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태평 주주통신원

학교는 열등생을 우선 선발해야 합니다. 왜 교육을 합니까?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왜 교육이 필요합니까? 모자라라기 때문이겠지요. 누가 교육을 받고자 합니까? 부족하고 모자란 자들이 원하겠지요. 학교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있습니까? 우등생들보다 열등생들을 교육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우등생들은 제 혼자서도 잘 하고, 제 갈 길도 스스로 알아 갑니다. 오히려 학교가 방해가 되고 불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등생은 스스로 하지 못합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으면, 교육을 받지 못하면 독립할 수 없습니다. 힘을 길러주지 않으면 세상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열등생들에게 교육과 학교는 절실합니다.

▲ 출처 : 알라딘. 열등생과 우등생을 구분하고 나누는 것은 차별하기 위한 수단인가?

그런데 학교는 열등생들을 배제합니다. 선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탈락시킬 이유를 찾고 우등생을 우선 선발합니다. 학교가 고유의 책무를 버리는 것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것입니다. 이는 학교와 교육자의 편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등생은 교육이 쉽고 열등생은 교육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설립과 존재 이유에 반하는 것입니다.

열등생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학교가 버리고 국가와 사회도 그들을 버립니다. 정작 교육이 필요한 자들은 배제하고 교육이 그렇게 필요치 않는 자들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열등생,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인간사회의 약육강식으로 치부해도 될까요? 학교와 교육자들은 깨어나야 합니다. 열등생들을 우선 선발해야 합니다. 열등생들은 교육을 받아야 제 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자립할 수 없고, 국가와 사회의 짐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늘이 되고 그늘이 많아지면 국가사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학교와 당국은 열등생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합니다. 교육의 불평등과 사각지대를 없애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학교의 의무요 책무입니다. 우등생이 아니라 열등생부터 선발해야 합니다.

우등생에 비해 열등생 교육은 어렵습니다. 학교와 당국은 편이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등생은 학교가 선발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제 잘 길을 찾아 갈 수 있습니다. 민주국가와 민주정부의 책무는 역차별을 통한 균형사회의 실현입니다.

남는 곳에서 덜어 부족한 곳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이것만 잘하면 뛰어난 정부,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어찌 이게 이렇게 어려운지 답답하고 아픕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저의 소견일까요? 참답고 진실한 것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역차별을 통해 약자들이 균형사회로 진입케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부와 지도자들이 해야 할 책무입니다. 열등생과 우등생에 대한 교육도 이와 동일합니다.

유교무류(有敎無類_논어 위령공편: 교육만 있고, 남녀노소와 신분 및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교육은 만민들의 평등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정책수단입니다. 현재의 교육차별(우수한 자를 더 우수하게 하고, 열등한 자를 더욱 열등하게 하여 그들이 설 자리를 박탈하는 교육)은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습니다. 열등생들이 공동사회로 나가기 위한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의 가장 큰 폐단은 교육의 차별입니다.

열등생과 약자를 배제한 현재의 교육차별은 그늘진 사회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조장합니다. 현대사회의 교육은 열등생을 우선 선발하는 역차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김태평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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