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덟 해를 사는 동안 매순간 쓰러지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신 어르신. 이제는 넘어질 일도 일어설 일도 없으시다. 요양병원에 계신지 365일, 거동조차 어려운 여건이라 차라리 뼛속의 진액까지 빼내가면서 살던 시절이 그립다시던 이슬맺힌 눈동자를 기억한다. 어르신의 인생에도 우리 모두의 삶에도 힘이 되는 시 한 편 읊조려본다.


<김종삼 님의 ‘어부’ >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있다고

■ 1950년 가을, 그날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마음속에 화인처럼 남은 그날의 애통함을 잊을 수가 없다. 강원도 고성에서 최씨네 김씨네가 남으로남으로 내려왔다. 포천 즈음에서 며칠간 숨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가족 8식구, 이웃가족 9식구가 한 가족이 되어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찐감자, 주먹밥, 약초뿌리 등을 먹으며 끼니를 떼우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외에는 삶의 방도가 없던 시절이다.

한낮의 햇살은 우리의 고통과는 전혀 무관한 채 얄미울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따사로운 햇살이 내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변소 문을 열고 나오던 나는 다른 세상을 목격하고 말았다. 푸른 옥수수밭은 온데간데없고 붉은 옥수수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식구들이 기거하던 허름한 천막도 자취를 감추고 피란민들의 비명만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탄식 섞인 울음소리, 땅을 치고 통곡하는 소리, 아 그래 수류탄이 터졌다. 어찌 된 연유인지 이유는 몰랐지만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가족을 다 잃어버렸다. 옥수수 대 위에 걸쳐진 엄마의 붉은 광목 저고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떨어져 나간 팔뚝, 아 생각만 해도 숨을 쉴 수가 없다.

7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무수한 세월 속에서 나도 치매를 만나 지난 기억들과 차차 이별하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은 옅어지지 않는다. 가족들을 따라 죽겠다고 몇 날 며칠을 울던 계집아이는 그 후로 70여 년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냈다. 그날 살아남은 기적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 기적처럼 다시, 또 가족을 만나다 

혼자 남은 열세 살 꼬마는 하늘 아래 피붙이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같이 피란 오던 이웃집 아저씨께서 “순희야, 이제 우리 식구 하자. 밥은 굶기지 않을 테니 식구들 몫까지 잘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의지할 곳 없던 나에게 이웃은 구세주였고 나는 그 집 식구가 되어 내내 살아왔다.

대구까지 내려갈 생각으로 남으로 내려가던 우리는 영동에서 자리를 잡고 아저씨와 아줌마는 순대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일을 돕는 것은 당연한 나의 몫이었고 게으름피우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식구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덜 먹고, 더 늦게 잠드는 게 내가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천애 고아 천덕꾸러기가 되어 전쟁통에 어떤 모진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나에게는 거둬주신 은혜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저씨 아줌마에서 어머니 아버지로 모시게 되면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뼈저리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살면서 수많은 기적과 만났고 물론 누군가는 당연한 일상이라고 말한들 흠잡힐 일이 없지만 나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온통 기적과 감사였다.

부모님 순대국밥집일을 돕고 언니들 결혼하면 산후조리도 해주고, 오빠의 공장일도 남자들 못지않게 도왔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내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릴수 있는 일이었다. 

오빠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트럭 기사로 일하던 성실한 남자를 만나 스물두 살에 결혼을 했다.

옥천 촌사람이었지만 뚝심 있고 착한 남자였다. 평생 나를 지켜주리라 약속하며 구애를 하던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니는 당신 배 아파서 낳은 딸 시집보내듯이 알뜰하게 챙겨주셔서 시집가는 날이 설움을 풀어내는 날이었다.

동이면에 살림집을 구하고 4남매를 낳아 나도 가족을 만들어 살아가는 재미에 빠질즈음 참으로 야속한 일이 또 내 운명 앞에 나타났다. 남편이 트럭기사일을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운전하는 모습이 내내 조바심 났는데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가혹한 운명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참담한 마음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내 나이 마흔 살, 큰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줄줄이 4남매를 두고 닥친 남편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몰래 밤새 울고 퉁퉁부은 눈으로 아침에 양은 도시락을 건네면 우리 큰딸이 아무말 없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에게 눈인사를 했다.

엄마의 설움을 알기는 했을까? 그래도 우리 큰딸 교복 입고 학교 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면 힘이 솟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큰딸이 동생들 대학 보내느라 정작 본인은 대학을 포기할 때 가슴이 미어졌지만 혼자서 아이들을 챙길 자신이 없어서 같이 눈물 흘리는 방법 외에는 엄마로서 해줄 게 없었다. 야속한 시절이었다.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듯이

남편을 선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가혹한 운명에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내가 약해지면 우리 아이들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 다시 기적처럼 소생했다. 그렇게 살아가니 또 살아지더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듯이.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뒷모습을 자녀들이 보고 우리 4남매는 내가 뿌린 씨앗보다 훨씬 큰 숲으로 성장했다. 

작년부터 기억이 희미해지고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돌아가면서 나를 찾은 우리 아이들 덕분에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세상이 살만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락으로 떨어져도 기적처럼 소생하게 만드는 자연의 섭리는 살면서 수시로 맛보았다. 그 섭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억울하고 당장 목숨줄 끊고 싶은 날들이 없었다면 그 또한 거짓이다. 내 성정과 노력에 상관없이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한마디씩 거들겠지. 

단 한 번도 여인으로 코티분 냄새를 풍겨보지 못했고 거울 앞에서 빨간 입술연지 한번 발라보지 못했다. 그렇게 여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었지만 아내로 엄마로 할머니로 살아가는 인생이 서글프지 않다.

기적처럼 나를 지켜준 고마운 이들이 잡아준 손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다.

한동안 영하를 맴돌 수은주, 요양병원의 온도도 차갑겠지만 나를 지탱해 주는 우리 가족들이 있어 또, 이렇게 기적 같은 하루를 맞이한다. 살아보니 살아지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큰 딸 미정 편지>

저 고등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영신이 엄마가 “미정아 이를 어쩌냐” 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 우셨어요.
무슨일인가 너무 놀라서 여쭈었더니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병원으로 달려가보니 엄마가 찬 바닥에 앉아서 통곡을 하고 계셨어요
그제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했어요.
그때는 너무 슬프고 무서웠어요. 

마음속으로 이제 어떻게 살까 두려웠는데 
엄마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거 보면서 저도 동생들을 달래고 
우리는 정신을 차린거 같아요
밤새 엄마가 혼자 속울음 삼키는거 다 지켜봤어요.
대학포기하면서 속상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우리 식구들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후회없어요.
덕분에 고등학교 나와서 면사무소에 취직하고 면서기 만나서 
지금은 퇴직공무원 아내로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네요. 

엄마를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요양병원에 계시게해서 너무 죄스럽지만 
미연이랑 번갈아 가면서 매일 찾아뵐게요.
고맙고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 
이제 우리가 있잖아요 힘내시고 더 큰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지금 이대로만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엄마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리고 자랑스러워요.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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