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대 구로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구로고등학교 시절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야학으로 직행했습니다. 강서·남부지역 학교대표자 모임이 있는 날을 피해서 1주일에 1번 야학에 나가서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선배의 권유로 시작한 야학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통해서 한국사회 교육모순, 나아가 사회모순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야학 교사들끼리 가끔씩 세미나를 통해서 한국사회 현실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조금은 이해하였습니다. 80년대 전반기에는 구로 3공단 지역에서 공단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군사정권하 정보 경찰의 촉수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교회라는 합법 공간에서 공단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중앙성광교회로 기억합니다. 대부분 어린 여공들이었는데 그들 중 80% 이상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에 깜짝 놀랐습니다. 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영호남 차별정책의 결과였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빈곤층 농촌 자녀들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군 입대하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구로공단에서 야학활동을 함께 했던 교사들 가운데 노웅희 선생님과 조호원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조호원 선생님(수학)이 시흥고(지금 금천고)에서 86년 4·19 혁명을 맞아 아이들에게 4월 혁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5공 군부정권하 서울시 교육청은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당시엔 교실에서 4월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징계대상이었던 황당한 시절이었습니다. 조호원 선생님이 부당 징계를 받자 노웅희 선생님(선린상고, 지리)은 시교육청에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당시 서울시 교육청은 부패의 상징적 인물인 최열곤 교육감이 통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민주교육에 앞장섰던 교사들을 강원도 양구(유동용 선생님), 충청북도 단양(김민곤 선생님) 등 외진 지역으로 유배 발령을 내곤 했던 막가는 시절이었습니다. 하기야 대통령 해외 순방을 환송한답시고 교사와 학생들을 강제 동원해 공항 대로변에 몇 시간씩 세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도 국군의 날 행사나 국립묘지 참배에 학생들을 데리고 행사에 동원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해외순방 행사 동원을 당당하게 거부한 교사들도 있었고 이승만 묘소 참배를 거부한 교사도 있었습니다. 전해 듣기로 이을재 선생님과 고 김태선 선생님, 유동용 선생님, 정영훈 선생님이 서슬 퍼런 80년대에 그런 용기를 내셨던 분들이었습니다.

4월 혁명을 이야기한 선생님을 중징계하고 민주교육에 앞장섰던 교사들을 탄압하자 노웅희 선생님은 동료교사들에 대한 부당 징계 발령에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서울시 교육청은 눈엣가시였던 노웅희 선생님을 경기도 교육청으로 발령을 냈고 경기도 교육청은 백령도 백령중학교로 다시 발령을 내버렸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이지요.

더욱 황당한 일은 노웅희 선생님이 경기도 교육청을 항의 차 찾아갔을 때 발생했습니다. 경기도교육청 소속 장학사와 장학관들은 노웅희 선생님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노선생, 축하합니다!', '축하해요!'를 연발했습니다. 백령도는 당시 교육감 <빽>으로도 가기 힘든 지역으로 가산점수가 1년에 2점씩 주어졌던 곳이니까요. 영점 몇 점 차이로도 승진에서 갈리기 때문에 점수에 목매거나 민감한 교사들에게는 환영받을 일이었겠지만 노웅희 선생님 처지에선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착잡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두환 5공 군부 정권 말기 87년에 저는 두 곳에서 야학 강학 노릇을 했습니다. 수요일은 구파발 천주교회에서 학생들을 만났고 금요일에는 서초동 철거민 꽃동네에 가서 도시빈민의 삶을 접했습니다. 말이 꽃동네지 지금 법원청사와 검찰청사가 들어선 서초동 일대가 모두 판잣집이었고 달동네였습니다. 강학(講學)은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의미이고 노학(勞學)은 일하면서 배운다는 의미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노동야학은 전태일 열사 사건(1970. 11. 13)이 노동운동 전반에 끼친 영향과 관련이 깊습니다. '전태일'이라는 22살 한 젊은이의 죽음은 당시 재야운동과 학생운동, 그리고 비조직적이고 산발적인 70년대 노동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기 때문입니다. 충격은 지식인, 종교인, 학생, 재야단체, 노동계 등 한국 사회 전체 운동에 대한 성찰과 운동노선의 일대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며 자신을 불사른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출처 : 하성환)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며 자신을 불사른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출처 : 하성환)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법전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그 젊은이는 공민학교조차 2년 다니다 중퇴했습니다. 청년 전태일은 흐릿한 호롱불 등잔 밑에서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 법전을 더듬더듬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토로했습니다. 그러한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시대가 반성을 한 것이지요.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노동야학의 등장은 그렇게 한 젊은이의 숭고한 죽음을 딛고 가능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검정고시 야학 일변도였습니다.

구파발 천주교회에서 야학을 마치고 집에 오면 거의 12시가 넘은 한 밤중이었지만 서초동 꽃동네 도시 빈민야학의 경우 8시에 시작해서 10시쯤 마쳤던 기억이 납니다. 구로고 학생회 간부들은 학교수업을 마친 뒤 서초동 꽃동네로 자원봉사를 갔습니다. 그 곳에서 달동네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과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모아다가 공부방을 차렸습니다. 구로고 학생들은 국어, 수학 등 학교공부도 가르쳐주고 같이 공놀이를 하면서 놀아주었습니다. 오늘날 초등 돌봄 교실 역할을 한 셈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20대 젊은 교사인 저와 매우 친밀했습니다.

84년 후반 정치적 유화국면을 타고 85년 대학가는 학생회장 직선제 투쟁국면이었습니다. 그에 힘입어 고등학교 역시 86년도엔 간선 임명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서초동 꽃동네 놀이방 자원봉사를 자처한 학생들은 학생들의 자치역량을 관철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지역 고등학교에선 석관고등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88년도에 직선제 학생회장을 탄생시켰습니다. 구로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당국과 지난한 줄다리기 끝에 88년도에 직선제 학생회로 전환시킨 것이지요. 이는 이후 학생들의 삶에 중대한 전기로 작용했습니다. 당연히 서초동 꽃동네 공부방을 운영했던 구로고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직선제 쟁취 투쟁을 승리로 이끈 결과였습니다.

학생자치활동 가운데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단편들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구로고등학교 학생들은 '구로고등학교'라는 학교 명칭을 싫어했습니다. 구로공단을 연상시켰고 공돌이, 공순이가 다니거나 적어도 그와 관련된 구로공단 산업체 부설학교라는 구로동 지역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열등의식은 축제 명칭인 「상록제」와 연결 지어 한편에선 「상록고등학교」로 개명하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개명이야기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자주적인 학생회 활동과 주체적인 동아리 활동의 결과 그런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고 나름 자부심을 얻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은 학생회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구로(九老)'라는 명칭의 지역적, 역사적 뿌리를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가능했습니다. '장수한 아홉 노인'의 구로마을 이야기를 교지인 『상록』지에 체계적으로 싣게 되면서 아이들 의식의 저변을 변화시킨 결과였습니다.

학생회 아이들은 지역교회인 대림 제일교회와 갈릴리교회를 통해 활동했으며 대림제일교회에서는 학교문제를 주제로 지역 학생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87년 6월 시민 항쟁 당시 구로고 학생들은 거리 시위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고 무엇보다 87년 12월 13대 대선 당시 구로구청 투표함 부정사건 때는 조직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학년 교실에서 구로구청 옥상이 훤히 보였고 구로구청 바로 뒤 아파트인 보광아파트에 거주하는 학생들도 있었기에 구로구청 항쟁 당시 전투경찰의 잔인한 진압과정을 구로고 학생들은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특히 이른 시각 등교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은 전투경찰이 자행한 잔인한 진압과정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목격한 학생들 가운데엔 당시 상황을 진술할 때 울음을 그치질 못할 정도로 충격이 컸습니다.

학생자치활동 역량을 키워 온 아이들은 축제인「상록제」역시 학생회 – 동아리 부장 연석회의를 통해 그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했습니다. 축제를 알리는 풍물패의 길놀이 행사는 학교에서 출발하여 영림중학교를 거쳐 구로구청 큰 길가까지 꽹과리를 치면서 거리 주변의 흥을 돋우었는데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관심도가 높았고 특히 학교 주변 문구점, 서점 주인들도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드높아진 학생자치 역량은 89년 6월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되었습니다.

89년 6/12일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며 2,000명이 넘는 구로고 학생들이 항의 집회하는 장면(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89년 6/12일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며 2,000명이 넘는 구로고 학생들이 항의 집회하는 장면(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전교조 분회 결성을 주도했던 양달섭 선생님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맨 먼저 파면되자 권력의 탄압에 맞서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참교육 지키기'로 나타났습니다. 2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육당국을 성토하며 운동장 연좌시위를 했습니다. 이어서 학생들은 분노의 열기를 모아 거리 진출까지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교문을 박차고 나선 학생들은 전투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막혀버렸습니다. 전투경찰의 무자비한 곤봉세례를 받으며 학생들은 결국 거리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후 학교당국의 잘못된 처사에 분노한 학생회 간부들은 울분을 억제하지 못한 채 학생회장-총무부장 투신이라는 비극적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1989년 2월 2일 전교협('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약칭) 대의원 대회 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이미 작고한 오종렬 전교협 부회장이 단상에서 발언하고 있고 오른쪽에 고 이규삼 선생님, 왼쪽에 정해숙 선생님 모습이 보인다. 2/2 대의원대회에선 <89년 상반기 중 조직형태를 교원노조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1989년 2월 2일 전교협('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약칭) 대의원 대회 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이미 작고한 오종렬 전교협 부회장이 단상에서 발언하고 있고 오른쪽에 고 이규삼 선생님, 왼쪽에 정해숙 선생님 모습이 보인다. 2/2 대의원대회에선 <89년 상반기 중 조직형태를 교원노조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89년 2월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의 약칭)은 창립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전환을 결의합니다. 89년 당시 「구로고등학교 평교사협의회」 회원은 전체 교사 85명 가운데 36명 정도였습니다. 회원 대부분은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 교사들이었습니다. 김승만 선생님이 유일하게 37세로 고령이었지요.

89년 6월 3일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식은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CBS기자가 일찌감치 학교를 찾아와 취재하였고 결성식 이후 언론의 반응도 매우 뜨거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식은 전국 국공립고등학교 가운데 최초였기 때문입니다. 결성식이 예정됐던 「국민정신교육관」은 폐쇄되어 부득이 1층 교무실 중앙 칠판과 중앙 탁자 앞에서 거행했습니다.

문제는 학교장이 탁자 위에 드러눕는 광경을 연출했고 옆에 있던 교감도 덩달아 따라 누워 결성식을 방해했습니다. 이들은 전교조 탄압 이후 모두 영전되었습니다. 교장은 강남 청담고 교장으로 그리고 교감은 서대문중 교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당시엔 강남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속물교장들 중엔 서로들 강남으로 가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던 시대였고 일부 몰지각한 빨대교사들 중에서도 엄청난(?) 촌지를 의식한 채 강남 발령을 욕망하던 시대였으니까요.

87년 「평교협」에서 출발한 「전교조 구로고 분회」조합원 36명 중 정부의 탄압과 교육청 장학사들의 집요한 탈퇴 공작으로 「전교조 구로고 분회」 집행부 일부가 탈퇴하는 등 매일 눈물겨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탈퇴하는 교사들이 생기자 부득이 학교 근처 갈릴리 교회에서 합숙을 했습니다. 합숙을 하면서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고충을 토로하면서 결의를 다진 채 다음날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농성 중 한밤중에 숙직실이나 교무실 농성장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쳐 구로경찰서로 연행되었던 기억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고 다시 아침에 학교로 출근해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 전교조 사수 투쟁 기간 발간한 회보 <교육과 노동> 제2호 분회 회보 <교육과 노동>은 6/5일 1호를 시작으로 12/9일 11호까지 발간되었다.(출처 : 하성환)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 전교조 사수 투쟁 기간 발간한 회보 <교육과 노동> 제2호.  분회 회보 <교육과 노동>은 6/5일 1호를 시작으로 12/9일 11호까지 발간되었다.(출처 : 하성환)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는 한 달이 넘는 항의 농성과 12일에 걸친 단식 투쟁, 그리고 교장실 점거 농성을 비롯해 한 달 넘게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전교조 지도부는 수배 중이었기에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투쟁은 외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매일 숱한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어서 분회 대변인을 따로 두어 성명서를 적시에 발표하는 등 그때그때 발생한 사안에 대해 적극 대처해 나갔습니다. 그렇듯 서울지역 공립학교 최초의 노동조합 분회 결성은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엔 전화도청과 감청이 횡행했던 시절이라 이야기를 나눌 땐 밀폐된 외진 공간이나 한밤중 운동장에 나가서 땅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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