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반점* 이야기

昊에게

어제 드라이브는 대구 위쪽의 김천이라는 도시에 있다는 '초롱반점'이 목적지였다.

어린 시절 집 아래에는 초롱반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그때는 짜장면이 쉽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음식이 아니었다.
까다로운 입맛의 어머니 덕에 나는 또래에 비해 자주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갓난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가 운영했는데 남편이 조리부터 배달까지 다 했었다.
내 엄마는 맛이 괜찮다며 별식이 먹고 싶을 때는 항상 그 집에서 주문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맛이 변했다며 다른 집을 찾기 시작하셨다. 

주문이 뜸해진 건 우리 집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집으로 가던 중학생인 나를 본 초롱반점의 아기 업은 여주인은 잠시 기다리라며 포장한 군만두를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요즘 왜 배달시키지 않는지, 자주 주문해달라'고 웃으며 말했었다.

 제갈량의 만두도, 오늘날의  군만두도 다치고 죽어버린 몸과 마음을 위로한다.(출처 : pixabay.com)
 제갈량의 만두도, 오늘날의  군만두도 다치고 죽어버린 몸과 마음을 위로한다.(출처 : pixabay.com)

멀리 있는 시립도서관에 가려고 새벽에 버스를 기다리던 그 즈음, 나는 맛이 없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류장 맞은편의 술집골목, 술도 팔고 여자도 팔던 가게에서 초롱반점 주인 남자가 술값으로 승강이를 하며 나오고 있었다. 버스가 드문드문 하던 때라 나는 그 광경을 계속 볼 수 있었고 눈이 마주친 주인 남자는 배달로 익숙해진 오토바이를 타고 휑하니 자리를 떠나 버렸다.

새벽에 재료 사러 나가도 힘들 텐데, 주색으로 피곤한 몸에 맛이 깃들 리 없었지 싶었다.
그 후로는 부부를 보지 못했고,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이후 내 엄마는 지인을 통해 그 부부가 대구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더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소문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더라는 당부와 함께..

그때 만두를 전해주던 표정이 아직 남아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롱'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던 중국집, 아마 나는 그 젊었던 여주인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 않았나 싶다.  네 엄마가 나를 일깨웠다.
"당신이 그 상황이면 똑같은 상호를 계속 쓰겠어?"

김천의 초롱반점에 도착해 음식을 시키며  상호의 연유를 물었다. 웃음이 많은 나이든 여주인은 이전에 옷가게를 할 때 썼던 상호를 그대로 들고 온 거라고 답해주었다.
내 작은 바램은 결국 미제로 남았다.
하지만 아이 엄마도, 아이도 지금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타국에서 다시 일요일을  맞으며 생각 많을 너 또한^^

차분한 시간들이 되길, 맛난 저녁 먹길!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실제 상호 대신 '초롱반점'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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