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썩은 꽃’ 특수부 정치 검사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공안부 정치 검사들을 대체하기 시작한 시기가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이다.

2000년을 전후해 제도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극악한 간첩 조작을 구시대 유물로 만들어 버렸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시민권의 진전을 가져왔고 동시에 고문과 조작 수사는 통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 수사는 곧 고문이었다. 그러다가 2010년 서울시 양천경찰서 형사들이 저지른 '날개 꺾기' 고문 수사를 끝으로 대한민국 경찰은 거듭나기 시작했다. 적어도 ‘수사=고문’의 등식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70년대 전반기 박정희 군사독재시기 고문 조작한 간첩(단) 사건이  2010년대 들어서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난 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제공)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70년대 전반기 박정희 군사독재시기 고문 조작한 간첩(단) 사건이 2010년대 들어서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난 사건들(출처 : 리학효 제천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제공)

오히려 21세기 들어서서 과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시절 조작된 간첩 사건들이 재심 결과, 대법원에서 우수수 무죄로 판결받기 시작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4월 27일) 열흘 앞두고 보안사에서 조작하고 공안 검사들이 기름칠한 ‘재일동포 서울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대표 사례다.

서승(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서준식(서울대 법대) 형제는 1971년 대선 열흘 전인 4월 18일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대선을 불과 10일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무고한 학우들을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해 엮으려는 보안사의 간첩단 조작 만행 앞에 서승은 가혹한 고문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래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거짓 진술을 하기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작심했다.

군 수사관이 아침 식사를 위해 바깥으로 나가고 경비병이 잠시 문을 열고 나간 사이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는 난로 옆 기름통을 얼굴부터 온몸에 붓고 조서 용지를 둘둘 말아 난롯불을 당겨 불을 붙였다. 손목과 팔에 불이 붙을 때는 견딜 수 있었지만, 얼굴로 불이 붙자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서승은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면서 비명을 질렀다.(주1)

죽음으로써 고문 조작 수사에 항거하려던 결심은 실패했다. 실제로 서승은 자신을 고문하던 수사관에게 “죽여 달라”고 여러 차례 애원했다. 그 당시 판사들은 하나같이 고문 조작에 의한 진술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공안검사가 기름칠한 사건을 그럴듯한 포장지로 덮어버렸다. 박정희 독재체제 대한민국 사법사상 암흑의 시대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선거 일주일 앞두고 ‘북괴 지령을 받은 서울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언론에 공표했다. 더구나 상대 후보인 김대중 후보의 측근 김상현과 서승이 숙식을 같이 할 정도로 관련이 깊고 이들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했다고 퍼뜨렸다.

보안사가 조작하고 정치검찰과 판사가 기름칠한 <재일동포 서울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 당시 고문피해자 서승( 전 리츠메이칸대 법학부 교수) 안경 쓴 얼굴이지만 얼굴에 화상의 흔적이 선명하다. 그는 1974년 앰네스티에 의해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되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2월 2일)  서승 옆에 있는 사진 맨 오른쪽 안경 쓴 이가 동생 서준식 선생이다. 서준식 선생은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들어 제주 4.3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 헌터>(1997)를 비롯해 인권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인권운동의 선구자이다. <인권연대>가 1999년 탄생했으니 무려 6년이나 앞서서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보안사가 조작하고 정치검찰과 판사가 기름칠한 <재일동포 서울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 당시 고문피해자 서승( 전 리츠메이칸대 법학부 교수) 안경 쓴 얼굴이지만 얼굴에 화상의 흔적이 선명하다. 그는 1974년 앰네스티에 의해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되었다.(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2009년 2월 2일)  서승 옆에 있는 사진 맨 오른쪽 안경 쓴 이가 동생 서준식 선생이다. 서준식 선생은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들어 제주 4.3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 헌터>(1997)를 비롯해 인권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인권운동의 선구자이다. <인권연대>가 1999년 탄생했으니 무려 6년이나 앞서서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비로소 서승과 서준식 형제는 세상의 관심을 받았다. 정치사회 민주화가 조금씩 진전되면서 동생 서준식이 1989년에, 그리고 형 서승은 수감된 지 19년 만인 이듬해(1990) 풀려났다.

그 사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옥바라지하던 어머니 오기순 님은 아들이 석방되기 10년 전인 1980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 또한 어머니에 이어 3년 뒤 돌아가셨다. 부모님 모두 감옥에 갇힌 아들들이 석방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가슴에 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 간첩단 고문 조작 사건은 박정희 양아들 전두환이 통치하던 80년대 군부 독재 시절에도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1948-1949) 제주 4.3 학살 당시 원통하게 끌려가 학살당한 아들을 평생 그리워한 어머니 고 윤희춘 씨(출처 : 하성환)
(1948-1949) 제주 4.3 학살 당시 원통하게 끌려가 학살당한 아들을 평생 그리워한 어머니 고 윤희춘 씨(출처 : 하성환)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보도 연맹학살 사건이나 제주 4·3 학살, 여순학살 당시 국가가 저지른 국가 폭력은 이후 군사정권에서도 그대로 관철되었다. 60-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1차·2차 인혁당 고문 조작 사건과 비전향 정치범에 대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자행한 잔혹한 국가 폭력, 그리고 선감도 인권 유린 희생자들이 그러하다.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도 마찬가지다. 80년 5월 전두환 광주 학살 만행은 그들이 베트남전에서 자행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80년대 형제복지원 인권 유린 사건은 명백한 국가 폭력이었다.

당시 권력이 남발한 ‘자유 대한’, ‘자유민주주의’, ‘정의 사회구현’은 껍데기일 뿐, 내면은 전체주의가 빈틈없이 관철된 국가 파시즘 사회였다. 따라서 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대한민국 사회는 적어도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왜 80년대가 ‘변혁의 시대’였는지, 왜 20대 젊은이들이 님웨일즈의 『아리랑』에, 무명의 항일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의 치열함에 열광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비로소 ‘자유민주주의’의 첫발을 떼며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시민사회의 성장과 과도기를 지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대한민국은 드디어 ‘자유민주주의’ 꼴을 하나씩 갖춰나갔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당시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2000년 1월 11일 당시 제주 4.3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이 특별법에 서명하는 모습 (출처 : 하성환)
김대중 국민의 정부 당시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2000년 1월 11일 당시 제주 4.3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이 특별법에 서명하는 모습 (출처 : 하성환)

김대중-노무현 집권기(1998-2007)는 제주 4·3 항쟁이 특별법으로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 학살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2003년 제주 4.3 위령제에 참석해 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 학살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2003년 제주 4.3 위령제에 참석해 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하고 있다(출처 : 하성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과거 국가가 자행한 집단 학살, 바로 제노사이드에 대해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던 시기였다. 나아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옥죄었던 치안유지법을 이어받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기이기도 했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장하던 그 시기,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 낡은 법질서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해방 후 50년 넘게 독재 권력을 떠받치며 기름칠하던 공안부 정치 검사들이 서서히 무대 뒤로 퇴장했다.

그리고 그를 대체해 ‘거악 척결’을 기치로 내걸었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약칭 중수부)와 지검 특수부 정치 검사들이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검 중수부와 지검 특수부는 국회의원, 고위공무원을 비롯한 부패정치인과 재벌 비리 등 ‘거악 척결’을 전면에 내세우며 종종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1963년 서울지검에 특수부가 처음 생긴 이래, 견제받지 않는 검찰 권력이 2000년을 전후해 서서히 어둠 속에서 몸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참여연대와 인권연대는 2000년을 전후해 검찰 권력을 예의 주시하며 견제받지 않는 권력임을 주장해 왔다.

그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고 ‘공직자 비리 수사처’를 설치하려 시도했다. 그렇지만 검찰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참여정부 또한 ‘공직자 부패수사처’를 신설하려 했으나 권력화된 검찰의 집단 반발로 흐지부지됐다. 2019년에 가서야 문재인 정부는 진통 끝에 특수부를 없애고 반부패수사부로 명칭을 바꿨다. 그리고 2020년 공수처를 설치함으로써 형식이나마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미 권력화한 검찰은 2019년 검찰개혁을 진두지휘할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를 난도질하면서 검찰개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미 그러한 사태의 예고편을 6년 전, 전 국민이 목격한 사건이 있었다. 다만 그 당시엔 국민 스스로 윤석열 검찰 권력의 실체를 몰랐다. 아니, 윤석열 검사를 초고속 승진시킨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민정수석조차 그 실체를 몰랐다. 그것은 바로 ‘국정원 댓글 수사 항명 파동’(2013)이다.

당시 ‘국정원 댓글’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검사는 국회 법사위 국정조사 증인으로 나와 검찰 수뇌부의 “외압이 있었다.”며 자신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발언으로 국감장을 뒤흔들었다.

이 발언은 전 국민을 한순간에 ‘윤빠’로 만들었던 극적인 장면이자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 말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일개 지청장 출신 검사가 검찰 수뇌부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이 사건으로 윤석열 검사는 일약 스타 검사가 되어 ‘정의로운 칼잡이’의 상징이었다.

통상 대검 중수부 수사와 지검 특수부 수사는 검찰총장이나 지검장의 하명 수사에 따른 표적 수사이자 인지수사이다. 일반 형사부 사건처럼 고소, 고발이 들어와 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임은정 검사의 표현대로 특수부 수사는 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보다 사냥감을 정해 놓고 사냥을 감행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심각한 인권 침해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8년 당해 연도만 하더라도 대검 중수부가 수사한 사건의 무죄율(27.3%)은 일반 형사 사건 무죄율(0.31%)보다 무려 90배나 높았다. 물론 대검 중수부나 지검 특수부 수사는 스스로 범죄 혐의를 인지해야 하니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매우 컸을 것이다. 게다가 범죄 혐의에 대한 인지수사인 만큼, ‘정의의 칼잡이’로서 ‘거악 척결’이라는 대의 앞에 어느 정도 공명심과 출세욕이 작동했을 것이다.

대검 중수부(특수부) 수사가 처한 그러한 배경에서 타건 압박 수사는 피의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된다. 본건 범죄 피의자에게 타건 범죄 혐의 피의 사실을 압박했을 때 검찰의 수사 의도에서 빠져나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5만 달러 불법 정치자금을 건넸다고 진술한 전 대한통운 사장 곽00 사건(2010)이 대표 사례이다.

평소 고혈압과 당뇨를 앓던 곽00 전 대한통운 사장은 법정에서 “검찰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고 진술했다. 검찰이 “징그럽게 무섭게” 수사해서 “죽고 싶었다”며 그는 “살기 위해서” 그랬다고 울먹였다. 실제로 검찰은 새벽까지 밤샘 조사를 하거나 “돈 받은 전주고 출신 인사들을 다 대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 모두 한명숙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의 압박 수사는 때로 피의자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종종 초래하기도 한다. 대표 사례가 2015년 서울지검 특수부가 수사한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과 정관계 청탁 로비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기춘, 이완구, 홍준표 등 유력 정치인 이름이 거명되면서 사건이 커졌다. 결국 성완종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맞았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타건 압박 수사와 밤샘 수사도 문제이지만 언론에 피의사실을 흘려 극심한 모욕감으로 인격 살인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 주2)과 2018년 노회찬 의원의 투신자살이 단적인 사례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처형당한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조봉암 선생을 잇는 휴머니스트 정치인 노회찬 묘소(출처 : 하성환)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처형당한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조봉암 선생을 잇는 휴머니스트 정치인 노회찬 묘소(출처 : 하성환)

2009년 SBS가 보도한 ‘노무현 대통령 논두렁 시계‘(2009. 5. 13.)와 2018년 조선일보가 보도한 ‘노회찬 의원 부인의 전용 운전기사’ 보도(2018. 7. 21.) 모두 ‘도덕성’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안겨주고 ‘위선자’로 낙인찍은 망신 주기형 보도였다.

2004년 대우건설 비자금과 불법 정치자금 사건 당시,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의 투신자살과 2006년 현대그룹 비자금 사건 당시 현대그룹 총수 정몽헌 회장의 투신자살도 대검 중수부에서 수사한 사건으로 대중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 시대 배경에서 박근혜 정권은 2013년 대선 공약이었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약칭 중수부) 폐지를 단행했다. 그렇지만 기존 대검 중수부 업무 중 일부는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진행했다.

대검 중수부 폐지 이후 지검 특수부는 검찰 요직 중 요직이자 검찰 수뇌부로 승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당시 특수부가 설치된 지검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수원, 인천 7곳인데 2019년 검찰개혁 당시 서울, 대구, 광주 세 곳만 남기고 모두 해체해 특수부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세 곳 특수부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반부패수사부로 명칭을 변경했고 수사 범위와 인원도 축소했다. 2020년 현재 전국 2,200명이 넘는 검사 가운데 특수부 검사는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주3) 따라서 특수부야말로 검찰조직 내 성골이자 검찰의 꽃이다.

다시 윤석열 특수부 수사로 돌아가자.

2016년 11월 19일 박근혜 퇴진 광화문 촛불 집회 장면(출처 : 하성환)
2016년 11월 19일 박근혜 퇴진 광화문 촛불 집회 장면(출처 : 하성환)

2016년 11월 촛불 시민혁명으로 한 달 뒤 12월 국정농단 특검이 꾸려졌을 때 윤석열 검사는 박영수 특검에 의해 다시 특검수사팀장으로 소환된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윤석열 특검수사팀장은 ‘강골 검사’이자 ‘정의의 사도’로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2022년 3월 10일 대선 당선 직후, MBC, 경향신문, 미디어오늘을 비롯해 이 땅의 진보 언론들조차 윤석열 당선자에게 ‘강골’ 검사라는 표현을 썼다. 한겨레 또한 2017년 중앙지검장에 오른 윤석열을 ‘강골’로 표현했다.

윤석열 검사는 한동훈과 함께 국정농단 박영수 특검에 합류한 이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삼성 그룹 이재용 회장을 구속했다. 비서실장 김기춘, 민정수석 우병우도 구속했다. 특히 한동훈 검사는 일찍이 SK분식 회계,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 등 ‘대기업 저격수’로 이름을 알린 데다 국정농단 당시, 삼성 이재용까지 구속해 ‘칼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른바 ‘적폐 청산’ 수사였다.

이후 2017년 5월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지검장으로 승진한 뒤, 통상 고검장이 부임하던 자리인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초고속 승진한다. 관례를 깨고 전격 단행된 인사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이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장면이었다.

대구지검 특수부장, 대검 중수부 과장,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지낸 윤석열 검사는 2018년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다스 실소유주 의혹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를 수사하면서 2018년 3월 이명박도 구속했다. 그리고 2019년 7월 드디어 문재인 정부에 의해서 검찰총수인 검찰총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한 달 뒤 자신을 검찰총장으로 추천했던 조국 민정수석이 검찰개혁의 소명을 띠고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되자 ‘조국 사태’를 일으켰다. 윤석열 검찰 사단이 검찰개혁에 반발하며 맹견처럼 조국의 목덜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장관 후보를 장관으로 공식 임명했는데도 윤석열 검찰은 100번에 버금가는 압수 수색을 자행했다. 저인망식 수사이자 조국 가족 전체를 겨냥한 사냥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하나같이 ‘조국=위선자’ 프레임에 갇혀 검찰에서 흘리는 내용들을 기사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사모펀드를 잘 아는데 조국 나쁜 놈’이라는 ‘강골 검사’는 어느 순간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공정과 정의의 상징’이 되었다.

대한민국 언론은 ‘조국 사태’의 본질을 ‘검찰개혁 대 검찰개혁에 반발하는 권력화한 정치검찰’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지 않았다. 언론은 연일 ‘조국=위선자’ 프레임에 갇혀  ‘공정’의 관점으로 보도했고 상당수 대중 또한 그러한 시각으로 ‘조국 사태’를 바라봤다.

역사 정의가 무너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회 정의를 갈급해 하는 우리 사회 현실이 ‘공정’의 이름으로 ‘조국 사태’에 불을 당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더구나 윤석열 검찰총장은 정의로운 ‘강골 검사’로, ‘공정의 상징체’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2019년 9월 28일 교대역에서 서초역으로 가는 대로변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장엄한 촛불행렬 모습(출처 : 하성환)
2019년 9월 28일 교대역에서 서초역으로 가는 대로변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장엄한 촛불행렬 모습(출처 : 하성환)

그러나 ‘조국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본 시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2019년 가을 내내 수백만 촛불 시민들은 서초동 검찰청사로 돌진했다. 검찰개혁에 반발하며 정치 전면에 등장한 정치검찰을 규탄했다.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수백만 촛불 시민들은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를 촉구하며 촛불 행렬로 권력화한 정치검찰을 성토했다.

그러나 ‘조국 사태’를 주도한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정치검찰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다. 눈 떠 보니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검찰 공화국이 탄생(?)했다. 이른바 검찰 공화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진보교육감을 공수처 수사대상 1호로 발표하자 이에 분노한 전교조 교사가 광화문에서 피켓시위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진보교육감을 공수처 수사대상 1호로 발표하자 이에 분노한 전교조 교사가 광화문에서 피켓시위하는 장면(출처 : 하성환)

어렵게 출범시킨 공수처는 진보 교육감을 수사 1호로 삼는 등 출범 당시부터 시대정신을 상실하더니 오늘날 검찰 권력을 견제하기는커녕 여전히 존재감이 없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각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검찰조직은 신뢰도가 낮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2년 사회 통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회가 꼴찌이고 검찰조직이 그다음이다. 형사사법기관 가운데 경찰-법원-검찰 순서로 검찰조직은 신뢰도 꼴찌이다.주4)

형사사법기관(경찰-검찰-법원)에 대한 국민 신뢰도 추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2021년 5월 8일) 2012년을 제외하고 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매번 꼴찌이다.
형사사법기관(경찰-검찰-법원)에 대한 국민 신뢰도 추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2021년 5월 8일) 2012년을 제외하고 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매번 꼴찌이다.

실제로 검찰은 형사사법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2012년 이후, 여섯 차례 조사에서 대부분 최하위에 속했다.

2011년 출간된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은 검찰이 왜 형사사법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최하위인지 알려준다.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은 오랜 기간 진주와 부산 지역에서 검사 스폰서 역할을 했던 사업자 정용재가 고백한 내용을 정희상, 구영식 두 기자가 정리한 책이다.

책 내용 가운데엔 검사들 술자리 회식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나온다. 글쓴이가 읽었던 내용 가운데 가장 충격을 준 ‘검사들의 술자리 즉석 막장 놀이’ 부분을 일부 인용해 본다.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한 번 하자. 여기서 자기 파트너하고 즉석 섹스를 하는 아가씨한테 2차비를 다 몰아주자. 물론 쌍방이 합의해야 한다. (중략) 이 놀이에 참여하는 아가씨는 큰 돈을 벌게 되는 셈이다. 내가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김검사가 자원했다. 그의 파트너도 동의했다. 그래서 병풍 뒤에서 옷을 벗고 성관계를 맺었다.” - 정용재 증언, 정희상, 구영식 정리(2011).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 책으로 보는 세상. 101쪽.

검사는 승진과 출세를 위해 수사를 ‘잘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검사는 인권과 공익을 위한 국가기관으로 수사를 ‘바르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인권을 옹호하고 공익을 추구하는 게 검사의 본분이자 직무이기 때문이다. 검찰조직 내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형사부 검사와 특수부 검사들 대부분은 그 본분에 충실하리라!

그러나 특수부 검사들 가운데 일부는 일탈을 넘어 권한을 남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특수부 수사가 인지수사이다 보니 실적을 올리기 위해 범죄자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왜냐하면 교도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범죄 정보가 집약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수부 검사가 죄수 출정이라는 이유로 평균 주 2회 검사실로 불러내 죄수에게 다양한 편의를 봐준다. 검사실 전화도 마음껏 이용하고 바깥 음식도 자유롭게 시켜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배우자나 연인까지 연락해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 출정 죄수는 계속된 편의와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 담당 검사에게 보답하고자 나선다. 교도소 내 다른 죄수들을 통해 사건 정보를 물어오는 것이다. 이른바 검사가 ‘브로커 죄수’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대한민국 검사는 출정 죄수의 여죄를 추가 수사해 감옥살이를 늘릴 수도 있다. 거꾸로 검사에게 협조하면 있는 죄도 눈 감아 줄 수도 있다.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제246조)은 검사에게 공소권을 부여하고 있다. 범죄를 기소해 소추할 권한을 검사만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명문화된 기소독점주의로 인해 검사의 지위는 무소불위(?)일 지경이다. 특히 뇌물수수나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패정치인과 재벌 회장의 횡령, 탈세 등 ‘거악 척결’을 다루는 특수부 검사들의 기소 독점권은 공공의 이익, 바로 대의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칼잡이’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기소와 불기소, 그리고 기소 유예라는 기소편의주의 또한 검사의 재량에 속한다. 다시 말해 검사가 죄인을 만들되 크게 만들 수도 있고 작은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으며 아예 죄가 없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나아가 죄가 있되 기소를 유예할 수도 있다.

경찰을 향해 수사를 지휘할 수도 있고 경찰 수사를 종결시킬 권한도 있다. 압수수색 영장과 사람을 구속할 영장 청구권도 있다.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검사동일체 원칙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검찰은 여전히 한몸이고 검찰조직 내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와 상명하복 문화는 여전하다.

언론에 피의사실을 흘리는 주체가 검찰일 가능성이 높은 게 우리 사회 현실이다. 그러함에도 피의사실공표죄(형법 제126조)로 처벌받은 검사는 한 명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검사의 힘은 무척 크고 무섭다. 검찰개혁이 대한민국 사회가 직면한 중차대한 시대 과제인 이유이다.

주1) 임영태(2014).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생각의 길. 184쪽.

주2) 임수빈(2017). 『검사는 문관이다』. 스리체어스. 35쪽.

<노무현 대통령 투신자살에는 언론 보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중략) 검찰은 공소를 제기하기 전 약 40회에 걸쳐 피의 사실을 언론에 브리핑했다. 2009년 3월 20일부터 2009년 5월 22일까지 두 달여 간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신문은 1,304건(조선일보 286건, 중앙일보 225건, 동아일보 282건, 한겨레신문 264건, 경향신문 247건) 방송사는 567건(KBS 214건, MBC 165건, SBS 188건)을 보도했다>

주3) 심인보 외(2021). 『죄수와 검사』. 뉴스타파. 164쪽.

주4) 『여성신문』. 2023년 3월 23일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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