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민족인가?

 잠시 1화 2화 3화를 돌이켜본다. 역사학자들은 낙랑평양설과 낙랑요동설로 나뉘어 대립한다. 그러나 1화에서 낙랑은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일찍이 기자箕子에서 비롯된 유교를 전파하는 선교단이었다. 낙랑이 중화(유교)문명의 첨병이라면, 2화에서는 그에 대항하는 우리의 ‘유화문명’을 이야기하였다. 우리 민족의 정체를 담아낸 주몽신화―유화부인이야기―는 놀랍게도 <햄릿>과 같은 서사였으니, 제3화의 단군신화는 다시 한 번 자유민족의 영혼을 보여주었다. 웅녀의 사랑할 권리, 유화부인의 결혼할 권리를 기억Renaissance하는 것이 단군신화 주몽신화다. 일연은 말한다. 웅녀와 유화부인의 결혼할 권리를 빼앗아간 공자왈맹자왈을 매질하라. 단군은 말한다. 중화의 동굴을 탈출하라. 주체를 회복하라. 중화는 자꾸만 인간을 동굴에 가두고, 유화는 동굴을 탈출한다. 우리가 탈출하려 하였다면, 가까운 이웃 중국인들 역시 중화의 동굴을 탈출하고자 시도하였을 것이니, 이제 동북아역사의 ‘엑소더스’를 주목하라.

 

{…위만[滿]이 (중국에서)망명한 까마귀들[黨]을 회유하여 까마귀무리[衆]가 점차 많아지자 마침내 계략을 꾸며 사람을 보내어 준準왕에게 “한나라 병사들이 열 길로 들어온다.” 고하고는 숙위宿衛를 자청하여 들어가다가 별안간 돌아서서 준準을 공격하였으니, 준準(표준)이 만滿(충족)을 대적[與]하여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장차 그 좌우궁인들이 바다[海]로 도주하여 획일의 물[海=每水 문화]을 매몰[入]하고 한韓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으니[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위략에 이르기를, 그 아들들은 자기 조상[親]이 나라[國=韓]에 미쳤다[留]는 점을 각성[及]하여 성姓을 일으켜 '한씨韓氏'라 모칭[冒]하였다. 표준[準]이 지배[王]하던 바다의 중국(한반도)은 조선(위만조선)과 대적[與]하지 않고 왕래를 숙원[相]하였다.[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그 후손[後]이 절멸하였으나 지금도 한인韓人들은 풍요[有]를 지향[猶]하며 그 제사하는 자를 받들고 있다.[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삼국지」위서魏書 동이전 ‘한韓(馬韓)’편의 일부분이다.

첫 번째 주목해야 할 것은, ‘기자조선 vs 위만’의 전쟁을 ‘표준[準] vs 충족[滿]’이라는, 바꾸어 말하면 ‘중화[準] vs 유화[滿]’의 대결로 환원하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한韓’ 내지 ‘마한馬韓’의 내력이다. 위만에 의하여 축출된 기자조선의 지배세력은 바다 건너 한반도로 가서 중국의 전국칠웅 중 하나인 ‘한韓’의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한韓’의 이름을 사칭한 이유 “자기 조상[親]이 나라[國=韓]에 미쳤음[留]을 각성[及]하여”는 곧 중국의 ‘한韓’이 단군[親]의 DNA를 물려받았다는 말이 아닌가. 왜 중국의 ‘한韓’은 고조선의 혈통일까?

일연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단군(단군의 영혼)은 장당경(평양)으로 들어갔다가 훗날 (위만과 함께)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한다. 요임금이 건설하였다는 ‘평양平壤’은 훗날 한韓의 도읍이 되었으니, 단군(의 영혼)은 중화의 성지에 유화문명의 씨를 뿌리고, 그 씨앗이 싹을 틔워 ‘한韓’나라가 세워졌다는 말이다. 도대체 단군조선과 중국의 ‘한韓’ 사이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까?

1화에서 본 「한서지리지」를 환기하라.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한 일은 두 가지. 백성들에게 예禮와 의義를 가르치고, 고조선의 법률(八條)을 겁탈하여 중화의 법도(禁八條)를 만들어낸다. 이쯤이면 독자들은 한비자韓非子의 법가사상을 생각하리라. 한비자의 법치法治는 유가의 덕치德治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오랑캐사상이라 할 것이니, 삼국지는 그 뿌리를 고조선의 형법(八條)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법치’라는 한 가닥의 단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기자箕子의 시대(BC11세기)와 한비자(BC280~233) 사이의 시간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면, ‘노자·한비열전’편에서 ‘노자老子―장자莊子―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가 연달아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 ‘노자는 장자를 낳고 장자는 신불해를 낳고 신불해는 한비자를 낳은’ 철학의 계보를 암시한다면, 단군이 뿌린 씨앗은 노자 장자를 거쳐서 한비자에게 이어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더라도 노자는 BC6세기 인물이니 기자箕子와의 사이에는 아직도 500년의 공백이 남아있으니, 그 공백을 메워줄 인물을 ‘논어’에서 찾아보자.

 

논어 ‘팔일八佾’ 제22장.

子曰管仲之器小哉 공자 가로되, “관중管仲의 그릇은 ‘다양성[小]’이었도다!”

或曰管仲儉乎 어떤 사람이 물었다. “관중은 (욕망을)제약[儉]했나요?”

曰管氏有三歸 공자 가로되, “관씨管氏는 과부의 재혼[三歸]을 시행하였고

官事不攝 관리[官]들이 (재혼법을)폐기[事]해도 대체입법[攝]하지 않았다.

焉得儉 그러니 어찌 (욕망을)제약[儉]했다고 하겠는가!”(이하생략)

 

공자가 은밀하게 드러낸 진보철학자는 제齊환공을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려놓은 관중管仲(BC723~645).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지극히 유교적인 고사故事의 주인공이 사실은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유가의 반역자였다니. 그렇다면 주周나라의 위세가 서서히 쇠락하며 춘추시대로 접어들 무렵 이미 관중과 같은 혁명적 사상가들이 곳곳에 등장하며 제자백가시대라는 중국철학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리라. 그러한 토양에서 피어난 오랑캐철학의 꽃 노자老子의 제1성을 음미하라.

 

道可道非常道 도道가 가히 사람을 인도[道]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道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 명名이 가히 사람을 분별[名]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名이 아니다.

 

노자老子는 사람을 인도[道]하는 道를 거부한다. 그들은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였던가? 공자는 주입식교육[學]으로, 공자 이전의 성인들은 ‘점占’으로 하얀 깃털[白羽]의 씨를 뿌림[時]으로써 인도하였다. ‘군자의 행동은 善, 소인배의 짓거리라는 惡’이라고 편견의 이름을 붙임[名 가치부여]으로써 말이다. ‘유가의 道는 정상적인 道가 아니다.’ 노자는 이토록 직설적인 돌직구를 던졌는데, 중국 땅에는 한 번도 철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까? 주변을 돌아다보라. 철학자들이 노자老子의 철학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道可道非常道 도道가 가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도道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 이름이 가히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사람이 주인이다’라고 외치는데 선생님들은 ‘사람’을 묻어버리고 道를 신성불가침화 하였으니 ‘道가 주인이다’라고 가르치는 꼴이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외침이 전혀 헛되지는 않았으니, 중국의 철학자들은 노자의 이름과 더불어 만리장성 너머 단군의 땅을 꿈꾸었으리라. 그러나 곧 중원을 정복한 진시황과 뒤이어 일어난 한漢나라에 의하여 좌절된 중국의 꿈들은 만리장성을 넘어와 단군조선을 부활하고 마한이라는 아담한 유토피아를 건설하였으니, 다시 한 번 ‘한韓’이라는 이름에 담긴 고대인들의 꿈을 더듬어보자.

한비자는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10만여 자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자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처세와 모략의 달인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저술들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비유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진시황이 한비자의 사상 및 부국강병책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다고도 한다. 천하를 평정할 비결을 터득하였으나 한韓나라 군주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진시황에게 이용당하였다고도 한다. 한비자가 군주의 통치론과 부국강병의 길을 제시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한비자의 철학이 진시황의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어떻게 한비자를 오해하였는지 「사기史記」를 보라.

 

누군가가 한비자의 책을 진秦에 가져갔다. 진왕(통일 이전의 진시황)이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읽어보고는 말하였다.[人或傳其書至秦 秦王見孤憤五蠹之書曰] “아! 과인이 이 사람을 얻어[得此人] 그와 함께 함을 드러내어[見與之] 주유천하[遊] 할 수만 있다면 (한비자가)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嗟乎 寡人得見此人與之遊 死不恨矣] 이사李斯가 말했다. “이것은 한비의 저서입니다.”[李斯曰 此韓非之所著書也] 진秦은 서둘러 한韓을 공격하였고, 한왕은 당초 한비를 기용하지 않다가 다급해지자 한비를 진秦에 사신으로 보냈다.[秦因急攻韓 韓王始不用非 及急 廼遣非使秦]

 

학자들이 오해한 첫 번째 대목은 진시황의 넋두리다. “아! 과인이 이 사람과 사귈 수만 있다면 (과인은)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嗟乎 寡人得見此人與之遊 死不恨矣]” 이렇게 해석하였으니, 진시황이 어떻게 천하를 통일하였는지, 진시황에게 한비자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마천의 암시를 알아들을 리 없는 것이다. 숨겨진 한비자의 용도는 무엇일까? 오늘날 ‘학자들의 오해’ 바로 그것이다. 진시황이 한비자의 위대한 철학을 사랑[與]하였다는 헛소문 말이다. 그런 헛소문을 낸 진시황은 어떻게 천하를 통일하였을까?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진시황을 다른 중화의 왕들과는 차별화된 왕으로 생각할 것이니, 백성의 지지를 등에 업은 왕이 공자처럼 천하를 주유하면 제후들은 책봉해 달라고 줄을 서리라.

그 3자 관계―차별화된 제왕을 지지하는 백성, 차별화의 힘으로 책봉하는 황제(성인), 책봉 받는 제후―가 중화라는 봉건제의 은밀한 헤게모니이까. 그렇다면 정말로 한韓의 군주는 처음에 한비자를 기용하지 않았을까? 사마천은 서두에서 ‘한韓왕이 좋은 인재를 기용하라는 한비자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말미에서 “다급해지자 한비자를 진秦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것은 다급하면 사지로도 보낼 수 있는 끈끈한 관계라는 역설이 아닌가. 한비자에게 적당한 자리는 한韓의 조정이 아니다. 재야에서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을 규합하며 민중에게 철학을 깨우치는 것이 민중의 나라 한韓을 위한 한비자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는지 「사기史記」에서 한비자의 꿈을 더듬어보자.

 

이윤伊尹은 요리사가 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포로가 되었으니, 모두 새로움[由]에 자리[所]하여 키[其]의 업그레이드[上]를 주간[幹]한 것이다. 고로 이 두 사람이 겁탈[子]한 것은 모두 성인이었다. 불능不能의 쇼[猶]를 하며 노동[役]과 육체욕망[身]을 멸시[無]하면 냇물을 건넌 세상[渉世]은 그들을 모방[如此]하니 키[其]는 (다시 세속을)모욕[汚]하였으리라. 비방[非]을 투사[則]하는 것이 (역대제왕들이)유능한 선비를 채용[設]하는 이유[所]였던 것이다.[伊尹為庖 百里奚為虜 皆所由幹其上也 故此二子者 皆聖人也 猶不能無役身而渉世如此其汚也 則非能仕之所設也]

 

은殷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의 오른 팔 이윤伊尹, 진晉나라 목공穆公을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려놓은 백리해百里奚. 탕왕과 목공은 백성들에게 ‘비방[非]’을 투사[則]하고자 이윤伊尹과 백리해百里奚를 등용하였으니, 중국의 역대제왕과 성현들은 동굴 속의 변혁(陰陽)으로 거듭 중화를 부활하였으리라. 그렇다면 한비자는 어찌하였다는 말일까? 한비자韓非子는 ‘자子’를 ‘비판[非]’한다. 기자箕子라는 이름의 키[箕]의 새끼[子] 공자라는 이름의 공작[孔]새끼[子]를 비판하고 그들의 겁탈[子]교육을 비판한다. 동굴을 탈출하는 진짜변혁을 위해서 말이다.

한비자韓非子의 ‘비非’와 역대제왕·성현들의 ‘비非’를 비교하시라. 이윤과 백리해 이야기에 이어서 사마천은, 비가 내려 부잣집 담장이 무너지자 다시 비가 내릴 것이라고 충고하였다가 도둑으로 의심받은 이웃집 사람의 이야기, 정鄭나라 무공武公이 호胡를 정벌하는 과정에 직언을 고하였다가 사형 당한 우직한 충신 이야기를 제시한 다음, 이렇게 정리한다. “그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심하게 당한 자는 도륙을 당하고, 가볍게 당한 자는 의심을 샀다. 알려주는 것[知之]이 문제가 아니라 ‘지知’가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此二説者 其知皆當矣 然而甚者為戮 薄者見疑 非知之難也 処知則難矣]

한비자의 철학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한이 없으리라.(고백하건대 필자 또한 거의 읽어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비자의 꿈을 헤아려보자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세계에서 보면 예수를 밀고한 유다는 백해무익한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동굴 밖에서 바라보면 꽤나 쓸모 있는 인재일 것이다. 그림의 사선구도는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인간들을 결합하고 있으니, 그 보편적인 결합으로 탄생한 새로운 주식회사entity는 예수 등 뒤의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열린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리라. 프란시스 베이컨은 중세의 암흑을 넘어 근대로 나아가는 역사를 두 권의 책으로 예언한다. <학문의 진보>이 인간의 철학이라면, <신기관Novum Organon>은 공자왈맹자왈하는 인간이 아니라 철학하는 인간들의 사회다. 그러한 서구인들의 꿈을, 중국인들은 이미 기원전에 설계하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노자·장자와 한비자다. 「노자」·「장자」가 ‘학문의 진보’에 해당한다면 「한비자」는 중화의 동굴을 탈출하는 ‘신기관Novum Organon’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한韓민족이다. 중화의 동굴을 탈출하려는 중국인들의 꿈, 그 이전에 주체적 삶을 향유하고자 했던 단군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 르네상스민족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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