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박석남 어머니를 그리며

 

1973년 셋째형(이수룡)의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왼쪽부터 필자(이재준), 어머니(박석남), 셋째형, 둘째형(이재진) 
1973년 셋째형(이수룡)의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왼쪽부터 필자(이재준), 어머니(박석남), 셋째형, 둘째형(이재진)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또 이역만리 외국에 살고 있는 손자손녀들에게 ‘뿌리를 잊지 말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의 옛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내가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던 20대 시절, 어머니께서는 밤 11시 넘어서야 귀가하는 아들을 따뜻하게 반겨주셨고, 당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어머니와 한방에서 지내던 때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새벽 두세 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제 와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라고 얘기를 꺼내셨다. “예전에 나는 참 나쁜 엄마였단다. 너의 둘째형이 사범학교 시험 보러간다고 했을 때, 가슴이 덜컥하면서, ‘그 시험에 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었다.” “그때, 너의 형이 그 시험에 붙어버리기라도 하면 등록금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살림살이가 안 되니 너무 답답하여 그런 못된 기도를 했던 것이다.” “최고로 자랑스러운 유명한 학교였는데, 그 시험에 떨어지기를 바랐었다니….” 그럴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의 회한을 털어 놓은 것이었다.

내 어머니 박석남님은 1920년생으로 해방 전후 5남1녀를 낳아 길러냈다. 지난 100년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과 궤를 같이 하면서 살다 가신 한도 많고 곡절도 많았던 분이다.

궁핍한 산골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는 또래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과 같이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대신 빨랫감을 옆에 끼고 시냇가로 가야했다고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던 어머니는 전쟁으로 어수선하던 시절 환란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떠밀려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렇게 만난 아버지의 집안 역시나 매우 가난했다. 시집에서 온전한 물건이라고는 다듬잇돌 한 개뿐이었다고 할 정도로 궁핍한 벽촌이다 보니, 어린 새댁은 앞날이 너무 기가차고 막막하여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하지만 막상 도망을 하려던 순간, “그래! 나는 결심한다! 가난을 피해 도망가기보다는 열심히 살아, 내 자식들은 공부시켜서 농사꾼으로 살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목표가 떠올라, 새로운 인생 도전을 시작했다”고 했다.

1968년 큰형님(이재남·뒷줄 맨오른쪽)과 큰형수(박경님·뒷줄 가운데) 결혼 때 사돈댁과 함께한 중년의 어머니(앞줄 오른쪽) 모습. 
1968년 큰형님(이재남·뒷줄 맨오른쪽)과 큰형수(박경님·뒷줄 가운데) 결혼 때 사돈댁과 함께한 중년의 어머니(앞줄 오른쪽) 모습. 

어린 시절 누에를 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난다. 누에가 고치로 변할 무렵이면, 우리집 뽕잎 만으론 모자라서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까지 직접 따러가기도 했는데, 그날따라 어머니가 늦은 저녁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 모두 그 마을로 찾아갔다. 어머니는 뽕나무에서 떨어져 혼절하고 한 동안 깨어나지 못하신 것이었다. 삶이 그토록 어려웠음에도 당신은 목표, 희망 그리고 용기를 잃지 않았다. 자식 사랑, 지혜, 판단력, 추진력과 생활력도 누구보다 강했다.

그때 같은 동네에서 한량처럼 살던 어떤 분은 치열하게 사는 어머님의 모습에 감화받아, 자신도 자녀들 교육에 정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그 집안에서 변호사와 대학 교수도 나와 유명해졌다.

1920년생인 어머니(박석남)는 2012년 하늘로 떠나셨다. 향년 92. 5남1녀(이재남·재진·영자·수룡·재준·창건) 모두 대학을 나와, 어머니를 생전에 ‘이대 총장님’으로 부르곤 했다.
1920년생인 어머니(박석남)는 2012년 하늘로 떠나셨다. 향년 92. 5남1녀(이재남·재진·영자·수룡·재준·창건) 모두 대학을 나와, 어머니를 생전에 ‘이대 총장님’으로 부르곤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된 둘째형의 기억을 통해 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모습을 들어보면, 당신은 하루 두세 시간도 못 잘 정도로 부지런히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계획하고 노력하며 추구했던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하고 가신 것 같다. 덕분에 그 아들들은 교사, 석사, 박사, 교수도 되었고, 그 중 한 손녀(이영주)는 경영학석사(MBA)를 따고 미국 월가의 펀드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생전에 나는 어머니를 ‘이대 총장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9년 전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어머니는 항상 내 곁에 계신다.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해주기를 바란다.

“우주선은 1단, 2단, 3단 로켓의 발사과정을 통해 우주로 간다. 너희가 우주를 비행하고 있는 3단 로켓 우주선이라고 가정해라! 그리고 반드시 그 뿌리에 해당하는 너희들 할머니를 기억해라. 그 분은 맨땅에서 스스로 우주선을 연구하고, 제작하고, 발사하고, 산화하신 위대한 '1단 로켓'이다. 너희들은 ‘3단 로켓'이니 우주를 맘껏 유영하거라.”

※ 원고를 기다립니다<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 이글은 2021년 4월 30일 <한겨레>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 인터넷 한겨레 기사 :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99326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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