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피어난 매화, 자수매화도병풍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

'안주수'는 평안도 안주 지역에서 제작되었던 자수로서 남성 자수 장인이 주로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보통의 자수와는 달리 최대 16겹으로 꼬아 만든 굵은 색실을 사용하였고 병풍과 같이 큰 규모의 형식이 선호되었다.

여기 전시되고 있는 아모레퍼시픽 소장 <자수매화도10폭병풍>에는 파노라마식으로 구성된 화면에 한 그루의 늙은 매화나무가 배치해 있다. 4폭 하단부에서부터 굵은 매화나무 등걸이 시작되어 왼쪽으로 뻗어나가면서 화면을 가득 채우고 다시 두세 개의 가지로 갈라져 나갔다. 가지 끝에는 봄맞이를 준비하며 피어난 크고 작은 홍매와 백매가 수놓아져 있다. 실의 색을 은은하면서도 세련되게 배합하였으며, 매화나무의 상단과 하단부를 잘라 내고 나무의 중심을 강조하여 현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또한, 줄기의 옹이 부분을 회색, 자주색으로 표현하고 고목 위에 핀 이끼를 연녹색 태점(苔點)으로 나타냈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매화는 진분홍을 띠는데, 외곽으로 갈수록 연분홍, 백색에 이르기까지 그라데이션으로 색의 변화가 표현되었으며 실의 채도를 달리하여 원근감이 느껴지게 했다.

10폭 하단에는 발제시(跋題詩)와 함께 이병풍의 밑그림을 그린 양기훈의 낙관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다.

한데, 그 시를 읽으려하니 눈이 어두운 데다 글씨체가 반초서(半草書)라 판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폰에 담아가지고 와서 며칠 동안 이리 생각 저리 생각 끝에 겨우 읽어냈다.

일반적으로 옛 그림들을 보면 그림 오른쪽 상단에 '화제'(畵題)가 있고, 왼쪽 하단부에 발제(跋題)와 낙관이 있는데, 대부분 이 글은 중국 유명한 문인들의 시나 글에서 빌려왔다.

여기 이 발제문도 마찬가지로 당나라 때 문인 정곡(鄭谷, 생몰 미상)의 시, <매화>(梅) 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럼, 이 시를 감상해 보자!

꽃잎들 말을 뒤따라 초교를 지나다

江國正寒春信穩
嶺頭枝上雪飄飄
何言落處堪惆悵
直是開時也寂寥
素艶照尊桃莫比
孤香粘袖李須饒
離人南去腸應斷
片片隨鞭過楚橋
浿江 楊基薰 (정곡의 매화시 전문)

찬겨울 강남 봄소식 잔잔한 때(江國正寒春信穩),
고갯마루 가지에는 눈발이 휘날리네(嶺頭枝上雪飄飄).
떨어질 때의 서글픔 말할 게 있으랴(何言落處堪惆悵),
필 무렵에도 여전히 적막하다네(直是開時也寂寥).
흰 매화 높은 가지에 피어 복사꽃에 비할 수 없고(素艶照尊桃莫比),
외로운 향기 소매에 붙어 오얏나무 넉넉하리라(孤香粘袖李須饒).
떠나는 이 남쪽 갈 때 더할 수 없이 슬퍼(離人南去腸應斷), 꽃잎들 말을 뒤따라 초교를 지나리라(片片隨鞭過楚橋).

대동강 위에서 양기훈(浿上 楊基薰)

첫 연에서 "강남은 정히 추워 봄소식이 잔잔하다"(江國正寒春信穩)고 했다. 여기 '穩'은 '편안하다'는 뜻으로 '잔잔하다', '느긋하다'는 말이다. 즉 아직 추워서 봄이 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느긋하다. 그래서 고갯마루 매화나무 가지 위에는 눈이 펄펄 나부낀다. 이것이 제2련의 "嶺頭枝上雪飄飄"이다. 여기서 '江國'과 '嶺頭'가 대구(對句)가 된다.

가지 위로 눈이 내린다고 했다. 그러면 꽃망울이 추위에 움츠릴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3연에서 "떨어질 때의 서글픔 어찌 말하겠나?"(何言落處堪惆悵)고 했다. 말할 나위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다시 꽃이 필 무렵에도 적막하긴 마찬가지(直是開時也寂寥)라고 했다.

꽃이 필 때와 질 때의 감정! 꽃이 피기 전에는 언제 피나하고 기다리는 조바심, 그리고 활짝 피고 나면 질까 봐 걱정하는 안타까움! 그래서 유숙기(兪肅基, 1696-1752)는 "꽃구경은 마땅히 반쯤 필 때 해야 한다"(看花唯取半開時)라고 했다.

다시 4련과 5련에선 매화의 자태와 향을 복숭아꽃과 오얏꽃에 대비했다.

여기서 잠시 노매파(盧梅坡, 남송 때 문인, 생몰년 대 미상)의 시, <눈과 매화>(雪梅)를 읊어 보자!

매화와 눈이 봄을 다투어 지려 하지 않고(梅春爭春未肯降),
시인도 붓을 내려놓고 비교만 하네(騷人擱筆費評章).
매화는 흰 빛깔이 눈보다 조금 뒤지고(梅須遜雪三分白),
눈이 향기로는 매화보다 도리어 못하다네(雪却輸梅一段香)

노매파는 눈과 매화의 빛과 향기를 비교했다. 그런데, 정곡은 매화의 자태를 복숭아꽃에, 매화의 향을 오얏꽃에 비교했다. 즉, 높은 가지 위에 피어 내려 비추는 흰 매화는 복사꽃에 비할 수 없고(素艶照尊桃莫比), 소매에 붙는 외로운 향기는 오얏꽃 보다 넉넉하다(孤香粘袖李須饒) 했다.

다시 말해 매화의 소박한 자태(素艶)는 복사꽃의 요염한 자태(妖艶)에 비교가 안 되고, 매화의 향기는 오얏꽃의 향기보다 소매에 붙어 외로움을 더하게 한다는 말이다.

孤香, 외로운 향기! 떨어지기 싫다고 옷소매에 꽉 달라붙는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 연에서 "떠나는 이 남쪽으로 갈 때 애끊는 듯 슬프다"(離人南去腸應斷)했다.

떠나는 이(離人)는 나귀를 몰아 초나라로 가는 다리(楚橋)를 지나간다. 그 뒤로 꽃잎이 눈송이처럼 펄펄 휘날린다(片片隨鞭過楚橋).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여기서 나는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파교(灞橋)를 넘어 동쪽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떠올렸다.

오늘 이 정곡의 매화시를 읽으면서 난 임포의 <산원소매>나 노매파의 <설매>, 그리고 우리나라 유숙기의 매화시가 모두 정곡의 매화시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매화시를 감상하면서 다시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범의 <귀로10폭병풍>, 변관식의 <수촌6폭병풍>을 만났는데, 이 두 작품을 통해 상상 속의 경치를 그린 산수화에서 실재하는 산천을 대상으로 한 풍경화로 변모하는 근대화단의 화풍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귀로10폭병풍>
<귀로10폭병풍>
<수촌6폭병풍>
<수촌6폭병풍>

다시 여섯 번째 전시실에서는 <곤여전도8폭병풍>과 같은 세계지도뿐만 아니라 지도와 회화의 경계에서 병풍으로 제작된 <평양성도8폭병풍> 및 <경기감영도12폭병풍> 등을 만났다.

<곤여전도8폭병풍>
<곤여전도8폭병풍>
<평양성도8폭병풍>
<평양성도8폭병풍>
<경기감영도12폭병풍>
<경기감영도12폭병풍>

이러한 병풍들은 지도로서의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해당 지역의 번영을 염원했던 시각적 장치였다.

마지막 일곱 번째 전시실로 들어갔다.

이 전시실은 벽사의 기능을 지닌 동시에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호피도8폭병풍>과 <호피장막도8폭병풍>을 배치하여 조선시대병풍이 지니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미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호피도8폭병풍>
<호피도8폭병풍>
<호피장막도8폭병풍>
<호피장막도8폭병풍>

전시실을 나오며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홍백매, 석연(石然) 유기훈(兪基薰)초본의 자수매화도 등 병풍 속의 매화를다시 생각할 때, '카톡!' 하고 구군가의 카톡이 왔다. 열어보니 왜관의 제자 우빈(又彬,정재우 원장))의 매화소식이다.

"교수님, 수도원 모퉁이 매화가 피었네요. 매화 보시러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걸 알고 보내준 제자의 배려다.

"그래, 고맙네! 날 잡아 가겠네!" 바로 카톡을 보냈다.

매화향기가 자꾸만 코를 찌르는 듯하다.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2023. 3. 15.

늦은 밤에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 쓰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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