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주민들이 주도했던 독립선언식은 북간도 무장투쟁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 민족은 1919년의 독립선언으로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온 백성이, 온 민족이 함께 일어났다. 31일 서울에서의 하루만이 아니었다. 3월의 모든 날은 우리의 독립선언일이었다. 4월의 모든 날도 그랬다. 3월과 4월을 가득 채운 독립선언은 5월에도 이어졌다.

독립선언은 마치 릴레이 경기를 하듯 전국으로 번져갔다. 국내 뿐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모든 동포들이 손을 잡고 민족 자존과 독립을 외쳤다. 그러나 독립선언 104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는  만주 지역의 독립선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한일 병탄 이후 일본의 압제에서 비켜있던 중국지역의 동포들은 좀 더 자유로운 상황에서 국난 타개책을 논의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그 힘들이 모여 1917년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으로 순종황제가 포기한 주권은 자동적으로 국민에게 돌아옴을 선언한 <대동단결선언>이 상해에서 탄생했고, 1919년 2월1일  북간도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기미년의 독립선언보다 한 달 앞선 무오년에 선포되어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은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이나 일본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보다 더 강하고 선명하게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무장투쟁을 촉구했다.

<대한독립선언>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임과 일본의 강제 병합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 일임을 천명하고,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를 현양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이라고 사자후를 토한 뒤 동양 평화와 인류 평등을 위해 살신성인 할 것을 격려하며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로 끝을 맺었다.

<대한독립선언>이 시간적으로도 한 달 앞섰을 뿐 아니라 북간도 독립군에게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웠다. 선언문 작성 당시 봉오동에는 이미 대규모 독립군이 있었다. 최운산 장군이 1912년 100여 명으로 시작한 사병부대가 500여 명이 넘는 정예 독립군 도독부都督府로 양성되어 있었기에 육탄혈전을 독려하는 격문이 <대한독립선언>에 담길 수 있었다.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고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여 현 사태를 수습하자고 했던 <3.1독립선언>의 비폭력 저항보다 "무장투쟁으로 동양평화와 인류평등을 찾아오겠다"는 <대한독립선언>의 적극적 투쟁정신이 북간도 무장독립 운동가들에게 더 깊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후 28일 일본에서, 31일 서울에서 대한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고했다. 나라를 잃고 절망 속에 있던 이 땅의 민초들이 스스로 대한제국의 시대를 끝내고 민국의 시대를 선포한 것이다. 31일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마치 서로 응답이라도 하듯 스스로 주인이 되는 그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독립만세 소리가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계속 터져 나왔다.

1919년 5월 15일 일제 조선군사령부가 조사해 지도로 기록한 '조선독립운동소요요도'
1919년 5월 15일 일제 조선군사령부가 조사해 지도로 기록한 '조선독립운동소요요도'

기미년의 거족적인 독립 선언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이동하며 싸우는 상황에서도 북간도의 독립군들은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성대한 기념식을 개최해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무장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서 몇 달 동안 수십 곳에서 이어졌던  독립선언의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외면당했다.

국내의 3.1운동에 대해서는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록을 꼼꼼히 확인하는 등 많은 연구가 있었다. 각 지역별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졌고, 참가자들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그러나 항일무장투쟁의 근간이 된 북간도 지역의 독립선언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동안 역사학계가 사료 부족을 핑계로 봉오동 독립전쟁에 대한 연구를 외면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북간도 3.1운동도 외면한 것이다. 북간도 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사는 아직 불모지대다.

1919년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열리는 현장을 세세하게 조사하고 기록했다. 1919515일에 집계한 조선헌병사령부 사료에서 간도와 연해주에서 두 달 간 대규모 독립선언이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 주민이 적은 곳은 참석자가 몇 십 명에서 몇 백 명에 그쳤다 그러나 집안현을 비롯해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 왕청현, 화룡현, 훈춘현 등 북간도지역의 여러 지역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선언식이 진행되었다.

화룡현과 왕청현 훈춘현 지역을 확대했다.

조선헌병대 사령부의 문서에 기록된 참석자의 숫자다.

3.11 집안현 1,400

3.13 화룡현 이도구 4,400,

3.13 화룡현 용정 4,000,

3.16. 화룡현 두도구 1,000,

3.17 동녕현 삼차구 4,000,

3.18. 화룡현 청산리 900

3.20. 훈춘현 훈춘 3,000,

3.26. 왕청현 백초구 1,500,

3.26. 연길현 국자가 2,000

3.28 훈춘현 구사평 4,000,

3.28 왕청현 라자구 1,000,

3.30. 훈춘현 한자 수 천 명

4. 4. 화룡현 황전자 1,500,

4. 7. 훈춘현 녹도 1,000

북간도에서 약 한 달 동안의 개최된 독립선언식을 조사한 이 사료에서 대규모로 참여한 지역만 대충 훑어봐도 사만 명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우리 동포들이 기미년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당시 간도의 인구가 삼십오만 정도였다. 사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모인 것은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환자 등을 제외하고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동포들이 참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만큼 뜨거웠다.

이 힘이 그대로 북간도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북간도 일대에서 모여온 젊은이들과 두만강을 건너온 애국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무장투쟁에 뛰어들었고, 북간도의 모든 독립군부대는 지원병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이 우리 선조들이다.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의를 선택하는 사람들,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이다.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는 거족적 결단으로 이루어낸 역사적 결실이었다

온 나라에서 독립선언에 이어지는 사이 서울과 연해주, 상해에서 거의 동시에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해  4월 13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스스로 어둠을 벗어던진 백성들의 자주적 힘으로 시작되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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