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 전명옥님 기리는 손자의 글

필자 전종실씨의 조부 전명옥님. 4남2녀를 뒀으나 3남1녀를 잃은 까닭에 종손인 필자를 무척 애지중지 키웠다.
필자 전종실씨의 조부 전명옥님. 4남2녀를 뒀으나 3남1녀를 잃은 까닭에 종손인 필자를 무척 애지중지 키웠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전방삭 장군의 집안
이순신 장군과 무예훈련 함께한 동갑내기
왜적 총탄에 전사해 ‘충효사’ 지어 기려

농기구 제작 판매로 가정 꾸리고 공덕을 실천하신 전명옥(1879~1963), 나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어모장군’ 전방삭(1545~98)의 12대 손이다.

전남 보성군 우산리에서 태어난 전방삭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정 건공장군에 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명궁으로 소문난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결혼해 장인에게 무예를 배울 때 그도 동갑내기여서 친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창설하여 왜적을 물리쳤으며 정유재란 때 득량면 죽전벌판 전투에서 왜적의 흉탄에 맞아 순절하셨다. 후일 조정에서는 어모장군으로 추증하였다. 이에 부친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고자 장자인 훈련원 판관 전홍례가 전전지인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로 묘를 옮겼다. 후손들이 그 자리에 충효사(忠孝祠)를 지어 위패를 모시고 대를 이어 살고 있다.

12대손 조부 ‘명옥공’ 농기구 제작 생업
4남2녀 중 3남1녀 잃고 환갑 넘어 첫 손자
비오면 못건너는 개울에 다리로 ‘월천공덕’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에 있는 충효사. 필자의 선조인 임진왜란 의병장 전방삭 장군의 사당이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에 있는 충효사. 필자의 선조인 임진왜란 의병장 전방삭 장군의 사당이다.

구한말 1880년대만해도 자급자족으로 연명하는 시절이었다. 농기구는 목공 기술이 있는 사람이 제작한 것을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할아버지는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다.

쟁기, 써레, 풍각, 뒤주, 나막신, 장군 등을 주로 만들었고 손수 살림집을 짓기도 하였다. 덕분에 큰 부자는 아니어도 생활은 궁핍하지는 않았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이런 호강한 생활이 할아버지 덕분임을 늦게야 깨달으니 불효스럽다.

우리 마을 앞 농경지는 애초 바다였는데 방조제를 막아 논으로 만들어 경작하고 있다. 이곳에는 산으로부터 이어진 개울이 있고 이 개울을 건너야 학생들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다리가 없기에 비가 많이 오면 어린 학생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할아버지께서는 소유지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다리를 손수 놓아 주었다.

불가에서 말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을 베푼 것이다. 그래서 이 다리의 이름을 할아버지의 이름자를 넣어 ‘명월교’라 불렀다. 이 다리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4남2녀를 두었다. 그 시절만해도 의술이 미흡했기에 회갑 이전에 그 가운데 3남1녀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마도 장수 집안은 아닌듯하다. 손이 귀한 집안에 사내 손자가 태어났으니 경사스러움은 더할 나위 없었다. 1942년생인 그 손자가 바로 나였다. 그러기에 부모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행여 티끌 하나 묻을세라 자리를 가려주던 두 분이셨다.

내가 9살 되던 해에 장티푸스를 앓게 되었다. 부모님은 제쳐두고 할아버지·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듯 했으리라. 훗날 알게 되었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시골이라 교통수단이라고는 전무했기에, 머슴에게 나를 업히고 매일 병원과 한의원으로 찾아다니며 치료를 했다고 한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3개월 치료받고 생기가 도는 듯하자 “우리 손자 살렸다” 하고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석달이나 누워지낸 나는 혼자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줄을 잡고 걷는 연습부터 다시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점차 회복하는 손자에게 환으로 된 보약제를 계속 지어다 주셨다. 철없는 나는 이것이 먹기 싫어 몰래 호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가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줘 버렸다. 이를 아신 할아버지는 처음 보는 눈빛으로 대노하며 야단을 치셨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철이 없었다. 그래도 회초리를 맞아본 일은 없었다.

이제야,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樹欲靜而風不止,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멎지 아니하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인생은 이렇게 받은 사랑을 늦게야 깨닫고 후회 속에서 사는가 보다.

1975년 필자의 부친 전길수(앞줄 맨 가운데)씨 회갑연 기념사진. 붉은색 타원의 사진이 4남2녀의 맏이인 필자이다. 
1975년 필자의 부친 전길수(앞줄 맨 가운데)씨 회갑연 기념사진. 붉은색 타원의 사진이 4남2녀의 맏이인 필자이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인 부친(전길수)은 장수하여 회갑을 맞았다. 1975년 온가족이 모여 회갑을 축하했다. 4남2녀를 두었기에 이제는 손주도 많아졌다. 다들 나름의 직장을 갖고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이었기에 무슨 뜻인 줄은 몰랐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매일 새벽 매우 긴 문장의 경(經)을 큰소리로 외워 낭송했다. 아마도 가족의 안위를 염원하는 내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작지만 공덕을 베푸신 은혜를 이제야 받지 않았나 싶어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이제 할아버지의 교훈인 공덕심을 가훈삼아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 갈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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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988280.html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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