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민중대회」와 야학제자와의 만남

1986년 들어 ‘개헌-호헌 논쟁’ 속에 경쟁적인 서명운동을 벌이던 재야와 ‘양김씨’의 야당은 5월3일 ‘신민당 개헌추진대회’가 괴한들을 동원한 경찰의 폭력저지로 번지면서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5·3 인천사태’로 불린 이날 대회 장소인 인천 시민회관 일대에서 재야·학생·노동·농민·청년운동 단체들이 저마다 주장을 담은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1986년 들어 ‘개헌-호헌 논쟁’ 속에 경쟁적인 서명운동을 벌이던 재야와 ‘양김씨’의 야당은 5월3일 ‘신민당 개헌추진대회’가 괴한들을 동원한 경찰의 폭력저지로 번지면서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5·3 인천사태’로 불린 이날 대회 장소인 인천 시민회관 일대에서 재야·학생·노동·농민·청년운동 단체들이 저마다 주장을 담은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80년대는 변혁의 시대였습니다. 해방 후 40년 넘게 한국사회는 지긋지긋한 독재체제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온 국민이 변화를 갈망했던 시대였지요.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각 부문운동 역시 분수처럼 용솟음쳤습니다.

한 마디로 80년대는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전두환 5공 군부독재정권을 쓰러뜨린 87년 6월 시민항쟁은 그 결정체였지요. 그 당시 저는 보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연로한 할머님 한 분이 플랫폼 바닥에 신문을 펼쳐 들고 6월 항쟁 관련 기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 모습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한국사회 격변의 현실에 관심을 집중시켰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짓눌러 왔던 비이성적인 억압기제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바로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었지요. 냉전질서가 전 세계적으로 해체되는 시기에 접어든 탓이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숨죽여 살아 온 이 땅의 민중들의 열망이 마침내 파열구를 내며 폭발한 탓이기도 합니다.

그 격변의 시기에 저는 낮에는 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났고 저녁에는 야학교사로서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교직원회의가 열렸는데 교장은 회의 맨 마지막에 일어나 일장 훈시를 하곤 했습니다. 교사들을 초등학생 다루듯이 야단을 쳤던 게 그 시절 교직원회의 풍경이었습니다. 그 시절 <전두환 대통령 각하 지시사항> 공문이라며 고등학생들이 6월 항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적극 통제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 시절의 <교육>을 ‘교육’이라 할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시험을 치면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 대자보를 벽에다 부착했던 시절이자 큰 교무실 칠판에 반별로 그래프를 그려가며 경쟁시키던 풍경이 낯설지 않은 때였으니까요. 가정방문도 가고 아이들을 강제로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시키고 촌지가 횡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숙직실이 있었는데 귀가하지도 않고 숙직실을 점령한 채 담배를 물고 화투를 치던 40-50대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상치과목도 많았고 아이들 자습도 자주 시키던 시절이라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교사라면 교육계에 일대 변화를 갈급해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야학교사와 학생들은 영등포 일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야학 졸업생 중에서 ‘강주일’이라는 제자가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훤칠한 키에 선한 눈빛을 간직한 그 제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 주는 친구였습니다. 야학을 떠난 뒤 88년인가 금속 연맹노조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제자와의 극적인 만남은 89년 11월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89 민중대회」에서였습니다. 그 당시엔 전투 경찰 가운데 사복체포조가 있었는데 시위 진압을 위해 머리에 흰 헬멧을 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골단’이라고 불렀지요. 전날 원천 봉쇄된 연세대에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 밤을 새우고 「89 민중대회」에 참여했습니다.

1991년 4월27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강경대 학우 살인 규탄대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선 학생들이 경찰의 물대포 세례를 맞으며 “살인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 한겨레 장철규 선임기자)
1991년 4월27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강경대 학우 살인 규탄대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선 학생들이 경찰의 물대포 세례를 맞으며 “살인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 한겨레 장철규 선임기자)

대회 마지막이 항상 그랬듯이 교문을 뚫고 거리로 진출하려는 시위대와 집회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해 교문 밖 진출을 저지하려는 경찰 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시위대 맨 앞에는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든 열혈 대학생들이 있었고 그 틈 사이사이에는 돌멩이를 던지며 경찰의 저지선을 뚫기 위해 학생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 밀고 밀리는 공방이 있은 뒤 경찰의 총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항상 공격을 알리는 신호가 페퍼포그 차량에서 다연발탄이 발사되면서부터였습니다. 다연발탄은 수십 발이 연이어 발사되는 최루탄인데 시위대를 향해 지그재그로 날아간 탓에 속칭 ‘지랄탄’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냥감을 특정해 맹수가 전력 질주하듯 사복체포조는 뒤쳐진 특정 학생을 표적 삼아 전력 질주했습니다. 물밀듯이 달려드는 ‘백골단’의 공격에 저는 위험을 느끼면서 뒤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생들은 물러서면서도 조직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일명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조치였지요.

저는 최루가스에 숨이 막혔지만 잡히지 않기 위해 뒤로 무작정 내달렸습니다. 도망가면서 양복 등 뒤에 최루탄이 떨어졌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식조차 없이 무작정 멀리, 좀 더 멀리 뛰는 데에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백양로를 뛰어 가는데 최루가스로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면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고 숨이 막혀서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상황에서 백골단에 잡히지 않기 위해 수풀이 조금 우거진 나무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옆으로 사방에서 뛰어가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요. 그다지 수풀로 몸을 은폐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기에 잡히면 개처럼 얻어맞고 질질 끌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제 앞으로 내달리며 뛰어가던 어떤 청년 하나가 뒤처저 주저앉은 저를 보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다가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잡힌다”며 희뿌연 시야 속에서 어깨를 부축한 채, 함께 뛰었습니다.

저는 그 고마운 청년의 도움으로 그 위험한 장소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습니다. 눈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니 조금 먼발치서 화염병을 든 대학생들과 백골단이 대치한 상황이 보였습니다. 경찰들이 더 이상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 청년을 보는 순간 얼마나 반갑고 놀랍던지요! 그 순간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야학에서 만났던 제자 ‘주일’이었습니다. 저를 위기에서 구해 준 야학 제자 ‘강주일!’

입고 간 양복 뒷면에 시커멓게 타버린 흔적과 함께 구멍이 났던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화염병 하나가 백골단 여러 명을 저지할 수 있는 방어용 무기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TV에서 화염병에 휩싸여 화상을 입은 젊은 전경들의 애처로운 모습만 보았을 땐 화염병의 폭력성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위 현장에서 군부독재 권력의 주구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전투경찰들이 소지한 우수한 화력과 비교할 때 화염병은 손쉽게 학생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그것이 당시 시대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야학 제자의 은혜를 입었고 그 날 연세대에서 있었던 「89 민중대회」를 제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야학 제자는 무엇을 하는지...

몇 년이 흘러 그 사건 뒤로 들려오는 소식은 두부장수를 한다는 소식도 간간이 전해 들었지만 32년이란 세월이 훌쩍 우리의 감동적인 만남을 먼 옛날 기억 저 편 오래된 사진처럼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야학교사인 저를 알아보지 못한 상황에서 뒤쳐진 시위대 일원이 최루가스에 덮여 위험하게 주저앉자 앞으로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로 돌아와 구하려고 했던 그 숭고한 정신을 저는 야학제자에게서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자세로서 깊이 깨달은 바가 되었습니다. 그 날 그 감동적인 뜨거운 만남을 비록 오래된 기억이지만 제 삶에서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이 글은 2004년 12월 25일에 쓴 것을 다시 고쳐 썼습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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