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之道(대학지도) 在明明德(재명명덕) 在親民(재친민)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

대학의 경(經) 일장(一章)이다. 그대로 번역하면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하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큰 사람이 되려는 학문의 길과 교육의 목표가 삼강령이라면 팔조목은 그 공부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이다.

본문에서는 삼강령과 팔조목을 2회에 걸쳐 강론한다.

삼강령(三綱領)이란 세 가지 커다란 줄기라는 뜻이다. 대인(大人), 즉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배우는 학문인 <대학>은 세 가지 커다란 줄기를 가지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첫 번째는 ‘명명덕(明明德)’이다.

명명덕은 명덕(明德)을 밝힌다는 뜻인데, 명덕이란 인간이 타고난 밝고 맑은 본성(本性), 즉 선한 본성을 말한다. 따라서 명명덕이란 인간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다시 밝혀내야 한다는 의미다. 인간은 처음에는 맑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보고 듣는 주변 환경에 의해서 본성은 줄어들고 욕심의 화신이 되어 차츰 악한 모습을 갖게 된다. 욕심은 끝이 없기에 채워도 채워도 가중되어 결국 파국을 맞게 되고 만약 당사자가 국가 지도자일 때는 나라가 망하고 국민이 고통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본래 모습인 선한 상태를 회복하고 그것을 다시 밝혀내기 위한 학문과 수양이 지속되어야 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중용(中庸) 제1장의 첫 줄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천명을 받고 태어나는데 그 천명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고 그 본성이 바로 명덕이라는 것이다. 주자(朱子)도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텅 비고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어 모든 일에 대응하는 것이다.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 하였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유학(儒學)에서는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인간은 밝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찾고 있으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나 선(善)을 향한 도덕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명덕은 감각적으로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곧고 밝게 직시하면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자리이다. 우리가 가진 초롱초롱 빛나는 그 밝은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신령스럽게 움직이고 때로는 남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며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이상과 꿈도 가지고 때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질 수 있는 용기도 표출되는 인간의 명덕, 이것이 바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이치를 내 안에 가지고 있으며 만사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삼백만 년을 끌어온 인간의 역사이다.

두 번째는 ‘친민(親民)’이다.

주자(朱子) 이후의 학자들은 이를 신민(新民)이라고 바꿔 읽었다. 자신의 명덕을 밝힌 후에는 백성들을 새롭게 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원전(原典)의 친민은 제왕을 비롯한 지도자는 자신의 명덕을 밝혀 백성을 사랑하고 친밀하게 다스리라는 뜻이었다. 

백성을 감화로 다스리려면 먼저 순수하고 친절한 자신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하라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에 사로 잡히지 않고 내 속에서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내 안의 순수성이 중요하다. 백성의 마음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도덕적 감화력이라 할 것이다. 

주변의 해석을 새롭게 하거나 내 안의 친밀한 마음의 확산을 강조하는 해석의 차이는 훗날 주자학(朱子學)과 양명학(陽明學)이라는 큰 두 갈래 학문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지선(至善, 지극히 선한 곳)에 도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다. 지선의 세계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현실 세계 안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찾으려고 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유학은 자신의 본성을 잘 밝혀내고 이것을 통해 백성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인도하며, 함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止(멈출지)는 뒤의 至(이를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도달하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則必求其至). 이미 도달했으면 부당하게 움직여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안된다(則不當遷動而之他也).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未至此便住不可). 그 경지에 도달하고도 잘 지키지 못하면 역시 ‘止’라 할 수 없다(至此不能守亦不可謂止). 이것은 비록 지극한 善에 이르렀다 해도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그침 없이 지키고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서삼경에 쓰인 善자는 ‘착함’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계속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라는 뜻의 동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류종현 독자  ppuri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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