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겨울 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다.  "뭐 하시나?" 용연의 전화다. 날씨 좋으니 바람이나 쐬자 한다. 그렇찮아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는데...

"그래, 시간 괜찮으니 바람이나 쐬새"

연천행 지하철 1호선 녹양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수유역에서 4호선을 탔다. 창동역에서 하차 다시 1호선으로 환승했다. 창동역에서 녹양역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다. 

녹양역에 내리니 벌써 용연이 도착해 버스 정유장 앞에서 깜박 등을 깜박이며 기다리고 있다. 

"어디로 갈까?" "전곡으로 가세"

탄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탄월이 집에 있었다. "집 앞으로 갈테니 기다려" 하고 차를 전곡으로  몰았다. 지난해에 전곡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전곡에 도착해 탄월과 그의 부인을 태우고 초성리  '그때 그 보리밥집'  으로 갔다. 이곳에 오면 으레 들르는 보리밥집이다.

점심을 먹은 뒤 용연이 "어디로 갈까?"  물었다. 내가 탄월에게 '보개산 심원사'를 쳐보라 했다.  심원사를 검색하라 한 것은 문득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연천은 나의 고향으로 한국전쟁 전엔 북한 땅이었다. 그때 난  이곳 왕징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1949년 중학교 입학, 그때 보개산 심원사로 수학여행을 왔었다. 문득 당시 그때의 생각이 났다.

내가 생후 처음 찾은 절이 보개산(寶蓋山)  심원사(深源寺)다. 7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그 주지스님의 말씀이 생생하다.

주지스님은 우리들에게 이 산의 이름을 "보배보(寶)자, 덥을개(蓋)자, 멧산(山)자 '보개산'이라 부른다" 하며 이 산엔 보배가 덮혀 있다 했다.

헌데, 이 보개산은 원래 '영주산'으로 신라 진덕여왕 원년(657)에 영원 조사가 '흥림사'(興林寺)를 창건, 그뒤 현안왕 3년(859)에 범일 국사가 개창하여 1,602위의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태조 2년(1393) 3월에 화재로 소실되자 무학왕사가 3년 뒤인 태조 5년(1396)에 사찰을 다시 재창하였다.

이때 산이름을 '영주'에서 '보개'로, 절 이름을 '흥림'에서 '심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뒤 1907년 9월27일 의병을 토벌하려는  일제 토벌대의 공격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이때 일제에 의해 250칸 건물이 불태워지면서 심원사에 있던 1,602위의 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소실된 사찰은 일제강점기에 복구되어 1942년엔 천불전, 봉향각, 산신각, 객실, 사무실, 창고들의 건물과 부속 암자로 성주암,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이 있었다. 

연천 보개산 <심원사> 전경.(출처 : 정우열 필진님)
연천 보개산 <심원사> 전경.(출처 : 정우열 필진님)

내가 심원사를 찾았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때 주지 스님은 우리 일행을 벽화가 있는 쪽으로 인도했다. 

벽화엔 보기에도 무서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불에 태워 죽이는 그림, 기름 가마에 졸여 죽이는 그림 등등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스님은 나쁜 짓을 하면 죄질에 따라 저렇게 죄를 받는다 하며 우리들에게 착하게 살라 했다. 어린 마음에 무서워 '착하게 살겠다' 다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우리에게 해설을 해주신 그 스님이 바로 1955년 철원 심원사 지장도량을 창건한 상수 스님이시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심원사는 다시 소실되었다. 당시 주지 상수스님은 지장보살 좌상을 모시고 철원군 동송읍 상산리에 보개산 심원사 이름 그대로 따서  '심원사'를 다시 세웠다.

그뒤 2003년 연천 보개산 심원사는 발굴조사를 거쳐 극락보전이 복원되었고 2003년 경기도 기념물 제213호로 지정됐다.

이로써 심원사는 철원 심원사, 연천 심원사 둘이 됐다. 그래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연천 보개산 심원사는 안내판에 '원심원사'라 했다. 원래의 심원사란 뜻이다.

보개산 심원사는 고창 도솔암, 서산 개심사 등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지장도량'으로 손꼽힌다. 철원 신원사가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분단의 상처를 뛰어 넘어 옛 대사찰로서의 가격을 되찾아가는 듯하다.

보개산 심원사가 지장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일화가 있다. 신라 성덕왕 19년(720) 커다란 황색의 멧돼지가 사냥꾼 이순석. 순득 형제가 쏜 화살로 피를 흘리며 보개산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멧돼지를 쫓던 두 사람은 환희봉 근처 샘물 속에서 멧돼지 대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꽃힌 지장보살 좌상과 맞닥뜨렸다.  허나 아무리 힘을 써도 화살은 뽑히지 않는데다가 높이가 90cm 밖에 되지 않는 크기의 작은 석상임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속세 죄업을 구제해 주기 위해 몸을 나투신 것을 뒤늦게 알게된 이순석 형제는 참회하며 출가했다. 그 지장보살 좌상을 모신 석대암을 창건해 기도 정진했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 심원사> 명주전에 봉안돼 있는 지장보살 좌상 모습(출처 : 정우열 필진님)
강원도 <철원 심원사> 명주전에 봉안돼 있는 지장보살 좌상 모습(출처 : 정우열 필진님)

이후 한국 전쟁으로 석대암은 폐허가 되었고, 당시 주였던 상수 스님이 심원사를 철원으로 옮겨 지으면서 지장보살 좌상은 현재 그곳 명주전(明珠殿)에 봉안되어 있다.

한국 전쟁 이전엔 실제 보개산엔 멧돼지들이 많아 멧돼지를 잡으려는 수렵군이 많았다. 그때 나는 이 보개산 수렵군들이 잡은  멧돼지 피를 먹고 사경에서 회생했다. 

7, 8살 때인가 보다. 여름 어느날 매미를 잡는다고 마을 어구에 있는 오리나무에 올라 갔다 떨어 졌다. 어머니가 아들 죽었다고 통곡하셨다.

얼마 후 깨어났지만 온몸이 어혈로 멍이 들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때 어혈에 좋다는 멧돼지 피를 구해 복용했는데, 그때 멧돼지 피가 바로 보개산 산돼지 피였다.

이처럼 보개산과 심원사는 내 생애에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헌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 오늘 이곳 고향에 오니 문득 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나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신 스님, 그리고 포수와 산돼지, 지장보살!

남북으로 휴전선을 접하고 있는 경기 북부의 포천, 연천, 파주 지역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시대적 아픔을 겪으면서 넋을 기리는 추모비, 위령비, 공덕비, 공적비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많이 건립되어 있는 편이다.

이곳 신서면 내산리 보개산 산자락에 있는  항일 의병 묘역도 그중 하나다. 옛 마전군(지금의 미산면)에서 의병을 일으킨 허위, 연천 출신 연기우, 장단 출신 김수민이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3.1운동 때도 적지 않은 분들이 순국하거나 옥살이를 하였다.

오른 쪽으로 동막골 표지 판을 보고 얼마 쯤 달리니 다시 오른 쪽으로  내산리 간판이 보인다. 보개산 심원사로 들어가는 길이다.  차를 오른쪽으로 돌려 얼마쯤 들어가니 온통 길이 빙판으로 덮혀있어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다.

그때 탄월이 "위험해! 위험해!" 하면서 차를 돌리자고 한다. 용연이 차를 세웠다. 그때 앞을 보니 숲 사이로 돌탑인 듯한 석물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조심 조심 다가가 보았다.

병장 최운현 추모비다.
추모비 앞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1979.6.11 제132 야전 공병대 고 병장 최운현'이라고 쓰여 있다. 이를 보면 공병대에서 근무하던 최병장이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된 듯하다. 자세한 기록 내용이 없이 추모비만 세워져 있다.

강원도 철원 동막골에서 심원사 가는 길목에 있는 최운현 병장 추모비 안내표지판(출처 : 정우열 필진님)
강원도 철원 동막골에서 심원사 가는 길목에 있는 최운현 병장 추모비 안내표지판(출처 : 정우열 필진님)
 '1979.6.11. 제132 야전 공병대 고 병장 최운현' 추모비 전경(출처 : 정우열 필진님)
 '1979.6.11. 제132 야전 공병대 고 병장 최운현' 추모비 전경(출처 : 정우열 필진님)

추모비는 제132 야전공병대대 장병들이 세웠으며 제132 공병대대 백호는 제6공병여단(청솔 부대)의 예하부대로 연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 한다.

잠시 옷매무새를 하고 고개 숙여 묵념했다. 그때 어디선가 멧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나무가지 위에 앉아 애련하게 울었다.

대광리역 전경(출처 : 정우열 필진님)

차를 돌려 대광리역 앞에 세우고  어느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느 따뜻한 봄날 날 잡아 다시 오기로 기약하며...

오늘 심원사 지장보살 대신 뜻밖에 최병장을 만났다. 바로 최병장이 지장보살이었다. 최병장의 명복을 빌며...

 

2024. 1. 14. 늦은 밤에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수염많은 늙은이가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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