 이런 나의 희망을 꺾어 놓곤 한다. 더구나 우루무치에서 돌아올 비행기는 한밤중에 떠나 새벽에 인천에 우리를 내려놓을 예정이다. 동행자분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막상 공항에 나가 보니 두 시간 반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메르스 사태로 꽁꽁 얼어 있던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른 아침의 공항은 시장 통처럼 왁자지껄했다. 이 사장이 고객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개인 비자로 가는 손님들은 개인적으로, 단체 비자로 가는 다수 손님들은 단체로 창구 수속을 하는 데 한 시간 반 이상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출국장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탑승 시간에 맞추기도 빠듯할 지경이었다.

 

내 권유로 뒤늦게 여행에 참여하게 된 그레이트북스 김경택 사장은 중국 복수비자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착오로 단체 비자가 신청된 상태였다. 그런데 별도 안내를 받지 못해 개인 수속을 해야 할지 단체 수속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창구 수속이 늦어졌다. 환전을 하고 창구 쪽으로 돌아와 보니 그제야 개인 수속을 기다리는 긴 줄 한가운데 서서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구로 가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새치기’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고, 창구에서는 다른 손님들의 양해를 구하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서두른 끝에 탑승장으로 들어간 것은 탑승 예정 시간이 10분여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제 1 일 서안 - 실크로드의 출발점

▲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서안

나는 서안이 좋다. 주(周)의 호경이 서안 근교에 있었고 춘추 전국의 분열을 극복한 진(秦)이 서안 옆 함양에 도읍했다. 중국의 고대와 중세를 대표하는 한(漢), 당(唐)이 모두 서안에 장안성을 짓고 천하를 다스렸다. 송(宋)이 개봉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서안은 변함없는 중국의 중심지였다. 서양과 비교하자면 마치 고전 고대 문명의 중심이던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중세 유럽을 이끈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 한 도시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서안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서안은 황하의 지류인 위하(渭河)를 따라 펼쳐진 위하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위하평원은 북산과 진령(秦岭) 사이에 형성된 드넓은 분지. 동쪽에는 함곡관, 서쪽에는 대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관문 사이에 있어 ‘관중(關中)’으로도 불린다. 『초한지』, 『삼국지』 등에 수도 없이 나오는 관중, 중국 역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의 기점으로 서안을 찾을 때는 아쉬움을 각오해야 한다. 수많은 유적 중에 몇 군데만 스치듯 살펴보고 부랴부랴 다음 목적지로 떠나게 되면, 마치 볼일 보고 뒤처리를 하지 않은 듯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한국인은 서안이 실크로드의 기점이라는 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2014년에는 경주를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서안에서 그런 주장을 홍보하다가 중국인의 눈총을 받은 적이 있다. ‘천하의 중심’을 자부하는 중국인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한국인을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지혜롭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인천에서 서안까지는 비행기로 3시간 15분 걸린다. 2015년 8월 1일 아침 9시 15분 이륙한 비행기는 11시 30분(한국 시간 12시 30분) 조금 넘어 서안함양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북경, 상해에 비하면 제법 거리가 있는 셈이다. 위도상으로 서안은 한반도의 남쪽인 부산과 거의 같다. 그런데도 중국에서는 서북 지역의 중심 도시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새삼 중국의 넓이를 실감하게 된다.

 

서안공항 도착. 왠지 낯설다. 여섯 번이나 찾았던 공항이지만 마치 처음 온 곳처럼 달라져 있었다. 공항 건물은 새로 지은 듯 깨끗하고 넓었으며 바닥은 유리를 깐 듯 반짝거렸다. 희미한 실크로드의 자취를 붙잡고 사는 낡은 고도에서 ‘일대일로’의 관문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다른 지역은 방문할 때마다 휘황한 도시화의 질주를 보여주더라도 서안만은 영원히 그대로일 줄 알았다. 이제 더 이상은 아닐 듯하다.

 

1. 진시황릉과 병마용 - 진(秦)과 실크로드의 여명

  

공항 부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바로 실크로드의 개척을 진두지휘한 한 무제의 무덤, 무릉으로 향했다. 그것은 실크로드 답사라는 여행의 성격에 맞춘 것이기도 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을 먼저 간다는 실용적 목적에 맞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순서를 바꿔 다음날 찾은 진시황릉부터 시작한다.공간 이동이 과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기억할 때는 가급적 역사의 순서에 따르는 것이 뇌에 혼란을 덜 주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천하를 지배하려 한 사나이

중국은 재미있는 나라다. 40여 개국이 있는 유럽보다 두 배나 큰 땅덩어리가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 있다. 서안이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을 합쳐 놓은 것과 같은 도시라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역사와 전통을 갖게 된 것도 무척 오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은 사상, 문화 등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후의 역사 과정은 판이하다.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이가 바로 진시황이다. 

▲ 서안 임동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역대 중국 황제의 무덤 가운데 공사 기간, 참여 인원, 규모에서 최대를 자랑한다. 기원전246년에 공사를 시작해 진시황이 죽고 난 기원전 208년까지 능역(陵域) 공사를 계속했다. 승상 이사가 설계한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무려 72만 명이 동원되었는데, 이 수치는 이집트 쿠푸 피라미드에 동원된 인력의 8배라고 한다.

  

무덤 자체만 현재 높이 51미터, 둘레 1700여 미터에 이르고 병마용갱 등 배장갱과 배장묘의 수는 확인된 것만 400기가 넘는다. 『사기』에 따르면 무덤 안에는 각종 궁전을 짓고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무덤 주변의 지질 조사에서 수은이 대거 검출된 것으로 어느 정도 입증되었다. 『사기』는 또한 도굴을 막기 위해 자동 격발되는 쇠뇌도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진시황이 자기 한 몸 묻는 데 이처럼 수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땅덩어리를 하나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은 분열과 재통일을 반복했지만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을 때에도 ‘천하’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이 그리스 이후 로마에 의해 일부 통일되었다가 다시 춘추전국시대 같은 분열을 맞아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중국의 사례는 기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시황은 흔히 폭군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상당 부분 한 왕조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통일했을 뿐 아니라 도로를 정비하고 도량형, 화폐, 문자를 통일해 경제 사회 문화 방면의 통일도 이루었다. 진시황이 없었으면 오늘의 중국도 없었다. 게다가 진시황은 철저한 법치를 시행해 신분과 남녀에 따른 차별을 없앴다. 형률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적용되어 진의 백성은 황제와 법 앞에 평등했다.

 

진시황이 죽은 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왕족의 후예이면서도 특권을 박탈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이 유교를 국시로 삼은 것은 유교가 그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유교는 엄격한 법치보다는 덕치라는 명분 아래 신분에 따른 차별을 공식화하고, 밖으로는 이를 중국인과 다른 민족의 차별로 확장시켰다. 이것은 천하 공법을 추구한 진시황의 노선으로부터 명백히 이탈한 것이었다. 2000년 넘게 폭군의 낙인이 찍혀 있던 진시황을 복권시킨 이가 유교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든 마오쩌둥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진시황릉에 오르지 못했다. 진시황릉 능역의 일부인 병마용갱을 관람한 것은 둘째 날 11시경이었다. 그 무렵 한국도 온 나라가 불가마 같은 폭염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서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달아오른 더위 속에 병마용갱을 돌아본 우리는 정작 그 병마용의 주인이 묻혀 있는 진시황릉 등정은 포기했다. 그날 저녁 서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라 시간을 아껴야 하는데, 뙤약볕 아래 50미터 고지를 오르내리는 게 다소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가 공개되지도 않은 무덤을 굳이 오르지 않더라도 병마용갱을 돌아보기만 한다면 진시황 시대의 면모를 짐작하는 데 모자람은 없을 것이다.

 

병마용갱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 서안 임동 병마용갱

 

진시황릉 병마용갱은 1974년 3월 29일 진시황릉 동쪽 1.5킬로미터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을 방문한 자크 시락 프랑스 대통령의 말처럼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손색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장충체육관의 대지 면적과 맞먹는 넓이의 1호갱에는 6000개 이상의 실물 크기 병마용이 도열해 처음 본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마용갱 안에는 이 유적을 발견했다는 노인이 앉아서 자신이 서명한 도록을 150~200위안(3~4만원)이라는 작지 않은 금액에 판매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노인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서명은 보통 ‘진시황 병마용갱 발견자 양 선생(秦俑发现人 老楊)’이라고 되어 있는데 글씨가 한결같지 않다. 양시화(楊世华), 양지더(楊继德), 양신만(楊新滿), 양시안(楊西安) 등 서로 다른 양 선생들이 곳곳에서 서명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양지파(楊志發)라는 분은 아예 가까운 자기 집에서 서명을 해 주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하에 묻혀 있던 도용은 부근 서양촌(西楊村)의 농민들이 땅을 파다가 발견했고, 곧 인근 임동구박물관장 자오캉민(趙康民)을 중심으로 꾸려진 발굴단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서양촌은 양씨 동족촌이라 병마용갱을 발견하고 파내는 데 참여한 농민들은 모두 양씨였다. 이 가운데 양지파와 양신만은 임동구박물관이 발견인의 명예를 수여한 ‘영예증’이라는 것도 갖고 있다. 양지파가 전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함께 찍은 사진이 박물관 내에 걸려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양지파는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이 최초 발견자인데 다른 세 명은 이미 죽었다고 하고, 양신만은 양지파와 자신을 포함한 일곱 명이 발견자라고 한다. 또 병마용갱 고고팀장이던 류잔청(劉佔成)은 유적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세상에 드러낸 이는 고고학 발굴단을 이끈 자오캉민이라면서, 농민들은 ‘발견자’가 아니라 ‘증인’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한다. 또 서안과 임동의 관계 기관에서는 한 번도 병마용갱의‘발견자’를 공인한 적이 없다고 한다.

 

서양촌 농민들은 혈연으로 뭉쳐 상부상조하는 사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양씨들끼리 발견자가 네 명이니 일곱 명이니 하고 논란을 빚는 모습을 보면 병마용의 재림이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설령 그들이 어느 정도의 부를 얻는다고 해도 말이다. 혹시 알까? 그들의 조상 가운데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짓는 데 동원되었다가 속절없이 희생된 사람이 있을지 말이다.

 

병마용갱을 둘러싼 논란은 그밖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유명한 것은 과연 항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시황릉을 파헤치고 병마용갱에 불을 질렀느냐 하는 논란이다. 1호갱에 대한 3차 발굴 때 불에 탄 도용이 발견되고 병사 도용이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실제 무기들이 칼집 따위만 남긴 채 사라진 것이 확인되면서 논란은 불을 뿜었다. 

 

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사기』와 『한서』에는 항우가 진나라 궁전에 불을 질러 불길이 석 달이나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우가 병마용갱에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 갔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류잔청은 이에 대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대군이 난입했다고 보기에는 병마용갱의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고 도용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는 것이다. 불에 탄 흔적들은 방화라기보다는 자연 발화로 보는 것이 낫다고도 했다. 또한 방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진나라 궁전은 항우가 불을 지른 것으로 전해진 아방궁 터가 아니라 함양궁 터라는 것이다. 따라서 항우의 아방궁 방화설은 승자였던 유방이 정적이던 항우를 깎아내리려 만든 말이라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후대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에게 논란거리와 연구거리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도 진시황은 중국인의 ‘고마운’ 선조임에 틀림없다.

 

2015년 들어 중국 문화 당국은 빛이 바랜 1, 3호갱의 병마용과 달리 본래의 채색을 간직한 도용이 발견된 2호갱을 대상으로 2차 발굴에 들어갔다. 말과 함께 늘어선 단순한 모습의 1호갱 도용과 달리 2호갱에서 발굴된 도용들은 활을 쏘거나 칼을 차고 지휘를 하는 등 실제 전투에 임한 군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2호갱의 발굴이 끝나면 병마용갱은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전 세계의 관광객에게 선사할 것이 틀림없다. 병마용갱의 새로운 모습을 보러 1년에 한 번씩 서안을 찾는 유럽인이 적지 않다고 하니 진시황은 자신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예기치 않은 ‘영생’의 원천을 안겨준 셈이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이동구 에디터 

한겨레테마여행  themetou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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