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해 여름 "민중은 개·돼지"라는 한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발언은 평범한 시민들의 머리와 몸을 깨우는 죽비가 되어 돌아왔다. 이만하면 세상은 많이 좋아졌다고 여기며 하루하루 버거운 삶을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게 나라냐”고 자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백만 개, 천만 개의 촛불이 모이자 시민이 주인인 세상이 열렸다. 

지난 3월말 취임한 이상직 ‘문화공간 온 협동조합’ 이사장도 광화문 촛불 하나를 보탠 평범한 시민이다. 대학 나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기업에서 샐러리맨으로 평탄한 청춘을 보냈다. 나름의 방식으로 바르게 살려고 애써왔지만 그런 그의 한쪽 가슴은 늘 무거웠다.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억울하게 고통 받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희생한 많은 분들에 대한 부채감이었다. 그가 한겨레 창간 주주와 주주통신원이 된 것도, 무보수로 온갖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시민이 주체가 된 사랑방 키우기에 몸을 던진 이유도 바로 이것이리라.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해 보이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사장 취임 8개월이 되었다. 소감은?
=초기에는 ‘감당하기 쉽지 않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사장을 맡겠다는 결심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측면을 생각했다. 일 자체의 가치와 나 자신에게 유익한가다. 박근혜 정권의 패악이 극에 달해 희망이 사라져가던 2015년말 한겨레 주주가 주도하는 시민사랑방을 만든다는 소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시민이 주체인 어울림 문화공간을 위해 일한다면 이보다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나이 60살이 되면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고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60년은 운 좋게도 굴곡 없이 우리 사회의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삶은 ‘되돌려 주는 원년’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경제활동을 최소화하고 남은 여생은 보람있는 일을 하자. ‘문화공간 온’ 일이야 말로 나의 제2기 인생에 딱 맞는 일이다.

▲ 이상직 문화공간 온 협동조합 이사장

-‘문화공간 온’은 어떤 곳인가
=‘문화공간 온’의 정체성이 좋다. ‘품격 있는 시민 어울림 문화공간’.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가 밀려나고 이명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데는 시민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다. ‘분열’이 왜 일어나나 보면 서로 명분싸움에 몰입해 열린 태도나 상대에 대한 예의나 배려는 없고 그저 상처주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의 가장 큰 약점이 타협과 배려의 부족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문화공간 온’은 다른 것 같다. 조합원 간 다소 이견도 있지만 그것을 잘 조화해나가는 걸 보면서 역시 우리는 다르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쉽게 충돌할 수 있는 SNS 공간에서도 대화가 뜨거워지면 서로 자중하며 물러서는 모습이 우리의 미덕이 되었고 이런 점이 자랑스럽다. 진정한 품격과 어울림은 이런 서로의 배려에서 나온다.

-이사장이 된 인연은
=한겨레 주주통신원들이 주도해 서울 종로 한복판에 시민사랑방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뻤다. 특히 종로는 나의 청년 시절 생활공간이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란 교훈을 새기며, 지금은 정독도서관이 들어선 경기중고등학교 6년 재학 중 인사동 골목, 화신백화점, 신신백화점, 한일관, 종각, YMCA, 탑골공원, 조계사, 낙원상가를 지나 등하교 했다. 온이 생기고, 3층 유리창 밖에 보이는 인사동 골목 풍경만으로도 자연스레 옛 추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만남의 공간으로 많이 활용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거의 매일 만날 사람들과의 약속 장소를 온으로 했다. 약 1년 만에 행사 유치 포함 지인 연인원 2000명 정도를 온에서 만났다.
온을 거의 매일 오다보니 경영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도 생겼다. 지리적 위치의 장점과 만족스런 내부시설과 인테리어에 비해 메뉴의 한정성, 영업시간 불규칙 등 미흡한 점도 보였다. 이런 관심 덕에 고객유치, 식단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이사장 후보 추천을 받았다. 당시 여러 곳에서 중요 임원을 맡고 있던 중이라 수락할 여력이 안 되었지만 온이 제대로 자리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후보 수락했다.

-이사장 취임 후 본 온은 어떠 상황이었나
=이사장이 된 후 가장 먼저 재무상태를 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운영자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연초부터 적자를 면치 못 하고 있었다. 조합원 관리는 둘째 치고 주방인력, 홀서빙, 예약 시스템 등이 잘 안 갖춰져서 늘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이사장 제의를 거절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건강 문제로 중도사임한 김태동 이사장님을 대신해서 이요상 상임이사님이 이사장 직무대행을 맡는 등 상근자들을 중심으로 분투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지만 여러 부족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었다.

-경영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경영, 마케팅의 성공 요건은 ‘재구매’가 되느냐다. 맛있는 식사 메뉴, 질 높은 서비스, 고품질 문화콘텐츠가 있으면 당연히 방문자들이 온을 다시 찾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함께 몰고 올 것이다. 입소문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없다. ‘다시 찾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 내겐 가장 중요하다. 모든 경영적 판단은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 이상직 이사장이 '문화공간 온'에서 봉사하는 조합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8개월의 성과는
=지난 8개월이 내겐 몇 년 같은 시간이었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직접 주문도 받고 서빙도 하고, 무대음향 설치도 하고, 쓰레기도 갖다 버렸다. 온에서 이사장은 명예직이 아니다. 상머슴 자리다. 상머슴이 솔선해서 움직이면 모두가 움직인다. 산적한 과제를 신속하고 힘 있게 추진하기 위해 지난 8월 주요 임원이 참여한 경영혁신TFT를 꾸렸다. 매주 회의를 통해 주요 의사결정사항을 신속히 집행했다. 덕분에 많은 미비점을 보완했고 곧 영업 실적으로 나타났다. 이미 지난 5월부터 영업이익이 플러스를 유지하고 있고, 평잔 1000만원을 확보했다. 이제는 돈 걱정이 아니라 밀려오는 고객의 요구를 얼마나 잘 맞추나에 전념하고 있다. 연말까지 단체예약도 빽빽하게 잡혀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세 가지 정도다. 먼저 ‘문화공간 온’은 말 그대로 문화가 있는 공간이다. 최근 ‘손바닥 자서전 워크숍’,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생겼다. 온의 성격에 맞으면서도 차별적인 문화프로그램 개발이 더 필요하다. 얼마 전 꾸린 문화기획팀에서 방향을 잘 잡고 있다. 
다음으로 새로운 사업 영역의 개척이다. 온은 음식점 사업이 아니다. 어울림을 위해 먹을거리가 있어야 한다. 음식이 문화이기도 하지만 온의 가치를 확대하고 성장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도 구상해야 한다. 온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협동조합이니 이익 확보도 중요하다. 이익은 조합원에게 가지만 결국 온의 발전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끝으로 조합원과의 유기적인 관계 도모다. 온을 시작하고 조합원에 대한 면밀한 관계관리가 안 되고 있다. 매장에 주력하다보니 생긴 틈이지만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니 조합원 네트워크 형성에 주력하려고 한다. 다 아는 것처럼 우리 조합원의 맨파워는 우리나라 최강이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할 사무 공간이 필요해 얼마 전 온 4층에 조합사무실을 얻었다.

-대기업 고위 임원을 지냈다
=대학 졸업 후 공군학사장교로 복무했다. 제대 후 대기업 H그룹 정유회사에 다녔다. 인사부장, 영업부장을 거쳐 임원인 기획실장을 했다. 그때 IMF를 맞았다. 우리 사업부는 매각대상으로 경쟁사에 넘어가게 되었다. 구조조정이나 매각 등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대상자들 모두 극심한 불안과 고통이 따른다. 이 와중에 사용주와 직원들 간의 불신은 극에 달한다. 800여 명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경쟁사로 팔려가는 상황에서 나는 “그룹에 남아있으라”는 경영진의 권유를 만류하고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직원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직원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마쳤다. 혼란과 불안감을 진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했고 곧 안정을 찾았다. 이후에는 100여 명의 직원을 친정회사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나의 능력을 그룹에서 높이 평가했다. 2년도 채 안 되어 친정회사 그룹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대기업 보험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파업이 발생했고 나의 중재 노력에 공감한 노조와 잡음 없이 협상 타결했다. 

-은퇴 후의 삶은 어땠나
=경제활동을 멈추진 않았다. 선배 소개로 작은 회사의 총괄임원을 맡기도 했고 직접 사업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2년 평소 관심 가졌던 ‘코칭’ 자격증을 땄다. 살아온 이력에 더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코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해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봉사활동 많이 했다. 그해 가을 ‘아름다운 울타리’라는 북향민 코칭 단체를 알게 되었다. 코칭 자격증 있는 분들이 주도해 만든 북향민 정착 지원하는 곳으로 정부 보조 없이 순수한 민간 후원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국가에서 지원 받아 운영하는 북향민 지원 단체는 많지만 일부 북향민들은 이들 단체가 “돈만 뜯어낸다”는 불신이 있어서 오히려 순수한 아름다운 울타리가 좋다며 찾는 북향민이 많다. 

▲ 손녀와 단란한 시간

-‘아름다운 울타리’와의 인연은?
=‘아름다운 울타리’는 간단히 표현하자면 ‘북향민과 함께하는 전문코치들의 모임’이다. ‘탈이념, 탈종교, 탈정치, 탈영리’를 표방하고 2013년 실향민, 선교사 등 몇 분 코치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북향민들이 남한 사회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이용당하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착을 돕고 그들 스스로가 코치가 되어 북향민의 정착을 돕도록 함께 노력하고 있다. 내가 이곳을 안 건 그해 가을이다. 한 코치님의 소개로 이 단체가 주최하는 북향민 세미나를 참석하게 되었다. 얼마 후 단체의 요청으로 운영위원을 했는데 2014년 말부터 회장을 맡게 되었다. 현재 120여 명의 회원이 있고 코치가 70명, 북향민이 50명 정도 있다. 정부나 단체로부터 지원을 안 받기 때문에 회원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후원금 만드는 일은 회장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코칭’을 통해 얻은 건 무엇인가
=코칭은 삶을 살아가는데 지혜로운 길을 찾아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람들은 모든 관계에서 해법을 남 또는 상대방에게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자신 안에 있다. 코치는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법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돕는 일을 한다. 그러니 코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 ‘배려’, ‘신뢰’다.   

-한겨레 창간주주다
=창간주주이자 주주통신원이다. 한겨레가 창간할 즈음 대기업에 근무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었다. 한 달치 봉급을 한겨레 창간 기금으로 넣었다. 당시만 해도 기업에 있으면 한겨레를 지지한다는 말을 쉽게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70,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많은 분들께 늘 마음의 빚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 빚을 덜고 싶었다. 한겨레 주주로 참여했지만 전교조와 기타 여러 사회봉사단체에 후원금도 꽤 냈다. 

-한겨레와 시민사회에 바람이 있다면
=한겨레 창간은 또 하나의 신문사가 생겼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겨레는 87년 6.10시민항쟁의 산물이다. 현대민주주의사의 아이콘이다. 시민이 주인인, 시민의 권익을 지키고 확장시키는 담론의 광장이다. 시민의 담론은 시민의 참여 속에 한겨레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마당이 바로 ‘문화공간 온’이다. ‘문화공간 온’은 시민의 것이다. 이 시대의 주체인 ‘시민’과 시민의 언론 ‘한겨레’가 우리 문화공간 온을 더 많이 이용하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품격 있는 시민과 한겨레가 연대하면 세상이 바뀐다.

이동구 에디터(인터뷰어)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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