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고조선1 왕의 귀환

魏書云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마침내 2천년을 지나 단군왕검壇君王儉을 ‘계승-부활[有]’하여
立都阿斯達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經云無葉山          {아사달은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亦云白岳在白州地     ‘역亦’은 백악白岳이 백주白州를 보필[在]하는 땅[地]이라 하고,
或云在開城東         ‘혹或’은 ‘성城(조정)을 열기[開]’를 꾀[在]하는 주인[東]이
今白岳宮是}          백악白岳을 첨단화[今]하며 ‘시是’를 겁탈[宮]하는 곳이라 한다.}
開國號朝鮮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與高同時             고구려[高]와 더불어[與] 백성과 함께[同] (가치의)씨[時]를 뿌렸다.

(통론: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아사달은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그것은 ‘고高(요임금)’와 같은 시기였다.)

3화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낯익은 문장일 테지만, 동북아역사의 구도(1화~5화)를 살피고자 단편적으로 인용했던 이야기를 이제 온전히 접근하는 마당이니 다소간의 중복을 양해하시라. 삼국유사 '고조선(단군왕검)'편은 다섯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1. 왕의 귀환 2. 환웅이라는 이름의 반역자 3. 곰과 범의 에덴동산에서 4. 2천년 동안의 깃털전쟁 5. 그들이 낙랑질 할 때

2~5가 단군 2000년(정확히는 1908년)동안의 일대기라면, 1은 맨 마지막 장면이다. 그러나 통론은 이 대단원의 장을 첫 장면으로 착각하였으니, 2000년 동안 벌어진 문명충돌(교류)의 역사는 모두 매몰되고 말았다.

먼저 영화 '반지의 제왕' 3부 '왕의 귀환'을 보자. 거대한 악의 축 사우론의 도전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인류들이 힘을 결집하는 가운데 곤도르왕국의 왕 아라곤이 은둔한 지 969년만에 돌아와 사우론에 대한 결사항전을 선포한다.

"제군들의 눈에서 나와 똑 같은 공포를 보았다. 인간의 용기가 무너지고 친구를 버리고 동맹이 깨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사우론이 승리하고 인간의 시대의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싸운다. 이 땅에서 향유할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싸우라 명령한다. 서쪽의 인간들이여! 프로도를 위하여!"

영화가 '969년만의 귀환'이라고 설정한 것은, 십자군전쟁 때부터 아라곤이 유랑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 아닐까? 서구세계에서 세상을 뒤흔든 큰 전쟁은 십자군전쟁과 1~2차 세계대전이었으니, 사우론으로 상징되는 전쟁광들의 시대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용기를 분출해야 하는 부활의 시대로 규정하였으리라.

또 하나의 신화를 보자. 모세는 억압받는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고, 그 때 바닷길을 열어준 야훼는 나중에 그 구원의 댓가로 십계명을 내린다.

고조선 첫번째 이야기는 단군이야기가 아니라 단군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운 위만魏滿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군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왕의 귀환'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위만과 함께 넘어온 중국인들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중화의 동굴을 탈출하는 '엑소더스exodus'라 할 것이다.(엑소더스로서의 위만이야기는 삼국유사 '위만조선'편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니 일연은 왜 위만 이야기로 우리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였겠는가?

유화문명은 부활하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저 중원 땅에도 유화의 버드나무가 뿌리를 내려 무성한 잎을 싹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리라.

그러나 위만의 시대는, 춘추전국이라는 문예부흥기에서 진秦 한漢이라는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며 중원에서 뿌리를 내리려던 단군의 (인문학적)후예들이 동쪽으로 이주하는 피난시대. 게다가 조선은 일찍이 기자가 와서 禮와 義를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낙랑樂浪이 깊이 뿌리를 내렸으니, 일연은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이름으로 중화에 물든 조선의 현실을 토로한다.

'아阿'와 '사斯'가 도달[達]한 땅. '아阿'는 불가의 '아미타불'이며 '사斯'는 유교의 분리주의를 말한다. 일연은 왜 불교까지 끌어들였을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곳곳에서 '도사의 옷을 입은 선비' '승려의 옷을 입은 선비'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중화의 성인군자들은 도사와 승려로 위장하여 도교와 불교를 이용하였다는 말이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단군신화에 '환인'이라는 불교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니, 그 이야기는 다음 21화로 유보한다.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이름은, 안타깝게도 중화주의가 지배하는 땅이다. 그래서 {주석}은 '지엽을 싹틔우지 않는 산[無葉山]' 이라는 이름으로 고목나무에 싹을 틔우며 연명하는 중화를 풍자한다.(고목나무 이야기는 주역 제28택풍대과 제60수택절 및 열하일기 '송가장'참조) 또한 중화주의자들[亦 군자들의 entity]은 스스로 "공작새나라(白州)의 군주를 섬기는 공작새선비들의 마을(白岳)"이라 고백하고, 중화를 탈출하려는 자유주의자들[或]은 "…‘시是’를 겁탈[宮]하는 곳"이라고 조롱한다.

장황하게 설명하였지만 결국 아사달은 우리가 왕검성이라 부르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으로 이어져온 조선의 도읍일 것이다. '위만조선'편에서 위만은 기자조선의 궁궐로 들어가 준왕을 몰아내었다 하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다고 한 것은, 기자조선과는 다른 위만조선의 정체를 강조함이리라.

위만조선은 "고구려와 더불어" 다양한 철학의 씨를 뿌렸을까?

위만조선의 건국시기는 BC194년으로 추정된다. 그 후 BC108년 한나라에 의하여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BC37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더불어"는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1화를 환기하시라. 한서리지지는 "현도와 낙랑은 무제(주나라 무왕)때 설치되어 조선 예맥 구려 만이를 획일화하였다."고 하였으니, 주몽의 고구려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구려句麗'라는 나라가 있었지 않은가. 그 구려 역시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을 것이며, 高씨도 그 일원이었으리라. 물론 '고구려'편에서 일연은 주몽이 高라는 성을 창시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옛 '구려句麗'를 高라고 부른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주몽의 조상을 지칭할 마땅한 이름이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리라.

일연은 ‘위서魏書’를 인용하였음을 명시한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위서魏書에 단군이라는 이름이 없으므로 일연이 역사를 창작하였다고 비판한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충돌을 보지 못한 그들이 어찌 위서魏書의 '위만'이야기를 인용하였으리라 상상하겠는가. 그러나 다음 21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군신화'는 정체모를 古記를 인용한다. 다분히 창작이라는 고백이다. 하지만 삼국유사 '고구려'편의 주몽신화가 800여년 앞선 광개토왕비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볼 때, 단군신화 역시 일연의 상상력의 산물은 아니리라. ‘사기史記’를 비롯한 중국 사서들에 산재한 동이족의 이야기들, 고려시대까지 구전되어 오는 민간설화들을 토대로 민초들의 염원을 담아 재구성하였을 터, 신화를 읽으며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은 학자들에게 맡겨진 엄중한 숙제라 할 것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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