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공께서 괴애 김수온공과 더불어 우리 저헌공과 문과 신유동방이라 시네."

지난 토요일 용연(龍然, 정용택))과 함께 김포 양곡 대포리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 묘소와 대포서원(大浦書院)을 다녀와 우사(雨沙, 이덕훈)에게 카톡 보냈더니 우사가 나에게 보낸 답글이다.

우사는 '우리 저헌공'이라 했다.

여기 '저헌공'(樗軒公)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대학연의집요>(大學衍義輯要)를 저술한 연안인 이석형(李石亨, 1414-1477)을 말한다.

또한,  여기 '辛酉同榜'이라 함은 세종 23년(1441) 실시한 진사, 생원 양과에 눌재공과 함께 장원 급제하였다는 뜻이다.

저헌 이석형은 조선 중기 문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선대조이시다.

차를 마산동으로 몰아 가현산을 왼쪽으로 끼고 대포동 쪽으로 가니 산업단지로 둘러싸인 야트막한 동산이 있다. 황오산이라고 부른다 한다.

'文襄公 訥齋諱梁誠之先生 守安祠 입구'

수안사 입구 표석
수안사 입구 표석

란 표석을 따라 오른쪽으로 차를 돌리니 목조건축 위에 팔자 지붕을 얹은 소박한 모양새의 건축물이 우뚝 서 있다.
바로 '大浦書院'이다.

대포서원
대포서원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눌재 양성지 단 한 분의 위패만 모셨다 했다.

안내판
안내판

안을 들여다보니 높이 '華國廟'란 현판이 보인다.

화국묘
화국묘

나라를 빛낸 사당이란 뜻이다.

양성지는 조선을 건국한 태종 때 태어나 세종 때 과거급제로 관직에 나갔다.

이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 까지 나랏일에 두루 쓰임을 받았다.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訥'은 '말 더듬을 눌'자로 자신을 스스로 낮춘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그가 죽은 뒤 학문의 깊이를 칭송해 시호를 내리고, 어명으로 그의 묘를 돌보게 하였다.

비록 말투는 어눌 했지만 나라의 개혁을 위해 직언을 삼가지 않았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40여 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서 무려 55회에 걸쳐 주의(奏議)와 상소문을 올렸다 한다. 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방안이었다.

중화사상과 사대주의에 물든 조선 초기 자주와 실용 노선을 걸으며 개혁을 주장했다.

관념적인 정책 대신 병화, 역사, 지리,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실용적인 정책을 제시 했다

중국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조선의 자주성과 부국강병을 내세웠다.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흉년엔 백성을 규휼할 수 있도록 의창(義倉)제도를 건의해 실현 시켰다.
백정이 일반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고, 혼례를 간소화하자는 등 민생 대책도 제시했다.

양성지는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집현전, 홍문관 등 학문기관에서 30여 년을 일했다.

<동문선>,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의방유취> 등이 그의 참여 속에 출간 되었다. 또한 지리와 지도 전문가로서  <고려사>의 지리지(地理誌)를 썼으며 <동국지도>를 제작했다  정척(鄭陟)과 함께 제작한 <동국지도>에는  요하 동쪽의 중국 영토와 울릉도, 독도 및 대마도까지 우리나라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주장하는 억지를 무력화 시키는 근거가 되고 있다.

300년 뒤 정상기(鄭尙驥, 1678-1752)에 의해 새로운 제2의 <동국지도>로 탄생하였으며, 또한  그뒤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데 크게 뒷받침이 되었다.

또한 세조 당시 그가 건의한 왕실 도서관은 300년 뒤 영조에 의해 '규장각'(奎章閣)으로 현실화하였다.

정조는 처음에 규장각 성립의 안이 양성지의 것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직제학 심염조(沈念祖)가 세조 때 양성지가 마련한 규장각의 제도가 당시 새로이 설치한 규장각의 제도와 같다고 지적하자 정조는 처음 듣는 일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뒤 정조는 양성지의 문집을 수습하도록 하였고,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여 직접 문집에 서문을 썼다.

규장각과 양성지의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묘하게도 규장각이 설치되었을 때 30여 명의 관원이 모두 양성지의 외손이었다.
이에 정조는 <양문양공외예보>(梁文襄公外裔譜)를 편찬케 하였다.

이로써 양성지의 문집 <눌재집>(訥齋集)과 <양문양공외예보>(梁文襄公外裔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차를 입구 쪽으로 몰아 다시 세우고 언덕 위 신도비각을 향해 올라갔다.

비문에 '남원군신도비명'(南原君神道碑銘)이라 새겨져 있다. 비문은 김안국(金安國)이 지었다.

신도비
신도비

다시 언덕으로 오르니 맨 위쪽에 부인 권씨의 묘와 나란히 문양공 양성지의 묘가 있다.

양성지 묘
양성지 묘

여기서 앞을 내다보니 우측으로 바다가 보이고 앞에 연못이 있고, 멀리 동쪽으로 삼각산, 가까이 가현산이 보인다.

제자 서거정(徐居正,1424-1488)은 <통진양성지대포곡별서팔영>(通津梁誠之大浦谷別墅八詠)을 지었는데, 그중 '남포조선'(南浦漕船)에서 양성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배가 삼대처럼 빽빽이 늘어섰는데,
남방에서 걷은 세금 작년보다 많구나.
좋아라, 푸른 산은 실어 갈 수 없기에
해마다 늘 시골 사람들의 몫이라네.

帆檣織織簇如麻
租賦南方較舊多
獨喜春山漕不得
年年長屬野人 家

서거정은 양성지의 제자로 그를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이었다.

양성지가 벼슬에서 물러나 대포곡으로 가게 된 것은 부정 축재 혐의 때문이었다.  

공조판서로 있던 양성지는 성종 10년(1479) 부정 축재 의혹으로 탄핵을 받았다.

이후 이름뿐인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지만, 그것조차 조정의 물의만 들끓게 하여 결국엔 도성을 떠나 통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서거정은 그에게 시를 지어주며 위로하였고, 또 대포 별서 팔경에도 시를 지어 주었다.

대포곡 팔경은 북쪽 언덕의 사계절 소나무(北岡靑松), 서해 바다에 떠 있는 여러 섬(南海諸島),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옥처럼 흰 삼각산 봉우리(東望三峰), 서쪽으로 마니산이 높게 솟아 있는 강화도(西拱江都), 사람을 수심겹게 하는 가을 달빛 아래의 계양산(桂陽山), 가을걷이가 끝난 후 농어와 게를 잡느라 밝혀놓은 횃불(隔岸漁火), 새벽 종소리 들려오는 갈현의 산사(葛峴僧舍), 남쪽 한강에 늘어선 조운선(南浦漕船) 등이다.

허나, 아무리 봐도 옛 그 정취를 느낄 수 없다. 왜일까?  서원 앞 턱까지 쳐받친 공장! 그리고 산업단지!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왠지 마음이 개운치 않다.

또한 양성지의 부정 축재로 인한 탄핵이 오늘의 정치인을 보는듯해 가슴이 아팠다.

정조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의 실학사상은 영원히 묻힐 뻔 했다.

잊었던 역사를 다시 돌아본 하루였다.

2023. 11. 11. 삼경

김포 운양동 여안당에서
한송 쓰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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