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참외는 사랑을 말하였다

우중충한 날 언제나 즐거운 편, 고양이 안나
우중충한 날 언제나 즐거운 편, 고양이 안나

사흘 내리 내린 고운 비 덕분에 텃밭 작물들이 쑥쑥 자랐다. 비가 며칠 연이어 내리면 내 마음이 이상하게 변해버리곤 한다. 온 세상에 비가 내리니 모두 마른 목을 축이겠구나 싶다가도 우중충해지는 걸 막을 수 없다. 바깥에 나가 걷는 운동을 하기에 제약이 많아서인지 마음이 울퉁불퉁해진다. 아버지는 비오는 날 외출하는 일을 몹시 꺼리신다. 나도 ‘오늘 비가 내리다니 날씨가 끝내주게 좋군!’ 감탄하는 날도 있지만 대체로 (비 내리는 날씨야 하늘아 미안) 얼른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마음 가득 바란다.

해거름 무렵 작은 텃밭에 들른다. 어느덧 자란 풀들을 보면 갖은 생각이 침투한다. 명아주, 개망초, 쇠비름, 클로버, 개비름.. 내가 심지 않았지만 땅을 뚫고 나온 생명들을 보면 손이 자주 멈칫한다. 농사짓는 이웃들은 왜 풀을 뽑지 않느냐고 당연하다는 듯 말을 건네고 난 사실 귓등으로 흘린다. 이웃한 ‘모범 텃밭’을 보며 아버지는 감탄을 하시지만, 줄세우기식 경쟁교육의 피해자가 틀림없다 여기는 나는 경쟁 심리가 발동하려다가도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내 식대로, 너는 네 식대로’를 새긴다. 경쟁은 그 판에서 스스로 발을 빼면 그만 아닌가. 다시 가슴이 잔잔해진다.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오솔길을 걷는다는 신조랄까 신념은 내게 무척 소중하다.

58번 텃밭, 친구와 김수현님 나의 손길이 닿는다

쭈그리고 뭘 하는 일이 편치 않은 몸 ‘덕분’에 풀을 최소한으로 뽑는다. 너도 자라고 우리도 자라자고 물을 흠뻑 정성스럽게 준다.

모처럼 김수현님과 동네도서관을 향해 출발한 아침 길에 걸음을 나서는데 귀여운 삼색 고양이 동동이가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동동아 안녕!”(동동이는 인간동물에 큰 관심이 없다. 나만 반가워하는 중)

곧이어 나타나신 캣맘님, 할 말이 있으시다. 안나(곧 소개될 향림마을 주민들의 친구, 반장, 길고양이들의 이장 격)와 모리가 살던 집을 철거해달라는 주민의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이내 옮겨질 주거지를 알려주신다. 다행히 옆 빌라 3층 주민이 안나를 예뻐하셔서 정할 수 있었다고. 모든 캣맘의 꿈 아닐까. 널따란 판자 하나 구해다 비를 피하도록 길냥이 집 위에 얹어주고 싶다. 안나는 김수현 님을 언제 봤다고 손길을 받아 궁디팡을 허락해 준다. 김수현 님이 좋아하셔서 나도 기쁘고 안나도 기분 좋겠지? 셋이 행복하니 됐다.

향림마을 우리 집에서 은평구립도서관까지 도보 17분.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장사하시는 트럭아저씨 옥수수를 기꺼이 산다. 김수현님은 맛보다 양, 난 오늘은 양보다 맛! 초당 옥수수 두 개와 찰옥수수 하나를 면 주머니에 담았다. 부녀는 도서관보다 먹기에 열중한다. 작은 마을 공원 의자에 앉아 옥수수 알을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며 뜯는다.

이윽고 구시렁구시렁 혹은 부스럭과 니미럴(강풀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배운 욕) 사이의 효과음들을 안고 다소 요란하게 나타나신 어르신. 앉아서 쉬고 있는 나를 다짜고짜 부르며 비행기모드를 어떻게 푸느냐고 물어보신다. 이렇게 누르시고 이렇게 하시면 되어요. 울 김수현 님보다 스마트폰 다루는 일에 능숙하신 어르신이시다. 가만히 한 입 두 입 그리고 한 알 두 알 맛있게 옥수수를 뜯고 있는데 우리 둘만 먹기에 조금 머쓱하다.

“옥수수 드실래요?”
“나 옥수수 좋아해. 참외 먹을래?”

그냥 주면 좋아서 물어본 것이 어느새 물물교환이 되었다. 옆에서 우리의 김수현님 한마디 하신다.

“저 아주머니 손해 보는 장사 하시네.”

우리 둘은 키득키득 웃는다. 어르신은 80세, 김수현 님을 보시더니 아이고 그렇게 젊냐고(좋겠네! 혹은 보기보다 어리네! 라는 듯이) 하신다. ‘손해 보는 장사’하신 거라는 아버지 말씀을 전해드리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신다.

아버지 반나절 수분을 책임지는 물병과 문제적 참외

“아니 뭘 하며 살았길래 그렇게 생각해?”
“농사짓고 살았슈.”
“그런데 왜 그래? 아.. 그래서 그런가?

옆에서 듣던 나는 그분의 말씀에 폭소를 터트린다. 솔직한 생각의 변화를 더하거나 빼지 않고 언어로 표출하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 휴대전화 벨소리가 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해 드린 뒤 무음과 진동을 오가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으로 우리의 훈훈한 시간은 저문다.

“고마워. 사랑해~”

오잉? 자주 듣던 고백의 말이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며 김수현 님은 그 어르신의 직업을 가늠해 보신다. 분명 사업수완 좋게 장사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말씀. 나도 그 말이 왠지 설득력 있게 느껴져 고개를 끄덕인다.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쌓아두고서 볼만한지 살펴본 부녀는 꽤 괜찮은 오후를 보냈다. 저녁을 먹으며 참외 할머니와의 일을 떠올리며 몇 번은 더 함께 미소를 머금었다.

언덕에 있어 아쉽지만  숲과 연결되어 주민들이 즐겨 찾는 은평구립도서관
언덕에 있어 아쉽지만  숲과 연결되어 주민들이 즐겨 찾는 은평구립도서관

십수 년은 된 이야기일 것이다. 서천에서 수년째 혼자 생활하시던 아버지. 어느 날 어디에서 무엇을 보셨을까. 어떤 계기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신 걸까.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 아버지의 일상을 관찰해보고 싶다. 그 무렵 전화 통화를 끊을 때쯤 ‘사랑해~’ 고백하시던 어느 날 말이다. 에앵?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은 어떤 상황인가(무엇이라 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멋쩍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용기로 시작된 사랑의 인사 혹은 고백. 그 한마디는 오늘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사랑의 고백을, 뜬금없이 옥수수와 참외를 주고받으면서 처음 만난 이웃에게서 들은 것이다.

사랑은 흐른다. 지금도 도처에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지구별에 왔고 자신이 나온 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어느 노래처럼 나도 그 별로 돌아가기 위하여 사랑을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마침표도 느낌표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해요’는 물결과 어울린다. 사랑해~ 미천한 집사인 나와 살아주는 고마운 오디와 앵두꽃에게는 하루에도 수없이 들려주는 고백의 말.

올해 자주 만나게 되어 반가운 청설모

누구든 사랑하고 싶은 날이다.
누구에게든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날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백정은 주주  baerong5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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