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초 왜관 희우당(喜雨堂) 주인 우빈(又彬)으로 부터 

"교수님, 제가 이번에 필사한 <약징>을 영인본으로  출판하려 하는데요. 어떤 형태로든 교수님의 글을 받고 싶네요!"  하는 전화를 받았다.

우빈은 원광대학교 한의과 대학 나의 제자로 지난해 연말에도 <강평상한론>(康平傷寒論)을 필사해 영인본으로 출판해 내게 보내준 바 있다.

우빈의 <강평상한론> 필사 영인본(출처 : 정우열)
우빈의 <강평상한론> 필사 영인본(출처 : 정우열)

그는  <강평상한론> 필사 후기에서 필사를 하는 것은 "악필(惡筆)이다 보니 방명록에 이름 석자를 쓰는 일도 늘 머뭇거리게 마련이었다"하면서 "필사의 시작은 악필을 교정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필사 동기를 밝혔다.

필사(筆寫)는 책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일을 말한다. 인쇄술이 제대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책을 만들려면 당연히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직접 베끼어 써야 했다. 우리 세대만 해도 그러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필사를 직업으로 하는 필경사(筆耕士, scribe)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쇄술을 넘어 컴퓨터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도 필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동호회까지 있다.  왜일까? 그것은 필사가 인쇄를 대신하는 시대를 넘어 지금은 우빈처럼 악필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다던지 취미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필사는 오래 전부터 수행이나 인격 수양, 예술적 재능의 계발, 문화 교양의 계발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즉 수행 공덕의 목적으로는  수도원의 성서 필사, 사찰의 불경 사경(寫經) 등이 그것이고, 인격수양이나 예술적 재능 계발로는 서예 (書藝, 또는 서도書道)가 그것이다.

우리 문화재 중 사찰의 사경이나 서예가의 서예작품이 많은 것도 이때문이다. 그중 일반 대중들이 오래 전부터 가장 선호한 것이 서예이다. 그것은 서예 활동을 통해 개인의 사상과 인격의 수양, 예술적 재능의 계발, 문화교양의 계발, 침착성과 인내성을 기르며, 또한 심신의 건강과 심미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예는 임서(臨書)를  통해 서법(書法)을 체득하고 그 뒤 자기 자신의 서체(書體)를 창출해야 한다. 이를 '숙이생'(熟而生:오래 익힌 뒤에 자기체가 나온다)이라 한다. '인서구노'(人書俱老)란 말도 있다. 사람과 글씨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함께 노련해진다는 뜻이다.

어떤 책을 필사할 것인가?
이는 필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논어>, <맹자>, <도덕경> 등 경서(經書)를, 어떤 사람은 <반야심경>(般若心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佛經)을, 또 어떤 사람은 <상한론>(傷寒論), <의학입문>(醫學入門), <약성가>(藥性歌) 등 의서(醫書)를 각자 전공이나 취향에 따라 다르게 선택한다.

우빈은 그의 필사본 후기에서 3년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악필을 교정할 목적으로 <논어>, <맹자>, <도덕경> 등 경서를 시작으로 필사를 한 뒤 전공 의서인 <강평상한론>(康平傷寒論)을 필사하기 시작해 7개월만에 완성하고 이번에 다시 <약징>(藥徵)을 필사해 출판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번 출간된 <강평상한론>(康平傷寒論)(2023.11.10)은 일본 강평 3년 1060년 단바야시준(丹波雅忠)이 중국 동한(東漢) 시대 장중경 <상한론> 고본(古本)을 수초(手抄)한 전사본(傳寫本)으로 1936년 오오츠카게이세츠(大塚敬節)가 처음 학계에 보고한 <상한론> 고본(古本)이다.

원래 <상한론>은 이름이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으로 장중경이 <내경>(內經)과 <난경>(難經)의 기초 위에서 한대(漢代) 이전의 의학경험과 자기의 임상경험을 총결하여 변증론치(辨證論治)의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리(理), 법(法), 방(方), 약(藥)을 구비한 임상의학의 경전으로 한의사는 누구나 읽어야 할 필수독서이다.

헌데, 안타깝게도 원저(原著)는 산실(散失)되었다. 현존 <상한론>은 서진(西晉)의 왕숙화(王叔和)가 상한 부분을 따로 편집했고, 송대(宋代)에 이르러 임억(林億) 등이 교정(校訂)을 더하여 18권, 24책, 394조, 113방을 수록했다.

우빈이 이번에 필사한 <상한론>은 이 송본(宋本)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 일본의 강평본(康平本) 이다.

한편 이번에 출판된 <藥徵>(약징) 역시 일본에서 출간된 책으로  요시마스 토도(吉益東同)가 사망하기 2년 전 1771년에 마지막으로 서술한 본초 해설책으로 여기서 토도는 <상한론>과 <금궤요략>에 나오는 52종의 약물을 주치(主治), 방치(旁治), 고징(考徵), 호고(互考), 변오(辨誤), 품고(品考)로 나누어 해설했다.

그러나 이 책은 토도가 교정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사망한 뒤 12년이 지난 1785년에 비로소 나까무라 사다하루(中村楨治) 등에 의해 출판되었다.

우빈은 이번에 이 <약징>을 출판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토도가 장중경의 <상한론> 고방을 실제 임상에서 시험해 본 뒤 40년 만에 이 <약징>을 저술했듯이 금년(2024년)은 우빈 자신도  임상 40년이 되는 해로 그간 40년 동안 <상한론>, 즉 토도의 <약징>의 고방을 실제 임상에서 체험하고, 또한 <약징>을 필사하면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조문을 다시 읽고 방극(方極)과 유취방(類聚方)을 찾아 비교하면서 몸소 느끼고 경험했던 감정을 남기고 싶어 이 필사 영인본을 출판한다 하였다.

<약징> 필사는 주로 새벽 6시부터 1시간씩 8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은 이 필사 작업을 가성비 떨어지는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에겐 한의사로서 의미 있고 가장 즐거운 낙이라고 술회했다.

결국 처음엔 악필을 교정하기 위해 시작한 이 필사가 지금엔 그에게 교정을 넘어 정신통일의 수행, 학문 탁마의 수련 등 일석삼조(一石三鳥)로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 장하도다!

우빈(又彬), 또 빛나리라!
내가 그에게 지어준 아호(雅號)다.

<논어>에 "質勝文卽野, 文勝質卽史, 文質彬彬然後 君子"라했다. 

본성이 태도를 누르면 교양이 있어 보이고, 태도가 본성을 가리면 가식적인 것이 된다.
본성과 태도가 잘 어울려야 바로 군자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회우당(喜雨堂)에서 필사를 하는 꼿꼿한 선비, 우빈을 떠올렸다.

필사하는 우빈(출처 : 정우열)
필사하는 우빈(출처 : 정우열)

더욱더 정진(精進)을 바라며...
수고 했네!  그리고 사랑해!

 

2024. 3. 5. 경칩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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