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매화도병풍의 연원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매화도는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19세기는 여항문인화가(閭巷文人畵家)가 창작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남종화풍을 토대로 한 문인화와는 전혀 다른 심미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조형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여항문인화가는 역관(譯官), 의원(醫員) 등의 기술직 중인과 중서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양반계층 문인 중 그림 창작 활동을 했던 이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사대부 문화의 하나였던 회화의 창작뿐만 아니라 감상 및 향유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새로운 문화계층이었다.

이러한 여항문인들의 회화활동은 19세기 화단의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였고 20세기 초 전통회화의 전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항문인화가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람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으로 그는 1847년에 유최진(柳最鎭, 1791-1859), 전기(田琦, 1825-1854), 이기복(李基福, 1791-?), 유숙(劉淑, 1827-1873) 등과 '벽오사'(碧梧社)라는 시사모임을 결성하였다.

그는 이 모임을 통해 당대 여항문인화가들과 교류하였으며, 여항화가들의 좌장으로서 당시 문예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추사 김정희에게 화평을 받기도 하였다.

조희룡을 비롯한 당시 여항문인화가들은 군자를 상징하는 매화라는 소재에 심취하였고, 그들의 정체성을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로 시각화하며 새로운 조형언어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진 대화면의 병풍 위에 좌우로 뻗어나간 매화나무를 그린 전수식(全樹式) 매화도인데, 이러한 새로운 표현형식으로 그들만의 정체성을 들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조희룡의 '전수식' 표현형식은 청대 나빙(羅聘, 1733-1799) 등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해 이를 그 뒤 장승업(張承業, 1843-1897), 허련(許鍊, 1808-1893), 양기훈(楊基薰, 1843-1911),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전수식 매화도는 연폭 병풍을 활용한 큰 화면에 매화나무의 위아래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중앙 부분만을 그려 압도감을 주었다.

이러한 대담하고 시원한 그림의 구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대형 전수식 자수매화도병풍으로 전이 되었다.

특히, 양기훈과 김규진은 자수매화도병풍 제작에 참여하여 초본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평양화단 출신 화가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서화의 유통과 판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양기훈이 그린 <백매도6폭병풍>(白梅圖六屛風)에 그의 제자였던 김규진이 쓴 제발문(題跋文)이 보이는데, 이로써 한 작품에서 그림과 글씨로 두 평양화단 출신 화가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연폭 병풍의 큰 화면에 매화나무가 관통하는 구도를 취하였으며 눈꽃처럼 핀 백매가 장식적이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더한다.

실제로 양기훈과 김규진은 1906년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매화자수도병풍 중 초본을 그린 화가의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는 양기훈과 김규진의 작품이 유일하다. 아마도 당시 양기훈과 김규진은 평양과 서울을 왕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에서 직접 이들에게 '안주수'(安州繡)로 제작된 자수매화도병풍을 주문하여 헌상 받았을 것이다.

오늘 여기 전시된 <자수매화도10폭병풍>은 바로 양기훈의 이러한 전수식 매화도를 초본으로 하여 작품화한 '안주수'(安州繡)의 하나다.(4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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