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만주 독립운동은 헐벗고 굶주린 빨치산들 투쟁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우리 독립군들은 오랫동안 훈련 양성된 정예군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러일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당시 세계최강 군대였습니다. 우리 독립군이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에 필적할 만큼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당시 간도 제1의 거부였던 최운산장군은 자신이 1912년부터 운영하던 사병부대를 대한민국의 독립군부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했습니다. 이후 무기와 식량, 군복 등 일체의 군자금 제공하고 모든 독립군들을 봉오동 주변에 모이게 합니다. 최운산장군이 간도 독립군을 모두 규합하여 창설한 대규모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한 대한민국 독립군이었습니다.

형님인 최진동장군이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최운산은 참모장, 동생 최치흥은 참모, 부관 안무, 연대장 홍범도, 김좌진, 오하묵 등과 함께 무장투쟁에 나섭니다. 참모장인 최운산장군은 토지 등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휘하의 부대에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였고, 모든 병사들이 정예 독립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훈련시켰습니다.  

봉오동에서 무장독립군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우려한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으로 대규모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최운산장군의 첩보로 이를 간파당했고, 연대 규모 일본군 토벌대는 한 달 전부터 철저한 대비한 우리 독립군에게 역습을 당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봉오동전투”는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리며 한일합방 이후 시들어가던 독립운동 열기에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진정한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사셨던 최운산장군 순국 73주기 추도식을 7월 5일 14시 국립현충원에서 개최합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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