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광부리, 딸

딸은 지독한 어리광부리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 으레 ‘엄마집’으로 배달시킨다. 채소나 과일은 물론 무슨 행사 때 주문하는 고기나 대게, 하다못해 영이(생후 287일) 이유식 재료까지 ‘엄마집’으로 보낸다. 뭐라고 한마디 하면 집에 갈 때 쬐끔씩 덜어갈 뿐, “먹고 싶음 ‘엄마집’ 와서 먹을게.” 하면 그만이다.

그뿐인가.
딸은 한 수 더 떠서 지네 집은 좁다고 너스레를 놓는다. 알고 보니, 아들 공부방을 차린답시고 당근에서 산 동화책이랑 책장이랑 갖은 장난감을 죄다 ‘엄마집’으로 들인다. 그러다 보니 지 오빠가 쓰던 방은 아기들 장난감으로 도배한 지 오래됐다. 인제 식탁과 찬장과 거실과 안방 구석구석 손주들 향내가 자옥하다.

눈뜨고도 못보는 당달봉사, 엄마

따지고 보면 딸의 탁월한 셈법을 따를 사람은 없을 거다. ‘엄마집’ 옆으로 이사할 때부터 알아챘어야 하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들은 그저 생글방글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뜨고도 못 보는 당달봉사가 되고, 아비는 두벌자식이 더 곱다고 코 묻은 밥도 마다하지 않는다.

딸은 수시로 ‘엄마집’에 들락거린다.
원이(생후 787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들렀다느니, 하원 길에 잠시 들렀다느니 하면서 핑계가 좋아서 ‘엄마집’에 드나드는 꼴이다. 바깥나들이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같이 가자고 ‘엄마’를 꾄다. 여의찮으면 지네끼리 나갔다가 미니족발이나 양념통닭을 사 들고 ‘함미’를 부르는 원이를 앞세우고 들이닥친다. 시장 가다가도 들르고 마실 나왔다가도 들른다.

그럴 때마다 딸은 원이를 걸리고, 사위는 아기 띠를 엇매끼고 영이를 싸매고 들어선다. 일이 있다고 들르고 없다고 들르니, 저녁은 거의 날마다 ‘엄마집’에서 먹는다. ‘엄마’랑 아비는 손주들 재롱받이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두세 시간 깔깔 껄껄 낄낄거리다가, 딸이 가자마자 ‘엄마’는 온몸이 욱신거린다면서 이내 거실 바닥에 자빠져서 눈을 감는다. 아비는 하릴없이 ‘엄마’의 종아리와 어깨를 주무르지만, 아귀힘이 예전 같지 않다. 고작 10분 남짓 헉헉거리다가 제풀에 겨워 같이 드러눕는다.

그런 딸이 하필이면 오늘, 12월 31일에 이천에 계신 시댁으로 갔나 보다. 들어보니 각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천성이 그런가? 그저 좀이 쑤셔서 바람을 쐬러 간 것이란다.

둘이 사는 집이 그러려니 하지만 유난히 적막강산이다.
여느 때라면 ‘엄마’는 주방에서 무치고 덕고 굽고 지지고 끓이느라 한참 부산을 떨었을 텐데, 저녁을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보채도 그저 시큰둥하다. 마지못해 일어난 ‘엄마’는 곰지락거리더니 금세 누룽지를 낸다. 먹던 김치 두세 가지를 펼치더니 입맛이 없을 때는 누룽지가 제격이라며 싱겁게 웃는다.

둘만 남으니 허전허다?

얼마큼 지났을까?
“허전혀... 그냥 ㅠㅠ”
며느리 사위까지 함께하는 우리 가족방에 아내가 올린 메시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 보니 ‘엄마’는 여전히 거실 바닥에 누워 있다. 지나간 손주들 영상을 들춰보며 밍기적거린다. 텔레비전에서는 연말 연기 대상 장면이 독백처럼 흐르고 사방이 막막하다. 닝닝하고 밋밋한 ‘엄마’의 속내가 눈에 보인다.

“우리가 다 있는데 왜 허전해! 에궁~~~”

딸이 먼저 운을 뗀다.
아들은 잇따라 동영상 두 편을 올렸다.

하나는 서누(생후 1,151일)가 어미랑 피자를 만들면서 재잘거리는 영상이다. 자그마한 손으로 양파랑 고기랑 치즈 등 여러 가지 토핑을 올리며 재잘거린다. 힘에 겨운지 ‘후유’ 한숨을 쉬면서도 또 만들 거라고 보챈다.

다른 하나는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면서 노래하는 모습이다. 손장단 발장단을 치면서 ‘펄펄 눈이 옵니다’를 제법 야무지게 부른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흐트러짐 없이 잘 부른다 싶었더니 한 소절을 채 끝내지 못하고 소리가 뭉그러진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까지 부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 ’씨익‘ 웃더니 과자를 꺼내 입에 문다. 허허롭던 ‘엄마‘의 눈가에 얼핏얼핏 웃음기가 번지는 듯하다.

 

우린, 허전할 새가 없을걸

구진하다.
밥은 싫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할머니랑 먹던 군고구마 생각이 났다. 동치미를 곁들였다.

허전허긴~~?
못나도 내 낭군이라잖아.
효자가 악처만 못하다고 했어.
진짜로 허전한 건 둘이 있다가 하나가 안 보일 때겠지.
하지만 우린 진짜 허전할 새가 없을 거야.
나야 당신을 추억하며 막걸리로 메꾸고
당신은 화초를 치다 보면 날이 새겠지….

제야의 종이 울리기 직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함께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낫!’

우리 둘도 뎅그렁 종을 쳤다.

여보, 우리!
아프지 말자.
아파도 참자.
아파도 웃자.
눈물 보이지 말고 웃으면서 살자.

“…….”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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