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인식 이원면(1937년~)

내내 같은 말을 되풀이하신다.
“우리 식구한테 못해준 게 한이 돼”
그 시절을 지나온 어르신들의 소회가 회한으로 얼룩진 것은 누구나 예외일 수 없다. 시대와 환경의 여건 속에서 뜻을 펼치기도 어렵던 시절. 속앓이 하느라 오히려 가까운 가족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던 그때가 한스럽다고 넋두리를 하신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고단함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지만 아버지 등의 짐은 누가 나눠 지어 줄 것이며 남몰래 흐느끼던 울음은 누가 달래줄 것인지. 어르신의 손 한번 꼭 잡아드리며 마음을 나누었다. 평정심을 찾은 어르신이 의외의 촌철살인 한마디 건네주신다. 
‘회한은 깊지만 나이든 지금이 오히려 삶의 큰 기쁨이 있지. 인생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으니 새털처럼 가벼워’

밭 한쪽에 옮겨 심은 개복숭아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출처 : 한겨레21 전종휘 기자 2022년 8월 28일)
밭 한쪽에 옮겨 심은 개복숭아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출처 : 한겨레21 전종휘 기자 2022년 8월 28일)

■ 비상을 꿈꾸던 小邑(소읍)의 청년

우리 고향은 복숭아 과수원이 유난히 탐스러웠던 곳이다. 유년시절에는 강청면에 살았는데 북숭아 농사를 많이 지었고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봄에는 복숭아 꽃잎이 흐드러져 탄성을 자아냈는데 대문밖만 나가면 지천에 피어있는 복숭아 꽃 귀한 줄은 몰랐다. 곁에 있는 존재의 가치를 귀히 다루는 법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자연의 섭리인 양 고향마을도 그러했고 우리 식구에게도 늘 곁에만 있을 줄 알고 데면데면 했던 나를 반성하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에서 잠시 일을 하다 경기도 포천으로 군대에 다녀왔다. 태어나서 가장 멀리 가본 곳이 포천이었다. 촌사람이라는 말이다. 

8남매가 코딱지만한 과수원 땅으로 먹고 살려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서 나는 일찌감치 객지로 나가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우선 고향을 떠나 외가가 있는 괴산으로 갔다. 비등비등한 소읍으로 터전을 옮겼더니 별반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가진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젊은 나에게 돈 벌 거리가 주어질리 만무했다. 나는 면에서 사환 노릇한 이력이 있어 괴산에서 다시 면서기로 일하게 됐다. 고향을 떠났지만 내 인생은 달라진 게 없었다.

 

■ 영사기 돌리는 면서기로 

면에서 영사기사로 일하면서 끼니 걱정은 안하게되어 상사분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영사기를 들고 이마을 저마을 다니면서 영사기를 돌렸다. 당시만 해도 시골마을은 문화혜택을 받기 어려워서 영화를 보는 일이 시골사람들에게는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1년 예산을 지원해주고 우리는 필름을 사서 마을을 다니면서 영화를 틀어주었다.
마을 운동장이나 노인정, 면장 집 앞마당에서 영화를 보여준다. 근방 1키로 거리에서는 다들 모여서 영화를 봤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앉아서 노천영화를 보고 처녀총각이 모여서 서로 눈이 맞기도 했다.
영화에는 관심없고 영사기사들이 중매쟁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때 인기좋던 영화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였다. 신영균, 김지미, 김희갑 등이 유명배우였다.

김지미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은 여배우였다. 영화가 돌아가면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김지미는 시골 사람들에게 꿈속에서나 만날 여인이었다. 내 눈에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아름다웠다. 

끼이끽 거리며 돌아가는 영사기 앞에서 웃고 울던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나도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에게도 지금의 날이 올 것이라는 짐작도 못했던 지난 청춘의 시간이 있었다. 

작은 것에도 신기해하고 눈빛이 반짝이던 우리들, 지금은 어지간한 자극에는 눈하나 깜짝을 안하니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이 나이가 되도 알수가 없다.

 

■ 다시 고향으로, 가족의 우환을 온몸으로 받아낸 아내  

영사기를 돌리며 사람들이 울고 웃는 희비가 엇갈리는 그속에서 나의 사명이 있을까 했지만 나는 면서기로 정체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괴산에서 결혼을 하고 4남매를 낳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형님들과 포도 농사를 지었고 농사꾼으로 살아볼 요량이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고 땀 흘린 대가를 반드시 돌려준다. 과수 농사만 해서 언제 돈이 될까 싶어 한눈을 판다는 생각이 아닌, 돈 벌어볼 구상으로 다른 작물도 손을 대었다.  

묘목장사 누에농사 안해본 것이 없었다. 돈이 될만한 것들은 손을 다 대어 보았지만 한 우물을 팔지 않아서인지 돈을 벌리지 않았고 안사람 고생만 주야장천 시켰다.

고향으로 돌아와 편찮으신 아버님 병수발을 아내가 12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요양시설이 부재해서 아내는 4남매 뒷바라지 하며 시아버지 병수발까지 매일 몸이 녹초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맏며느리라는 올가미가 아내를 옥죄고 아내는 시아버지의 병수발 아니 변수발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저러다 안사람이 먼저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즈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98세에 돌아가셨다. 다들 호상이라며 위로했지만 아내의 12년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나는 아버님 돌아가신 자리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애통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눈물 없이 상여 뒤를 따랐던 까닭은 아들 노릇 할 만큼 했다기보다 아내의 진땀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 대학보내 놨더니 데모하느라 늘상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경찰한테 쫓겨다니며 집에는 형사들이 대문밖에서 진을 치고 우리 안식구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제 그 아들이 그래도 정신차리고 대처에 나가 장남 노릇 잘 하고 있다. 한때 정치의 꿈도 가졌지만 밀어줄 형편도 안되고 그 길이 고난의 행군인 것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라 스스로 포기하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정착했다. 녀석의 안타까움은 애비인 나도 짐작할수 없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꿈만 쫓기에는 둘러봐야 할 주변이 많다. 

그래서 우리 삶은 늘 숙제를 안고 고민하고 궁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들 틀린 해석도 아니다.

복숭아 농사로 몫돈 좀 만지는가 싶었을 때 평범한 사람의 삶을 평가절하했던 나는 큰돈 벌어보겠다고 주식에 손도 대어보고 진득하니 기다려야 하는데 주가가 올라가면 그새를 못참고 내다 파느라 주식시장에 복숭아 판돈을 다 갖다 바쳤다. 결국 휴지조각된 주식을 보면서 통한의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식구들의 모든 우환은 아내가 고스란히 다 받아내었다. 우리는 사고만 치고 뒤치다꺼리는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가슴 졸이고 위장병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10년 전에 파킨슨병이 와서 서서히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왼쪽 편마디가 오더니 손을 못 쓰고 내가 밥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여야 했다. 그것도 하루이틀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아내를 요양병원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병수발 들던 아내를 병원으로 보내는 날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도 위암 수술을 받고 난 후라 아내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평생 아들, 시아버지, 남편 뒤치다꺼리 하다가 본인 병구완은 가족에게 맡길 수 없던 아내에게 미안하고 속상해서 나는 바로 죄인이 되었다. 

인생이 끝없이 허무하고 재작년에 아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나에게 안겨진 아내를 보자 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픔, 이별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슬픔이다.

 

■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아내를 보내고 혼자 고독하게 지내다보니 나의 거동이 자녀들의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자녀들에게 신세 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옥죄면서 일상이 오히려 더 피폐해졌다.

다시 혼자만의 일상에도 적응하고 어려울 때는 자녀들에게도 기대면서 살아보니 삶의 수레바퀴가 오히려 잘 굴러갔다. 불편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니 노년의 나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젊은 시절에는 큰돈도 벌어보고 싶고 남들처럼 폼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부도, 명예도 운명에 있어야 하는 법. 凡夫(범부)로 살면서 안위해야 했는데 헛된 욕심 꿈꾸느라 마음만 상했던 젊은 날의 그림자가 있다. 

이제 노욕이 없는 지금이 그저 평안하다. 이제 몸을 세월에 맡긴다.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나를 데려가는 대로 따를 것이다. 순리에 따르는 삶이 이토록 가볍고 행복한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이제 다산 정약용이 썼던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이 마음에 딱 와닿는 그때를 만났다. 비록 손에 쥔 것은 없으나 자연의 섭리대로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억나는 문구를 떠올려보면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둥머리를 예찬하고,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 치통이 없어졌음을 즐거워하고, 귀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시비 다툼을 듣지 않게 됨을 노래한다고 했다. 

노쇠한 신체를 해학으로 받아들이는 시를 읽으며, 꼭 유쾌하고 기쁜 일이 있어야만 즐거운 것은 아님을 생각해본다. 

지금의 나도 비록 거동은 불편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의 밤을 보내는 노인이지만 이제 노욕 없이 나이든 나를 인정하는 일상의 고요를 맞이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언제든 먼저 간 마나님을 만나러 가도 아쉬울 것이 없는 ‘지금’이 가장 기쁠 때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 유쾌하게 한마디 던질 것이다.

“나는 인생의 숙제를 다 끝내고 양 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webmaster@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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