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두 번째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궁중화원이 제작하고 왕실에서 사용한 궁중병풍을 주제로 하여 왕실의 권위, 태평성대와 복락에 대한 기원을 담은 장식 병풍과 궁중 행사를 시각적으로 담은 기록화 병풍 등을 선보였다.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를 그려 왕의 권위와 위업을 드러내는 <일월오봉도8폭병풍>을 비롯하여,

<일월오봉도8폭병풍>
<일월오봉도8폭병풍>

화려한 채색과 디테일을 뽐내며 온갖 길상적인 의미를 담아 왕실의 복락과 태평성대를 기원했던 <곽분양행락도8폭병풍(郭汾陽行樂圖八幅屛風)>, <요지연도8폭병풍(瑤池宴圖八幅屛風)> 및 <한궁도6폭병풍(漢宮圖六幅屛風)> 등을 감상할 수 있었으며 또한,

<곽분양행락도8폭병풍(郭汾陽行樂圖八幅屛風)>
<곽분양행락도8폭병풍(郭汾陽行樂圖八幅屛風)>
<요지연도8폭병풍(瑤池宴圖八幅屛風)>
<요지연도8폭병풍(瑤池宴圖八幅屛風)>
<한궁도6폭병풍(漢宮圖六幅屛風)>
<한궁도6폭병풍(漢宮圖六幅屛風)>

1902년 4월과 11월에 각각 거행되었던 진연(進宴)을 그린 <임인진연도10폭병풍(壬寅進宴圖十幅屛風)>과 <임인진연도8폭병풍(壬寅進宴八幅屛風)> 두 점을 한 공간에 배치하여 조선의 마지막 연향(宴饗)에 대한 기록을 시각적으로 다채롭게 살펴볼 수 있었다.

<임인진연도10폭병풍(壬寅進宴圖十幅屛風)>
<임인진연도10폭병풍(壬寅進宴圖十幅屛風)>

다시 네 번째, 다섯 번째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는 19세기 말부터 이어져 온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던 근대화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전시실에서는 파노라마식 대화면에 상 하단을 생략하고 매화나무의 가운데 부분을 묘사하여 압도감을 주게 한 장승업의 <홍매도10폭병풍(紅白梅圖十幅屛風)>, 섬세하고 우아한 평안남도 '안주수'(安州繡)의 정수를 간직한 양기훈 초본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이 두 작품은 근대 전환기 변화된 미감을 단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홍매도10폭병풍(紅白梅圖十幅屛風)>
<홍매도10폭병풍(紅白梅圖十幅屛風)>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
<자수매화도10폭병풍(刺繡梅花圖十幅屛風)>

늙고 젊은 두 그루의 홍백매그림 병풍. 이 병풍은 늙은 매화 두 그루가 양쪽으로 뻗은 모습을 역동적으로 구성해 그린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대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화 그림이 12세기 무렵 고려 중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여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걸쳐 문인 사대부들의 도덕적, 풍류적 삶을 확충하고 심의(心意)를 표출하는 매체로 크게 유행하였다. 장승업이 활동했던 조선 말기에는 일반 서민층에까지 매화 그림 향유 풍조가 확대되었는데, 특히 이 시기에는 추위를 견디며 피는 종래의 강인한 모습과는 달리 화사한 봄의 정취를 가득 담고 활짝 핀 모습의 홍매(紅梅)가 유행하였다. 또한 이 작품과 같이 늙고 굵은 매화나무가 등장하는 병풍 그림도 이때부터 애호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매화도를 즐겨 그린 대표 작가로는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 - 1892)과 장승업이 있었다.

이 작품의 화면을 보면, 두 그루의 매화 둥치를 화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비스듬히 배치하여 수많은 가지와 꽃들이 화면 가득히 펼쳐져 있는데, 뒤쪽에 있는 늙은 매화나무는 먹으로만 꽃을 그렸으나 왼쪽에 있는 젊은 매화는 홍백(紅白)을 섞어 꽃을 묘사했다. 두 그루 모두 나무줄기에는 먹으로 큰 태점(苔點; 수묵화에서 산, 나무, 바위, 땅 등에 난 이끼를 나타내기 위해 찍는 작은 점)을 가하였으나, 앞에 있는 나무에는 특별히 녹색 태점을 찍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특히 이전의 매화도와 달리 꺾임이 두드러진 가지들과 꽃들이 많이 그려진 것은 중국 청대 매화도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복잡하고 어지러운 느낌보다는 화면 구성의 구도가 매우 압도적이며, 장승업 특유의 호쾌한 붓놀림 또한 거침이 없다.

한데, 이 그림엔 화제(畵題)가 없고, 다만, 왼쪽 끝 하단에 낙관(落款)이 있어 이 그림이 오원의 그림임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와 그림에서 피어난 매화

매화가 오랫동안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꽃으로 여겨졌던 것은 매화를 사랑했던 문인들의 스토리가 함께 전해지기 시작한 데서부터이다.

예컨대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98-740)이 매년 이른 봄이면 나귀를 타고 장안(長安) 동쪽 파수(灞水)에 놓인 다리(灞橋)를 건너 직접 매화를 찾으러 산으로 떠났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파교심매(灞橋尋梅: 파교에서 매화를 찾다)', '답설심매(踏雪尋梅: 눈을 밟으며 매화를 찾다)', '설중탐매(雪中探梅: 눈 속에서 매화를 찾다) 등을 주제로 한 그림. 또 청나라 때 그림 교본책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시사재파교려자배상(詩思在灞橋驢子背上)>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제의 그림에는 눈이 가득 쌓인 적막한 산골에 핀 매화,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 그리고 보따리나 가야금을 들고 따라가는 시동이 함께 묘사된다.

그 뒤 송나라 때 임포(林逋, 967-1028) 역시 매화를 사랑하는 애매가(愛梅家)였다. 그는 학문에도 뛰어났지만, 당시 부패한 정치상황에 불만을 품어 속세를 떠나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 부근에 은거하며 평생 홀로 살았다. 대신 그는 사슴, 학과 함께 살았는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면 사슴의 목에 술병을 걸어 술집에 보내 술을 받아오게 하였고, 손님이 찾아오면 학이 하늘에서 울어 알려주는 풍아(風雅)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에 따라 집 주변에 삼백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게 되었는데, 그 뒤로 완전히 매화에 심취하여 매화를 감상하고 시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았다"고 하여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어느 봄날 저녁 그는 서호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바로 시를 읊었는데, 그것이 바로 매화시(梅花詩)로 유명한 <산원소매>(山園小梅)이다.

모든 꽃이 흔들려 떨어져도 홀로 곱게 피어,
(衆芳搖落獨暄姸)

작은 정원의 아름다운 정취를 다 차지하네.
(占盡風情向小園)

성긴 가지 그림자는 맑은 물 얕은 곳에 비스듬히 비추고,
(疏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는 황혼 무렵 달빛 아래 풍겨오네.
(暗香浮動月黃昏)

서리 새는 내려오려 먼저 몰래 주위를 둘러보고,
(霜禽欲下先偸眼)

흰나비가 그 꽃을 안다면 깜짝 놀라리라
(粉蝶如知合斷魂)

다행히 나지막이 시를 읊조리며 서로 친할 수 있으니,
(幸有微吟可相狎)

악기나 금 술잔 모두 필요 없네.
(不須檀板共金尊)

임포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전문이다.

임포의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자 그 뒤 이 시의 '소영'(疏影)과 '암향'(暗香)은 매화를 의미하는 시어(詩語)가 되었으며, 임포의 매화 사랑은 후대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매화가 만발한 가운데 은거하는 선비를 주제로 한 '매화서옥'(梅花書屋) 역시 널리 그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매화 그림은 문인화의 전통 속에서 고려시대부터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매화와 관련된 제화시가 많은 매화 그림과 함께 그려졌다.

조선 초기의 매화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어몽룡(魚夢龍, 1566-1617)의 <월매도>(月梅圖)이다. 그는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 아래에 군자의 기개를 드러내는 듯 수직으로 곧게 뻗은 매화나무를 그렸다. 하단부의 굵은 고목들 사이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매화의 모습이 나타나 있어, 마치 고요한 달빛 아래에서 은은한 매화 향기가 퍼지는 듯하다.(오만 원권 지폐 뒷면 그림)

이밖에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 매창(梅窓) 조지운(趙之耘, 1637-?),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 등의 화가들 역시 매화 그림을 즐겨 그렸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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