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비가 있는 정원

이 전시실에는 꽃을 중심으로 동, 식물과 곤충이 등장하는 화조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현재(玄齎)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 였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

이 그림은 화면 중앙에 태호석(太胡石)이 자리하고 있는데, 구멍이 난 이 태호석 주변에는 잡풀과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이 야생화의 꽃은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려져 있다. 몰골법은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먹 또는 물감을 사용해 붓으로 바로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태호석 위에는 더듬이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두색의 날개를 지닌 여치가 있다. 화면에는 한가로운 여름날의 고요한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조선 후기 화조화의 대가 심사정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역모사건에 휘말린 이후 출셋길이 막혀 평생을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나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동・식물과 곤충을 그린 화조화(花鳥畵)였다. 그는 다양한 색채가 가미된 사실적 필치의 화조화를 그려내 조선 후기 화조화의 신경향을 선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다양한 꽃과 식물을 심어 정원을 가꾸는 문화가 유행하였다. 당시 원예식물은 마음 수양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중요한 소비품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사정의 그림은 사대부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세간의 인정을 받고 크게 애호되었다.

우리는 다시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소품 조속(趙涑, 1595-1668)의 <수조도(水鳥圖)>,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2761)의 <희작도(喜鵲圖)> 를 둘러보고 전시실을 나왔다.

조속(趙涑, 1595-1668) <수조도(水鳥圖)>
조속(趙涑, 1595-1668) <수조도(水鳥圖)>
조영석(趙榮祏, 1686-2761) <희작도(喜鵲圖)>
조영석(趙榮祏, 1686-2761) <희작도(喜鵲圖)>

이때, 우영의 전화가 왔다.
"한송, 미안하네! 나 때문에.. 치료 마치고 막 집에 들어왔네!"

오늘의 불상사는 우영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일이다. 각자가 조심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뒤풀이도 없이 헤어졌다.

'붓을 물들이다' 기획특별전을 보고 컬렉터 오세창 선생은 오직 미술품을 모으는 데만 그치지 않고, 지켜내기에도 힘썼다. 따라서 오늘의 이 전시회가 가능했다.

전시 작품 중 19세기 화가 이정직(李貞稙, 생몰 년대 미상)의 <묵죽도(墨竹圖)> 는 서예처럼 중심을 강조한 대나무 그림이다.

이정직(李貞稙, 생몰 년대 미상) <묵죽도(墨竹圖)>
이정직(李貞稙, 생몰 년대 미상) <묵죽도(墨竹圖)>

이정직은 그림 속 대나무 옆 화제(畵題)에 "欲識凌冬性 唯有歲寒知"라고 적었다.

겨울을 이기는 성품을 알고 싶어도, 오직 세한 이후라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서화의 가치를 몰라 볼 때, 묵묵히 훌륭한 작품들을 모으고 정리해 화첩과 책을 엮어 후세에 전한 오세창의 마음이 저 대나무 같지 않았을까?!

요즘처럼 주식, 부동산, 미술품 시장이 가장 뜨거울 때 뛰어들었다가 식자마자 뛰쳐나오는 개미들은 폭락에 들어가 끝까지 버티던 그의 마음을 차마 알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것을 붙들고 투자하는 것 같았을 그가 사실은 가장 먼저 미래를 맞이한 인물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이름난 것 중 아름다운 것을 가려내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구와 정리를 통해 지켜 냈다.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컬렉션은 사라지려는 것들을 알아보는 밝은 눈과, 어려움 속에서도 소중한 것을 지키는 뜨거운 마음에 대한 응원처럼 느껴졌다.

그런 뜻에서 오늘 전시회 관람은 단순한 관람이 아닌 분명 조선 초기(1392-약 1550,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룬 안견파)부터 중기(약 1550-약 1700, 안견파 화풍과 함께 명나라 때 절강성 출신 대진(戴進)을 중심으로 형성된 절파(浙派), 안견의 관념산수 화풍), 후기(약 1700-약 1850, 겸제 정선의 실경산수 화풍), 그리고 근대(일제강점기, 조석진, 안중식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 미술사를 공부하는 자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세창 선생님의 깊은 역사의식에 경탄하며 존경의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다음날 도연(道然, 최공웅)은 한송(漢松, 정우열)에게 "한송, 어제 고마웠어요. 조선미술사를 공부하는 좋은 시간 가졌어요!"하고 카톡을 보냈고, 또 우사(雨沙, 이덕훈)는 한 폭의 그림사진 하나를 보냈다.

그 사진은 양기훈(楊基熏,1843-?)의 <노안도(蘆雁圖)> 였다.

양기훈(楊基熏,1843-?) <노안도(蘆雁圖)>
양기훈(楊基熏,1843-?) <노안도(蘆雁圖)>

자세히 보니 그림 우측에 "下時波勢出"이란 화제(畵題)가 보였다. "기러기가 내려앉을 때 물결이 인다."는 뜻이다.

바로 우사에게 답글을 보냈다, "우사, 석연(石然) 양기훈(楊基熏)의 <노안도>(蘆雁圖)네. '下時波勢出'이란 화제 보이네. '기러기 내려앉을 때 물결 인다.'는 뜻일세!"

그 뒤 저녁때 우사의 답글이 또 왔다.

"師友 漢松, 저녁 자셨지? 난 師友덕에 편히 저녁 들 수 있었네. 그려! "기러기 내려앉을 때 물결이 인다." 이 해석이 잘 안됐는데, 저녁 전에 한송 문자 가르침 받고 속 후련한 상태에서 저녁을 먹을 수가 있었으니 말일세. '下時波勢出!'" ㅎㅎㅎ

우사는 한송더러 '師友'라 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란 뜻이다. 師友! 한송이 또 우사에게 그림 사진 한 장을 보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을 보냈다.

"우사, 잘 주무셨나?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 이네.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

장승업은 호가 오원(吾園), 또한 취명거사(醉瞑居士), 문수산인(文峀山人)이란 별칭이 있네.

이 그림은 제목 '倣黃鶴山樵秋江圖'에서 알 수 있듯이 장승업이 원대 화가 왕몽(王蒙, 1308?-1385)의 가을 경치 그림을 본떠서 그린 그림이네. 여기 '黃鶴山樵'는 '황확산 나무꾼'이란 뜻으로 왕몽(王蒙)의 호이네. 왕몽은 원나라 말기의 화가로 원말의 4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네.

묵법수윤(墨法秀潤)이란 평을 받았던 그의 그림은 구도가 장대하고, 산을 중립시킨 고원산수(高遠山水)를 배경으로 세필로 구름은 몽기(朦氣)를 나타낸 것이 특색이네. 그림의 좌측에 "無人伴歸路 獨自放扁舟"란 화제가 있고 이어 "倣黃鶴山樵秋江圖"라 썼네.

"아무도 없이 돌아오는 길, 혼자 외로이 작은 배를 띄웠다"는 뜻일세

또 "己卯秋大元張承業倣黃鶴山樵秋江圖"란 낙관이 있네. "기묘년(1879) 가을 본관이 대원인 장승업이 황학산 나무꾼(왕몽)의 가을 경치 그림을 본떠서 그렸다"는 뜻이네. 이로써 이 그림은 1879년 가을에 장승업이 37세에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네."

바로 우사는 "좋고 좋네. '倣黃鶴山樵秋江圖', 漢松! 맛이 살아나네"란 답글을 보냈다.

이렇게 관람 뒤 한송과 우사는 카톡을 통해 작품에 대한 느낌을 서로 주고받았다.

여기 올린 사진은 경산이 찍은 전체 사진을 제외 하고 그림(작품)은 모두 우사가 찍었다. 이 글을 통해 우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2. 12. 1.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쓰다

편집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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