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回娘家(친정 나들이)                        작품 : 라문황 한지민속화

정적에 싸인 깊은 밤, 어머니 어깨에 기대어 있던 저는 낙숫물소리에 잠이 달아납니다. 가을비가 내리나? 빗소리가 어머니의 잠을 방해하는 것 같아 어머니 뺨을 어루만져봅니다. 온몸이 마비된 어머니는 그저 눈빛으로 말합니다. ‘가을비가 내리고 나면 그만큼 추위도 따라온단다. 애야! 이불 잘 덮고 추위 조심해라!’

저는 대꾸합니다.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 몸이 따뜻해. 이불보다 포근한걸!“

어머니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만지며 생각에 빠집니다. 내년 겨울에도 차가운 손발을 이불 속에 밀어 넣으면 엄마가 따뜻이 녹여주기를 바랄게. 2013년 11월 어느 가을밤 일입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기 전, 저와 어머니 사이는 자녀가 마땅히 해야 하는 효도 정도였습니다. 어머니와 팔짱을 끼거나 품에 기대어 애교를 부렸던 기억도 없고요.

▲ 어머니가 불편하던 초창기 함께 대만 일주

2011년 어머니가 쓰러졌다 깨어난 후에 병세는 계속 불안정했지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으며, 매번 장기간 입원해야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돌보고자 대만으로 돌아갔지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날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냈고, 지나간 숱한 일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어머닌 상세하게 저의 어릴 때 기억을 채워주었지요.

하루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여덟 명 아이를 낳았는데, 나는 다섯째라 가장 관심 밖이었지. 그래 안 그래?“

어머니는 듣고 웃기만 합니다. 대꾸를 안 하니 한명씩 숫자를 들먹이며 따졌지요.

”여덟 명의 아이 중에 큰언니는 첫 번째 태어난 보배였고, 둘째 언니는 비록 여자아이지만 아직은 상큼하고. 세 번째는 오빠, 고추를 달고 나왔고 집안의 장손이니 얼마나 기뻤을까? 네 번째는 셋째 언니로 대만 속담에 ‘셋째 딸은 복을 타고난다’고 하잖아. 거기다 미인상이니 어머니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고.“

제 차례는 건너뛰고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여섯 번째는 둘째 아들, 기다리던 고추가 또 태어났으니 큰 동생도 총애를 받았지. 일곱째를 낳고는 어머니가 더 안 낳겠다고 했지. 그렇지만 여동생이 예쁘고 애교가 넘쳤으니 당연히 사랑을 받을 수밖에. 거기에다 여동생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고추가 또 출현했어. 막냇동생은 귀염둥이였지. 어려서부터 할머니는 막내를 ‘꼬마 변호사’라고 즐겨 불렀어. 그래서 막내도 총애를 받으며 자랐고!“

저는 수를 다 세고 어머니에게 한 번 더 물었습니다.

”나는? 다섯 번째에 고추도 없고, 검고 못생긴데다 들창코. 사실 사랑받을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

어머니는 저를 보더니 자애로운 목소리로,

”열 손가락 물어봐라. 어느 손가락이나 다 아프단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 양손을 올리고 손가락 열 개를 하나씩 물었습니다.

”다섯 번째 손가락은 안 아프지?“

”그래, 안 아프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애들은 많고, 집안 형편은 어려우니 누가 울어야 먹였다. 너는 어려서부터 울지도 않고 뭘 달라고도 못 했어. 지금부터는 원한다는 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언어장애가 오기 전 어머니와 나눈 대화이며, 저에게 한 마지막 분부로 기억합니다.

▲ 2016년 설날. 8남매가 함께

어느 날 밤 깨어나자 습관적으로 어머니 침대를 바라봤습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잠을 못 이루고 눈을 뜬 채 저를 보고 있더군요.

”엄마, 잠이 안 와? 내가 엄마 곁에서 잘까?“

어머니는 눈을 깜박여 좋다는 표시를 합니다.

저는 제 침상에서 내려와 어머니의 좁은 침대로 올라가 어머니 베개를 베고 누웠습니다. 저의 이마를 어머니 뺨에 대고 누워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였습니다. 어머니 귓가에 작은 콧소리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자 어머니가 편안하게 눈을 감습니다. 만약 그 몇 해 밤낮으로 함께 지내지 못했다면 엄마의 뺨에 제 얼굴을 친밀하게 비비지도 못했을 것이고, 응석을 부리며 어머니와 이야기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병상 곁에서 어머니의 나날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이 마음의 거리는 함께 지내는 만큼 점점 가까워졌지요. 저와 어머니의 진한 정이 깊어갔습니다.

1989년 멀리 한국으로 시집갈 때 어머니는 제게 당부했지요.

▲ 出嫁(출가)                         작품 :라문황 한지민속화

”너의 시댁 친인척들은 모두 처음으로 ‘대만사람’과 접촉하게 될 거다. 그들은 단지 너의 행동거지만으로 ‘대만사람’이 좋다 나쁘다 평할 것이다. 너의 등에 ‘대만인’ 세 글자가 짊어져 있으니 말은 삼가고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등 뒤에 손가락질하며 대만사람이 안 좋다고 말하게 해선 안 된다.

아침에 큰 동서가 6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면 너는 반드시 5시 반에 일어나라. 윗사람이 일어나기 전에 꼭 먼저 일어나라. 어떤 일이든 ‘저는 대만사람이라 못해요’라는 소리는 하지 마라. 눈치껏 손 빠르게 배우고, 할 수 있는 일이면 잽싸게 손을 놀려라. 집안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나는 아직 집안일로 죽은 사람 못 봤다.“

어머니는 또 덧붙여,

”결혼이란 단지 남편과 시부모만 돌보는 것이 아니란다. 가까운 이웃이나 먼 친척도 반드시 정성을 다해야 한다. 먼저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해야만 다른 사람도 너를 선하게 대할 것이다.“

제가 한국에서 보낸 30년의 결혼생활, 비바람도 많이 겪었지요.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타국에서의 결혼생활을 어떻게 참고 견딜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버텼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대만에 가면 언제나 어머니와 제가 함께 잤던 침실에서 잡니다. 어떤 때는 아직도 방안에서 규칙적인 어머니의 호흡소리와 기계소리가 들리는 듯, 마치 어머니가 여전히 제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요 몇 년 사이 어머니를 돌보던 그 세월이 정말 귀중한 시간이었음이 점점 또렷해집니다. 만약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마음속 중요한 부분을 서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출생한 손주가 할머니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과 간병하던 시절

어머니! 이제 다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겠지요. 하지만 가르침은 꼭 새겨둘게요. 추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요. 사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모든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번역 : 김동호)

(편집자 주 : 이 글은 2020-11-13 한겨레에 실린 기사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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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憶母親>

寂静的夜裡,我依偎在媽媽的肩膀上,聽著屋簷下傳來的雨滴聲,睡意頓失。這是秋雨嗎?雨聲似乎也擾亂了媽媽的睡眠,我輕輕撫摸着她的臉頰。做了氣切的媽媽無法說話,她用眼神告訴我:一陣秋雨一陣寒,孩子,要蓋好被子,小心著涼!

我說:「老媽,別擔心啦!有您的身體暖著我,比被子暖和。」

摸著媽媽軟暖的手,我想著,希望明年冬天我也能把冰冷的手腳伸進被窩裡,讓媽媽您幫我暖熱。

這是2013年11月某個秋夜裡的事。

在媽媽臥病之前,我和媽媽的互動僅限於做人子女應有的孝道。在我的記憶中,我沒有牽過媽媽的手或依偎在媽媽懷裡撒嬌過。

2011年媽媽因病昏迷,清醒之後的病況一直很不穩定,進出加護病房多次,每次都長久住院。我回台灣照顧媽媽,這讓我和媽媽相處的日子變得更多了。我們兩個人常常天南地北地聊著打發時間,把一些陳年往事都翻出來說了。媽媽細述往事,也補足了我的童年記憶。

有一天我跟媽媽說:「您生了八個孩子,我排行第五,是最不被關心的,對不對?」

媽媽聽到之後笑了。見媽媽沒有回應,我開始一一細數:「八個孩子裡,大姐出生是您第一個寶貝。二姐雖是第二個女孩子,但還是很新鮮也是寶貝。第三個是大哥,帶來了辣椒(男生),又是長孫,舉家歡喜。第四個是三姐,台灣俗話說『第三個女兒吃命』(命很好,會給自己帶來福份),而且三姐是個美人胚,所以爸媽也疼愛著她。」

我跳過自己,繼續數下去:「第六個小孩是大弟,期待中的辣椒又出現了,大家都很開心多一根辣椒,所以大弟也是被疼愛的寶寶。生完第七個寶寶後,媽媽說不生了,老么嘛,小妹既漂亮又會撒嬌,理所當然地被疼愛著。結果在小妹之後出現了意外的一根辣椒,小弟是個小帥哥,從小奶奶愛叫他『辯護士』,所以第八個小孩也被寵愛著長大。」

我數完之後再問媽媽一次:「我呢?第五個,沒有辣椒,又黑又醜加上朝天鼻,實在找不到被疼愛的理由,對不對?」

媽媽看著我,慈愛地說:「十根手指頭,咬哪根手指頭都會痛的。」

我聞言拉起媽媽的雙手,把十根手指頭都咬過一遍。

「第五根手指頭不痛吧?」我問。媽媽回我:「是,不痛。」

「孩子那麽多,家裡經濟又不好。誰哭了我就給誰吃的,妳從小就是不會哭,不會要東西。今後妳要懂得『要』!」

這是媽媽做氣切前對我說的話,是記憶中她給我的最後囑咐。

某夜醒來,習慣性的往媽媽的床看去,發現媽媽並未睡下,睜大眼睛看著我。我問:「老媽,睡不著嗎?我陪您睡好嗎?」 媽媽眨眨眼表示好。

於是我從我的床爬上媽媽的小床,和她共用一個枕頭。我的額頭貼著媽媽的臉,我伸手輕輕地拍著媽媽的肩膀,在她耳邊小聲地哼著不成曲的音調,媽媽安詳地閉上眼睛。如果沒有那幾年的日夜相處,我不會親密地把臉貼在媽媽的臉旁,也不懂得用撒嬌的口吻跟她說話。在病床旁守著媽媽的日子並不輕鬆,然而我們的心理距離隨著相處逐漸拉近。我和媽媽濃濃的情份滋養著。

1989年我遠嫁韓國,媽媽告訴我:「妳婆家親友都是第一次接觸到『台灣人』,他們只能從妳的行為舉止好壞來評論『台灣人』。妳的背上背著『台灣人』三個字,要謹言慎行,不能讓韓國人在妳的背後指指點點,說台灣人的不好。

早上妳大嫂如果六點起床做早餐,那麽妳必須五點半就起來,在長輩起床前妳就要先起床。遇到事情不可以說我是台灣人我不會,要眼明手快的學習,會做的事就趕快動手做好。家事妳儘管去做,我還沒看過因為做家事而死的人。」

媽媽又說:「結婚不是只有照顧丈夫和公婆,連身邊的近鄰遠親都必須真誠對待。唯有先善待別人,別人也才會善待妳。」

我在韓國30年的婚姻生活,歷經了風風雨雨,若有人問我是怎麼熬過這段異國婚姻的,仔細想想,應該是媽媽的教誨讓我撐下去的吧!

2017年媽媽過世後,每次回到台灣睡在媽媽和我睡過的卧室裡,有時候好像還能聽見媽媽房裡規律的呼吸器聲音,彷彿媽媽您還在我身邊。這幾年我漸漸明白照顧媽媽的那段時光是最珍貴的。如果不是那段時光,就無法領悟到我們在彼此心中的重要份量。

媽媽,我再也沒有機會聽到您的聲音了,但是我會銘記您的教誨。

回憶才是最美的,人是活在別人的回憶中的,只要我記住媽媽的一切,媽媽就永遠活著。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라문황 주주통신원  low030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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