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아시아 미래 포럼 참관기 (4)

다니엘 블레이크와 최고은(작고)

“나는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아니며 국민보험번호 숫자도 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서 내 의무를 다 했으며 자긍심을 느낍니다.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누구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5, 영국)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런던에 사는 소시민이다. 평생을 목수로 살았던 그는 오랜 지병 끝에 아내가 죽자 모아둔 돈 없이 노년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하지 말라는 의사의 진단과, 실직 수당을 타려면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는 실업보험 관리들이 서로 서류를 떠미는 사이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 모르고 헤맨다. 컴맹인 그에게 갖가지 서류와 통과의례는 너무 힘에 겹고 전화는 늘 자동안내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담당과 직접 통화를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 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이 벽에다 항의글을 쓰고 농성을 하고 있다.

매일 관공서를 드나들며 자신을 거지 취급 하는 관료들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싸우다가 결국 마지막 질병 판정 심사를 기다리던 관공서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편지는 그가 심사관에게 보여주려고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장례식장에서 낭독된 유서가 되고 말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민의 한 사람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나를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부르짖었다. 나는 당신들에게 자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 온 시민으로서의 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나를 존중해 달라…..고

영화에서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두 아이를 데리고 런던으로 온 케이트라는 여성도 등장한다. 그녀는 정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다리다 무일푼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매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경악할 만한 내용의 영화는, 한때는 유럽에서 가장 복지가 잘 완비되어 있다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영국의 실제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 두 아이와의 굶주림 때문에 매춘에 나선 여주인공(영화의 한 장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이 말은 사회복지가 어떤 개념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인류에 회자 되는 문장이다. 온 세계가 영국의 이 개념을 따라 잡으려고 복지에 힘을 쏟았으며 영국을 모델로 삼아 그 기준에 맞추려고 애를 써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현재 영국이 처한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의 보수적 복지는 더 이상 세계인들의 희망이 아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생존만을 충족시키면 되는 복지개념을 받아 들이고 만족해왔지만 이제 하나의 조건이 더 추가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그것은 다니엘이 “나를 존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듯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중 받는 권리 개념이다. 국가가 수혜 대상에게 복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당당한 권리로서의 분배(복지)를 말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국가가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적인 복지의 개념이 아니라 시민이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가져가는 보편적 분배의 개념이다. 국민들은 누구나 스스로의 존엄성에 상처받지 않고 자신의 몫을 당당하게 가져갈 수 있다. 늙었던 젊었던, 재벌 회장이던 실업자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균등하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하며 살 수 있는 공동체의 안전장치이다.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 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 고 최고은 작가의 인터넷 사진 캡쳐

창피함을 무릎 쓰고 쪽지를 문에 붙였건만 무명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녀는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아프리카도 아니고 보릿고개 시절도 아니고, 자가용 없는 서민이 없다는 대한민국에서 밥 한 그릇을 못 먹어 굶어 죽은 것이다. 과연 32살의 그녀가 밥 한 그릇을 만들 능력이 없어서 굶어 죽었을까? 당시 온라인에서는 ‘그렇게 친구가 없냐’ ‘가족들은 뭐 한거냐’ 등등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그녀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이 기력이 소진할 때까지 지키고 싶었던 자신만의 존엄성이 있었다는 것을 …..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자선을 구하고 싶지 않다 ….. 급기야 그런 강고했던 자존심마저 포기했지만 ….. 이미 때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자존심은 삶에의 강한 열망만큼 소중했던 것이다. 그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인 한국예술종합대학 영화과를 졸업할 만큼 열정이 있고, 영화화 되지는 못했지만 5편의 시나리오가 본선에 올랐을 만큼 재능도 있던 한 예술인이 복지 사각지대에 빠져 굶어 죽은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무상급식과 기본소득

처음 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할 때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그 논리는 또한 2017년 현재 대한민국의 제1야당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금까지도 주장하는 바와 같다. 그는 결국 경상남도 도지사 시절 경남을 무상급식이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부자집 애들까지 무상으로 급식하는 것은 오히려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급식비용을 낼 수 없는 아이들만 선별하여 무상급식을 하고 남는 재원으로 급한 복지에 써야 한다.”

일견 맞는 논리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논리에는 사람이 안 보이고 오직 계산기만 보인다. 선택적 무상급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40명 한 반에서 3명만이 무상급식을 받겠다고 응답했다. 형편이 아주 어려운 학부모들조차 아이들이 받게 될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선별 급식할 경우 무상급식을 신청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은 먹고 사는 생존문제만큼 자존심의 문제에도 기본권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나는 내가 국가에 기여한 만큼 혹은 앞으로도 기여할 만큼의 대가를 국가로부터 받아야겠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나의 권리이다….라는 것이다.

▲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 공동대표 가이 스탠딩 교수

이번 8차 포럼의 세션6에서 발제를 했던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양재진 교수의 기본소득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대동소이한 의견을 피력하여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기본소득은 기본권일 수 없고 정의롭지도 못하다.”

충당할 재원이나 시행시기에 대한 논란이 아니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과연 기본소득은 정의롭지 못한 것일까? 더 들어보자.

“여가(생산력의 향상으로 인한 잉여시간)를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향유해야 하는 기본권의 목록에 넣기는 힘들다. 여가를 지탱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기본소득은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착취가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착취……. 이쯤 되면 경악할 만한 문제의식이다. 시민 기본권에 대한 개념이 근대국가의 관료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무리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계속)

편집 : 안지애 부에디터, 이동구 에디터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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