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茂陵) - 한(漢)과 실크로드

 2. 무릉(茂陵) - 한(漢)과 실크로드

 

▲ 함양 무릉에서. 무릉은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고조선을 정복한 한 무제의 무덤이다
 

우리는 진시황릉 방문에 앞서 전날 서안 서쪽 함양 흥평에 있는 한 무제의 무덤을 찾았다. 한의 시조인 유방의 장릉(长陵), 서안 일대 황제릉 중 유일하게 내부가 개방된 경제의 양릉(阳陵)을 제치고 무릉을 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무제가 실크로드를 개척한 황제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실크로드 개척사는 ‘중화(中華)’라는 독특한 세계관이 자리 잡아 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중국만이 문명이고 그 바깥은 이적(夷狄)이라는 중화주의는 황제와 제후로 이루어진 내부의 불평등 관계를 외부 세계로 확장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이라는 광활한 ‘천하’를 통합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더 넓은 세계와 소통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 사상이다. 자존심 있는 민족 치고 누가 중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관계를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실크로드를 둘러싼 중국인과 이민족의 각축전은 그러한 중화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과정이었다.

 

장건 이야기

 

무릉은 높이 46.5미터, 둘레 1킬로미터로 진시황릉보다 약간 작다. 무릉의 능역에는 위청(衛青), 곽거병(霍去病) 등 무제의 실크로드 개척에 앞장선 무장들의 무덤이 배장되어 있다. 진시황이 흉노를 견제하는 데 그친 반면 무제가 흉노와 전면전을 불사하면서 실크로드 개척에 나선 내력은 이러하다.

 

중원을 통일한 진이 흉노와 부딪히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은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를 치게 했다. 몽염은 흉노로부터 오르도스를 빼앗아 그들을 고비사막 너머 북쪽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진시황의 명에 따라 전국 시대 연과 조의 성곽들을 잇고 이를 서쪽으로 확장하는 만리장성 축조에 나섰다. 요동과 감숙성을 단속(斷續)적으로 잇는 당시의 만리장성은 달에서도 보인다는 지금의 만리장성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흉노와 중국의 국경선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진시황이 죽고 중국이 다시 혼란에 빠지자 흉노는 오르도스를 탈환하고 지금의 감숙성 일대까지 치고 들어와 중원을 압박했다. 흉노의 지배자를 ‘선우(單于)’라고 하는데 이는 문자가 없던 흉노의 말을 중국인이 듣고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문자도 없는 유목민이 대제국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신기하고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노상’이라는 이름의 선우는 기원전 162년 무렵 당시 감숙성 일대에 살고 있던 이란계 종족 대월지(大月氏)를 공격했다. 대월지를 깨뜨리면서 그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흉노의 공세는 잔인했다. 대월지는 감숙성을 떠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일대에 있던 소그디아나까지 옮겨가야 했다.

 

한은 이러한 흉노의 위협 앞에서 초기에는 수세에 몰렸다. 한 고조 유방은 몸소 원정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거꾸로 7일간이나 포위당하는 ‘평성의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한은 흉노에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의무적으로 흉노에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내하고서야 겨우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무제가 제위에 오른 것은 이 같은 굴욕 속의 평화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그는 흉노의 위협을 감내하는 대신 반격을 모색했다. 이때 등장하는 실크로드의 영웅이 장건(張騫)이다. 무제는 흉노에게 한을 품고 있을 게 분명한 대월지에 장건을 파견해 흉노를 협공하는 동맹을 맺고자 했다.

 

장건은 감숙성과 청해성 사이에 난 길인 하서주랑을 따라 길을 나섰다. ‘하서주랑’은 황하 서쪽의 복도라는 뜻인데, 말이 좋아 복도지 사실은 폭이 5~10킬로미터에 이르고 길이는 900킬로미터나 된다. 그런데 당시 하서주랑은 흉노의 세력권이었다. 장건은 얼마 가지 못해 흉노에게 잡혀 노구수(지금의 내몽고자치구 후허하오터 부근)로 압송되었다. 장건은 자신이 대월지로 가는 한의 사신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흉노는 자신들이 한의 강역을 통과해 남쪽의 월국에 사신을 보내려 하면 한이 이를 허용하겠느냐며 장건을 억류했다. 노상 선우의 아들인 군신 선우는 장건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회유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10년이 흘러 흉노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장건은 흉노 진영을 탈출했다. 그는 투루판, 쿠차, 카슈가르 등 타림 분지 북쪽의 서역북도를 지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대완(大宛, 페르가나)에 이르렀다.그곳에서 장건은 땀을 피처럼 흘리는 명마 한혈마(汗血馬)를 목격했다. 훗날 이를 무제에게 보고하자 무제는 그 말을 얻기 위해 대완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대완 왕은 특사의 오만한 태도를 문제 삼아 그를 죽이고 한혈마의 대가로 가져 간 온갖 보물마저 차지해 버렸다. 그러자 무제는 기원전 104년 이사장군 이광리를 보내 대완을 정벌하고 기어코 한혈마를 손에 넣었다.

 

이처럼 대완과 한은 악연으로 끝난 사이지만, 장건이 대완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동쪽의 풍요한 나라 한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있던 대완 왕은 장건을 대월지까지 안내하는 사신을 붙여 주었다. 그의 안내를 받은 장건은 강거(康居, 지금의 타지키스탄)를 거쳐 마침내 대월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월지는 이미 비옥한 지역에서 잘 살고 있었으므로 멀리 떨어진 흉노를 치기 위해 한과 동맹할 의사가 없었다. 장건은 1년 여 동안 대월지에 머무르며 여군주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는 동안 안식(安式, 이란), 조지(趙地, 시리아), 신독(新獨, 인도) 등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 장건은 대하(大夏, 박트리아)의 시장에서 중국 비단이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막으로 뒤덮인 길을 통해서도 교역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명명한 ‘자이덴슈트라젠(Seidenstrassen)’의 영역(英譯)이다. 이 길을 따라 거래된 대표적인 상품이 중국의 비단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단길은 중국의 왕조가 인식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트리아 시장의 비단은 장건이 서역 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대월지의 여군주는 끝내 장건의 요청을 거부했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장건은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처지로 귀국길에 올랐다. 서역남도를 거쳐 귀국하던 장건은 흉노와 협력하던 강족에게 붙잡혀 디시 한 번 억류당했다. 1년 여 만에 탈출한 장건이 장안에 돌아간 것은 기원전 126년. 함께 떠났던 100명의 수행원 가운데 남은 사람은 겨우 두 명이었다. 하지만 장건이 보고한 서역의 지리, 민족, 산물 등은 무제에게 더 없이 긴요한 정보였다.

 

무제는 이미 기병을 양성하고 군비(軍費)를 비축해 장건이 돌아오기 전부터 대장군 위청을 앞세워 흉노에 대반격을 펼치고 있었다. 기원전 123년 위청의 원정에는 장건을 참여시켜 그의 풍부한 정보와 경험을 활용했다. 이 원정에서 장건은 보란 듯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박망후(博望侯)라는 높은 작위를 얻었다. 서안 남쪽 박망진(博望镇)에 있는 장건의 묘역은 당당히 2014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실크로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꼽혔다.

 

곽거병 이야기

 

▲ 무릉 곽거병 묘

 

흉노와 한의 전쟁에서 위청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霍去病)이었다. 위청은 무제의 황후가 된 위자부의 동생이고, 곽거병은 위자부의 언니가 낳은 자식이었다. 그러니까 무제에게 위청은 처남이고 곽거병은 처조카가 되는 셈이다. 처음에는 외숙부인 위청을 따라 전쟁에 나가던 곽거병은 곧 어린 나이에 외숙부를 능가하는 제일의 장수가 되었다. 흉노를 고비 사막의 북쪽으로 몰아내고 하서주랑을 한의 영역을 만든 데는 위청 못지않게 곽거병의 공이 컸다.

 

기원전 121년 스무 살의 곽거병은 표기장군으로 임명되어 위청과 함께 흉노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 기련산과 언지산을 빼앗았다. 하서주랑이 한나라에 들어온 것이 이때이다. 지금의 무위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 진영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혼야왕(浑邪王)이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왕족들과 함께 한에 투항했다. 당시 열네 살이던 휴도왕의 태자는 그때 한군에 잡혀 가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그가 훗날 무제로부터 김(金)씨 성을 하사받고 충신이 되는 김일제(金日磾)였다.

 

 곽거병의 무용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원전 119년 그는 타고난 용맹과 지략을 발휘해 기병을 이끌고 고비 사막을 넘어 막북까지 흉노를 밀어붙였다. 곽거병이 즐겨 사용한 전략은 적진 깊숙이 빠르게 진격해 적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것으로, 말 타기에 능한 흉노도 속절없이 당하곤 했다. 그해 곽거병은 지금의 울란바토르 부근까지 진격해 흉노를 섬멸하고 켄티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한이 흉노에 대해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기원전 106년 무제는 하서주랑의 무위,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에 하서사군을 설치했다. 이는 마치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정벌하고 그곳에 사군을 설치한 것과 같다.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한 것은 고조선이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과 한의 교역을 가로막고 흉노와 제휴해 한을 위협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 처지에서는 흉노를 격멸하는 곽거병의 무용담이 마냥 달가울 수만은 없는 셈이다.

 

평소 곽거병을 아끼던 무제는 그가 병을 얻어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비통해 했다. ‘병을 없앤다’는 뜻의 거병(去病)이라는 이름도 무제가 하사한 것이다. 무제는 변경 5부에서 철갑병들을 동원해 장안부터 곽거병의 무덤에 이르는 길에 도열시켰다. 젊은 장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무제는 또 곽거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정복한 기련산 모양으로 무덤을 만들고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무릉 동북쪽에 마련된 곽거병묘(높이 18.4미터)는 위청묘(높이 24.7미터)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무릉 급의 대접을 받고 있다. 묘 앞에 각종 석조물이 조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능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무릉박물관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묘 앞 석조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흉노를 짓밟고 있는 말의 모습(馬踏凶奴)을 묘사한 1.68미터 높이 석상이다. 곽거병이 타던 천리마가 흉노족을 짓밟고 있는 형상이다. 이 석상에는 ‘국보(國寶)’라는 타이틀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그것이 중국인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이곳을 찾는 외국인 가운데는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특히 흉노를 선조로 여기는 터키 사람들은 불편함을 넘어 화를 낼 지도 모른다. 예전에 흉노에 맞서 싸우는 중국인 여전사를 주인공으로 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이 세계적으로 흥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터키에서는 이 영화가 흉노를 너무 야만스럽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자국 내 상영을 불허했다. 최근 터키에서 일고 있는 반중 감정은 이처럼 역사적 뿌리가 꽤나 깊은 편이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

 

 무릉의 배장묘 가운데 최근 주인이 확인된 것은 앞서 말한 흉노 태자 출신 김일제의 묘(높이 11.9미터)이다. 그런데 이 무덤은 무릉에서도 유독 한국인의 관심을 끈다. 2009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의 비문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선조로 추측될 수 있는 문구가 있기 때문이다. 김일제는 무제로부터 투후(秺候, 투는 지금의 산동성 성무현 지역)로 책봉되었는데, 바로 그 작위가 문무왕릉비문에 등장한다. ‘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니’라는 문장 뒤에 닳아 없어진 몇 글자를 이어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星漢王)’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두고 해석이 분분한데, 일각에서는 투후 김일제가 곧 성한왕의 7대조이고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 추론하고 있다.

 

반론도 있다. 우선 비문에서 ‘秺(투)’라는 글자는 확인하기 어렵다. 설령 투후 김일제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투후가 신라 왕실의 조상이어서가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중국 고사에 비유한 것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논란에는 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도 거론된다. 신라 말기인 864년 5월 29일 32세로 사망한 김씨 부인은 당으로 이주한 신라인 김충의(金忠義)의 손녀라고 한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씨 부인의 가문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에서 시작해 투후 김일제로 이어졌다. 전한이 망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김일제의 후손들은 요동에 숨어 살다가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문의 요지이다.

 

투후의 후손은 전한을 멸하고 신(新)을 건국한 왕망과 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이 멸망하고 후한이 들어서자 보복을 피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일부가 신라 왕실인 경주 김씨의 조상이 되고 일부는 가야 왕실인 김해 김씨의 조상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흥미로운 추론은 중국에도 알려져 한국 김씨와 중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김일제 후손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감식을 해 보자는 제안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맞을 확률이 가장 높다는 김씨. 그 대성(大姓)의 뿌리에 대한 천착은 무릉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을 급격히 높였다. 곽거병묘 앞에서 말에 짓밟히고 있는 흉노족이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 아니냐고 다소 과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일제묘는 서안을 찾는 한국인이 찾고 싶어 하는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 더 신경 쓰이는 것일까? 우리가 무릉을 찾았을 때 김일제묘는 차단막을 두르고 보수 중이었다.

 

그나저나 무제가 시작한 한의 실크로드 개척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곽거병이 하서주랑에서 흉노를 몰아낸 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기원전 68년 장군 정길(鄭吉)은 지금의 투루판에 있던 차사국(車師國)을 정복하고 9년 후 흉노의 일축왕을 정벌해 타림 분지 주변의 ‘서역 36국’을 속국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서역 통치의 중심은 룬타이의 오루성(烏壘城)에 설치한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였다.

 

후한 시기에는 서쪽으로 더 뻗어나갔다. 서기 91년 반초(班超)는 서역도호부를 타림 분지 북쪽에 있는 쿠차로 옮기고, 97년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스피 해와 바그다드 인근까지 기지를 확장했다. 반초는 흉노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범을 잡으려면 범굴에 들어가야 한다(不入虎穴,焉得虎子).”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해 반초는 부하 감영(甘英)을 서쪽으로 보내 대진(大秦, 로마)과 직접 접촉을 꾀했으나, 감영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페르시아 만에서 되돌아오는 바람에 두 대국의 만남은 불발되었다. 중국과 로마의 직접 교섭은 166년 로마 황제 안돈(安敦,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 바닷길로 후한에 사신을 파견했을 때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반초가 낙양으로 돌아와 사망한(100년) 뒤 서역도호부는 흉노와의 패권 다툼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107년 흉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한은 서역도호부를 잃고 실크로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최후의 승자는 흉노였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이동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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