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탑

十七世孫          대무신왕의 17세손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二九登祚 號爲永樂  18세에 보위[祚]에 올라[登]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太王恩澤 洽于皇天  태왕의 은택恩澤이 중화의 하늘[皇天]을 적시어[洽] 무너뜨리고

威武 橫被四海      위무威武가 사해를 자유분방[橫]의 옷을 입혀[被]

掃除○○ 庶寧其業  不可를 쓸어버리고[掃除] 기업其業을 죽여서[庶] 매장[寧]하매

國富民殷 五穀豊熟 나라가 부유[富]하고 백성은 떼깔[殷]나고 오곡이 누구든 대접[豊]하니

昊天不弔          호천昊天(상생의 하늘)은 죽지[弔]않으리라.

 

(통론: 대무신왕의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여 연호를 영락이라 정했다. 태왕의 은택이 세상에 두루 미치고, 위엄은 사해에 떨쳤고, 악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 그 업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오곡이 풍족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주몽신화(6화) 유리왕·대무신왕 이야기(7화)에 이어 비로소 비문의 주인공인 광개토왕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선 미상의 글자 ○○은 누군가의 판독에 근거하여 ‘不可’라고 전제하였음을 밝힌다. 광개토왕은 어떤 일을 하였는가? 공작새하늘[皇天≒乾]을 파괴하고 상생의 하늘[昊天]을 건설하였다. 하늘이 바뀌면 땅도 변혁하리라. 천하백성들에게 자유분방한 옷(문화)을 유행시켜서 금기(不可)의 땅[坤]을 종식한다. 그러면 풍요[富]를 누리며 다양한 개성[殷]을 자랑하는 까마귀천국이 열리리라.

흡우황천洽于皇天 횡피사해橫被四海 소제불가掃除不可 서녕기업庶寧其業 국부민은國富民殷 오곡풍숙五穀豊熟 호천불조昊天不弔. 이 7가지 과업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과업은 ‘횡피사해橫被四海’다. 문화를 바꾸어야 중화의 천지(乾坤)를 무너뜨리리라. 그렇다면 그 이전에 중화는 어떻게 동굴(乾坤)을 건설하였을까? 「서경書經」‘요전堯典’의 한 구절을 보라.

 

   광피사표光被四表 중화의 빛[光]이 사해에 지위표지[表]를 입히면[被]

   화급만방化及萬方 변태[化]가 만방에 전파[及]되리라.

 

안타깝게도 조선은 ‘광피사표光被四表 화급만방化及萬方’의 약자로 ‘광화문光化門’이라는 간판을 붙였다니, 충신·효자·열녀의 빛[光]으로 백성을 변태[化]시키자는 중화의 슬로건이 아닌가. 그것은 조선왕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찍이 고조선시대에도 일부 족장들이 중화에 동조하였으니, 주몽으로부터 광개토왕까지 고구려는 ‘흡우황천洽于皇天 횡피사해橫被四海’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메마른 중화의 하늘(상부구조)을 적시어 비를 뿌리게 하고, 만물―욕망 선호 등 인문학적 만물―을 싹틔움으로써 다양성[橫]의 세계를 부활한다. ‘기업其業’은 중화의 ‘인간을 키질[其]하는 사업’으로서 7화에서 말한 ‘기업基業(하부구조 중심의 나라를 건설하는 고구려의 사업)’의 대립항이다. 마지막 2행은 ‘풍요의 경제[國富]→까마귀문화[民殷]→상생나눔[五穀豊熟]→영원한 호천昊天(=人乃天)’으로 이어지는 유화문명의 비전이다.

이제 무용총무용도를 보라. 글자로 새긴 광개토왕의 역사를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예술에 투영하였는지.

 왼쪽의 무언가를 공손히 들고 제사를 지내러 가는 세 사람은 중화문명이다. 오른쪽 음악과 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유화문명이다. 유화문명은 중화문명을 모방하는 듯하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까마귀깃털을 창조하고 있다. 절풍건을 쓴 주몽이 중화의 복장을 실용적으로 변형한 복장을 입고 앞장서자 중화의 복장을 한 두 사람(성인군자)이 유화문명에 귀의하여 주몽의 뒤를 따르고 뒤이어 주몽처럼 개량복장을 입은 두 사람이 따른다. 하단의 여인은 주몽의 예술을 모방한 패션으로 남루한 복장의 생업에 종사하는 지아비를 섬긴다. 하단 오른쪽은 지아비의 뇌리에 떠오르는 공작새인간들(성인군자들)이다. 지아비는 일순간 '주몽의 예술이 중화(낙랑)의 예술인가' 생각하지만 곧 그 차이를 깨달으리라.

무용총은 증언한다. 중화는 일찍이 기자箕子시대부터 낙랑樂浪을 앞세워 고조선·고구려에 중화주의의 씨를 뿌렸지만, 고조선·고구려는 그들의 찬란한 문물을 응용하여 유화柳花의 영혼을 고양하는 기제로 삼았다고. 그것이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이동 내지 문화변동이라면, 그 반대방향의 문화이동은 어떠하였을까? 이백李白의 시 ‘고구려’를 보라.

 

金花折風帽  금화金花(복종과 가짜변혁의 문명)가 절풍모를 꽃 피우니
白馬小遲回  백마가 지遲―느림, 낡은 중화―를 업신여기며 은퇴[回]를 지체[遲]하네.
翩翩舞廣袖  편편무翩翩舞가 보편[廣]을 응원[舞]하며 자유[由]의 쇼[衤]를 하니
似鳥海東來  모방[似]하는 새들이 해동海東을 모방[似]하여 상생[來]변혁[來]하는구나.

 

이백은 탄식한다. 조선을 중화화하러 간 낙랑이 도리어 유화문명을 꽃피우고(1행), 그것이 역류하여 중화문화(翩翩舞)에 유화의 영혼(由)을 불어넣고 있는 현실을. 그 결과 2행에서 백마白馬(중화의 군주들)는 느림의 미학을 자랑하는 오래된 중화를 경멸하며 권좌에서 물러나는 '극기복례(陰陽)'를 실천하지 않고, 4행에서 모방하는 백성들은 이미 유화의 영혼이 깃든 예술을 감상하며 고구려인들처럼 상생과 변혁을 꿈꾼다. '금화金花'는 오행 중 金의 문명으로서 서경 '홍범구주'편에 '金은 從革(복종과 가짜혁명)'이라 하였다. '절풍모'는 무용총수렵도(5화)에서 주몽이 쓴 휘어진 깃털모자로서 위 무용총무용도의 모자와 같다. '편편翩翩'은 주역 제11地天泰에서 '편견의 깃털을 거듭 휘날려라'이니 '편편무翩翩舞'는 성인군자들이 종묘제례 등에서 추는 템포가 느린 편견의 춤이다. 그러나 그 춤은 고구려의 영향으로 빠른 템포의 댄스음악으로 변질되고 있었으리라. '래來'는 三人의 결합[十]이라는 상형에서 상생이며, '오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변혁을 뜻한다.

 

三十有九宴駕棄國  태왕은 39세에 어가[駕]를 안식[宴]하고 나라[國]를 포기[棄]했으니
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 태왕의 뜻을 따라[以] 갑인년(414년) 9월 29일
  乙酉遷就山陵   싹틔우는 닭[乙酉장수왕]이 조정을 천도[遷山]하고 능을 취임[就]하매
於是立碑銘記勳積 ‘어시於是’가 비명碑銘을 옹립[立]하고 훈적勳積을 기억[記]하리니
以示後世焉       어시於是의 뜻을 따라[以] 후세의 까마귀제왕들[焉]을 훈시[示]하는 바
  其詞曰維昔     공자왈[曰]이 백성을 포획[維]하여 도착[昔]함을 폭로하길 기약[其]하라.
(통론: 태왕은 39세에 붕어하셔서 떠나시게 되었다. 갑인년(414년) 9월 29일에 산릉을 완성하여 옮기시게 되었다. 여기에 비석을 세워 태왕의 훈적을 새겨 두니 이를 후세에게 전하는 바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앞에서 광개토왕의 업적은 천지개벽이다. 개벽 또는 르네상스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중화의 낙랑樂浪질이 우리의 영혼을 위협할 것이니, 주몽도 개벽하고 유리왕도 대무신왕도 …광개토왕도 주몽을 이어받아 거듭 개벽하여 온 것이다. 광개토왕이 죽은 후 장수왕의 개벽작업은 우리(유화문명)를 개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장수왕은 업그레이드된 유화문명의 싹을 틔우고자 “조정[山]을 천도[遷]하고 능陵을 취임[就]”한다. 광개토왕이 사용하던 궁궐을 능으로 만들고 그 근처에 새로운 도읍을 세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왕이 바뀔 때마다 궁궐을 짓는 대역사를 감행하였다는 말인가? 삼국유사 고구려편은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모자란 까마귀들[未]의 황제[皇 유방]는 궁실(미앙궁)을 지었으나 주몽은 단지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오두막[廬]을 엮어[結] 거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후대왕들도 주몽처럼 오두막궁궐에 거처하였을 터, 그것이 국내성에서 수많은 왕능을 발견하면서도 궁궐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이리라.
1~3행의 이슈는 ‘변혁’이다. “태왕이 나라를 포기”했다는 것도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후대에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변혁의 메시지이며, 3행의 ‘을유乙酉’와 ‘천취산능遷就山陵’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2행의 “갑인년 9월 29일”도 단지 일시를 말함이 아니라 “호랑이[寅]본성을 싹[甲]틔우고…”라는 뜻이 숨어있지만, 간명함을 기하고자 해석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4~6행의 이슈는 ‘꿈’이다. 유화문명의 꿈을 꾸라. 작가는 유화의 영혼을 ‘어시於是’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으니, 불가나 유가의 ‘여시如是’에 대립하는 철학이다. 무엇을 ‘시是(강령 내지 진리)’로 삼을 것인가? 如는 획일(같다) 모방 복종이다. 반면, ‘어於’는 반란(거스름)이다.(‘어시於是’는 「논어」학이10장에 등장한다. 또한 「맹자孟子」는 여러 곳에서 ‘여시如是’와 ‘어시於是’를 대비하였으며, 불가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있다.) 4~6행의 구조는 현란하다. ‘어시於是’가 묘비명을 기억할 것이니(4행) 어시於是의 뜻을 따라 (묘비명)훈시하는 바(5행), 공자왈맹자왈을 폭로할 것을 기약하라(6행=묘비명). 순환구조를 응시하라. 작가는 어시於是의 뜻을 따르고, 후세제왕들은 작가가 어시於是를 따라 지어낸 묘비명을 따르고, 어시於是는 후세제왕들이 실천한 묘비명을 기억하는 ‘상호출자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구조는 무엇을 말하는가? 유교 불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세계에서 ‘말씀’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유화문명의 종교에서는, 당신과 내가 말씀이 되고, 말씀은 우리 후손들이 되고, 후손들은 다시 말씀이 된다는 말이다.
전반부(1~3행)와 후반부(4~6행)을 비교하라. 전반부는 태왕의 죽음에서 시작되고, 후반부는 어시於是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전반부는 태왕의 뜻을 따르고 후반부는 어시의 뜻을 따른다. 전반부는 태왕의 능을 취임하고 후반부는 공자의 죽음을 기약한다.

 현실을 돌아보자. 2002년 한일월드컵, 기적적인 승리를 이어가던 한국팀.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승리는 역부족이라 예감할 즈음 응원단은 훗날을 기약할 copy를 고안하였다. '꿈은 이루어진다' 고구려인들 역시 그러하였으리라. 사방으로 포위해오는 중화에 대항하여 광개토왕이 동분서주하며 최고의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장차 통일중국과의 힘겨운 싸움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신념이 곧 승리의 길이었을 것이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모처럼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는 마당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70년 동안이나 남북으로 갈라져서 대립하며 살아왔던가? 아마도 통일을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분단현실이라는 이유로 남북의 소통을 금기하여 왔지만, 우리는 모두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바보논리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던가. 통일의 꿈이 7천만 겨레의 가슴 가슴에 퍼져나가길 기원하며, '닭과 계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시공간을 아우르는 장자의 '자아의 꿈'으로 광개토왕의 에피탑을 마무리한다.

 

昔者莊周夢爲胡蝶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속에서 오랑캐 나비[胡蝶]가 되었다.
栩栩然胡蝶也        각자[木木]의 깃털들[羽羽]이 인정[然]하는 것이 호접이런가.
自喩適志            적재적소[適]에 연유[自]하여 퀸카[志]를 깨달으니[喩]
與不知周也         ‘ 여與entity’는 '주周‘를 분별[知]하지 않았다.
俄然覺則蘧蘧然周也  문득 깨어나 보니 종종걸음(예법)을 걷는 완연한 주周가 아닌가.
不知周之夢爲胡蝶與  주周가 꿈을 꾸어 나비의 여與entity가 된 것인지,
    胡蝶之夢爲周與  나비가 꿈을 꾸어 주周의 여與entity가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周與胡蝶則必有分矣  주周와 나비가 필必을 따랐다면 분별이 일어났을 터,
此之謂物化          그것을 일러 ‘물화物化(물物의 변태)’라 하리라.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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