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이면 1937년 김순옥 어머니

(사진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사진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 봄날의 향연, 사랑으로 충만한 유년시절

1937년 영동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소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건 집안의 여건이 풍족했다는 반증이다. 학교 졸업후에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옥천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남편과 결혼을 했다. 시골 태생인 내가 서울 유학을 한 것은 순전히 외할아버지의 교육열과 외손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다.

2024년 우리나이로 88살이 되었다. 90년 가까이 살고있는 오늘이 나도 믿기지 않은 세월이다. 열세 살까지 동생이 없던 나는 중학교에 가서 여동생이 태어나 동생은 우리 집안의 보물이었다.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을 만나면서 사랑하는 마음은 질투와 미움이 한 톨도 없는 순도 100의 온전한 원석임을 알게 되었다. 열네 살의 나이에 그 사랑의 실체를 알았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귀한 마음을 나누는 행복을 알아차려 사람과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13살까지 동생이 없던 것은 시대상이 바로 반영된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 사이 동생들이 홍역으로 두 살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더더욱 동생의 탄생은 우리 집안의 경사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초등학교만 나와서 여느 집 딸들처럼 집안일을 거드는 일상이 당연하다고 보셨지만 옥천에서 한약방을 하시던 외할아버지께서 앞으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나를 서울 외삼촌집으로 유학 보내셨다.

외삼촌도 외할아버지께서 서울로 유학 보내고 서울에서 금융조합에 다니고 계셨다. 내가 서울여상에 입학한 까닭도 외삼촌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서울여상에 입학해 홍제동 고개를 넘어다니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서울여상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같이 4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영동에서 유학을 갔지만 포목점을 하던 집의 딸이라 생활이 궁핍하지 않아서 끈달린 검정 가죽구두를 신고 서울 친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대구, 부산, 만주 등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도 많았다. 다들 그 지역에서 방귀께나 뀌는 집안의 딸들이었다.

김순옥 님의 여고시절(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김순옥 님의 여고시절(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서울여상에 다닐 때 만주 갑부집 딸과 짝꿍이었다. 열다섯 살, 서로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두 소녀는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 3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방학내내 주고받은 편지들이 허리춤까지 쌓였고 나는 가보처럼 애지중지했지만 이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편지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연유를 짐작할 수 없다. 그렇게 앳된 얼굴의 소녀가 간직한 추억은 그리움으로만 소장하게 됐다.

방학때 고향에 내려오면 온동네 잔치를 벌였다. 먹거리를 준비하고 나를 챙겨주시던 동네 어르신들까지 온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부모님들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아서 그 사랑이 나에게까지 옮겨진 것이다.

유년시절 사랑받던 추억을 생각하면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인다. 외갓집이 옥천이라 이종언니와 여동생들이 옥천여자전수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우리는 서로 교복 자랑을 하기도 했다. 나는 서울 유학생이라 우쭐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그 시간이 엊그제 같으니 우리는 어느틈에 여기까지 왔는지 누구에게 물어도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사진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사진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 우리 인생의 풍미는 단맛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여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입사를 했다. 참하고 성실한 은행원으로 인기도 제법 많았다, 그 와중에 아버님이 옥천에서 교편 잡는 청년을 만나보시고 나의 배필감으로 적역이라고 혼사를 진행하셨다. 우리 나이 때는 결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어서 부모님이 정해주는 혼처를 운명으로 만나게 되었다.

결혼식 당일날 남편 얼굴을 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이라 안심은 했지만 그렇게 얼굴 한 번 못 본 남자와 혼인을 하던 그 시대를 살았다, 남편은 양반 집안의 자손이라 점잖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7남매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평탄하고 고운 길만 걷던 나에게 운명이 사나운 모습으로 나타나 애꿎은 장난을 걸어왔다. 남편은 성실한 교사였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속이 더부룩하다고 1년간 사이다를 달고 살더니 더 이상 사이다도 목으로 넘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한의원에 갔더니 대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해서 황급히 병원에 갔더니 위암 진단이 나왔다. 지금은 암이 흔한 병이 되기도 했고 의술도 발달해서 완치 확률이 높아졌지만 50년 전만 해도 암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연상하곤 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이었다.

다행히 수술을 하고 그냥저냥 벼텼는데 수술 후 3년 만에 재발을 하고 40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에 큰 굴곡을 만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만 7남매와 함께 남겨진 그날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회갑 때 가족 사진(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부모님 회갑 때 가족 사진(출처 : 김순옥, <옥천신문> 김경희 시민기자)

■ ‘과부’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옥죄던 시절

유년 시절부터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고단한 인생길을 걷지 않았다. 40살이 돼서야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과의 사별은 생살이 찢기는 그 이상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끝 모를 슬픔과 처음으로 직면했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출가하지 않은 자녀들이 줄줄이 남겨졌고 남은 인생의 여정도 홀로 걸어야 한다는 고독이 밀려왔다.

남편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지만 나는 다시 살아내야 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는 스스로 일상의 즐거움을 차단했다. 립스틱도 바르지 않았으며 안경도 쓰지 않았다. 예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을 거 같아 두려웠다. 40년 전의 사고방식은 여성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던 얄궂은 시절이었다. 

‘과부’라는 이름을 저울에 올리면 그 무게를 측정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 나를 성에 가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더 큰 사랑을 주었지만 아버지의 부재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실어주어서 미안한 마음도 떨칠 수 없다. 아이들이 고맙게도 큰 성장통없이 내 곁에 함께 해주어서 천군만마같았다.

40대와 50대는 <나>라는 존재가 없던 시절이다. 온전히 우리 아이들한테 모든 것을 걸었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오로지 아이들이었다. 힘들고 지친 날들도 부지기수였지만 선한 얼굴로 서로 의지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없던 힘까지 생겼다.

엄마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인내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았던 증인의 입장으로는 지금 여성들의 사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자기 결정권이 있고 혼자서도 당당한 여성들이 보기 좋다. 내가 동년배에 비해서 배움이 넓고 깊었지만 세상속에서 여성의 한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결국, 사랑이다

지금은 막내아들 집에서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늘 마음의 저울에서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우리 며느리는 내 기를 살려주느라 “어머니 여상 나오셨으니 가계부 좀 맡아주세요”라고 내 자존심을 살려주기도 했었다.

나는 나이 들어서도 치부책을 관리하는 신식 할머니 소리를 듣곤했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져서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여건이라 치부책을 손에서 놓은 지 10여 년이다. 그래도 살뜰하고 지혜로운 며느리 덕분에 나의 노년이 서글프지 않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 있고 폐가 되는 사람이 있다. 90이 넘은 지금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자식들을 불편하게 하는 노인이라고 생각이 들 땐 서글픔이 밀려오지만 살갛게 챙겨주는 자녀들을 보면 기우가 아니었나 싶다.

거동은 불편해도 아직 나를 잃지 않아서 그저 감사하다. 

집에서 은둔하는 지금이 견딜만한 건 단 한 사람도 예외일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는 간이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원천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사랑>이라고 즉답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을 우리 아이들한테 돌려주었고 이웃들과도 나누었다. 나이 들어 봉사활동을 많이 했던 까닭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정 덕분이었다. 조손 가정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봉사를 20년 넘게 하면서 몇몇의 이웃들과 모여서 호박죽을 직접 끓여서 푸짐하게 나눠먹곤 했던 추억이 인생 말년의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이 유년 시절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마음이라 특별한 명분 없이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 “나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가” 라고 했던 말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씩만 실천한다면 세상이 강퍅해졌다는 아쉬운 소리가 줄어들 것 같다.

90이 되고 보니 가족이나 이웃들이 작은 마음 하나씩만 나눠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결국, <사랑>밖에 남는 게 없다. <사랑>이 곧 사람이다. 

내 인생 이야기가 깊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이제 부두에 정박한 고요한 배의 모습이다. 이제 더 이상 드넓은 바다로 항해를 떠날 일은 없겠지만 잠잠해진 바다 위로 유유자적 날아다니는 갈매기떼를 보는 것과 같은 그 안식의 시간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호사다.

오늘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거친 바다와 싸우고 귀환한 승전병의 미소를 띄고 있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 그녀가 나에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매화같은 승전병이라고 과분한 칭찬의 말을 건넨다. 여한이 없다는 말로 화답하고 싶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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