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인 ‘나’를 일깨우는 죽음들

Ⅰ.
교사로서 언제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88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구로고등학교 제자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2003년에 산화한 노동자 김주익님의 죽음입니다. 

88년 늦여름 새벽 3시에 저는 전화 한 통을 받고 여의도 한강다리 옆 파출소에 도착했습니다. 파출소 경찰관으로부터 제자의 죽음과 유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허망했고 또한 황망했습니다.

너무도 해맑게 웃던 제자였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지요. 제자는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만큼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죽기 3일 전 꼿꼿한 자세로 제 수업을 열심히 듣던 그 해맑은 얼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 같이 버스를 탔을 때 제자가 공부하는 게 싫다는 듯이 이야기를 해서 그냥 의례적으로 힘든가보다는 생각에 다독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신호였음을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교사인 제가 조금만 더 아이들 고통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아이들 내면을 응시할 수 있었더라면 제자의 허망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참교육, 바로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과 맑고 밝은 영혼의 성숙을 위해 출발한 교사대중조직이다. 89년 교육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당시 전교조는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의 미래를 위한 아이들의 희망으로서 양식 있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전교조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참교육, 바로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과 맑고 밝은 영혼의 성숙을 위해 출발한 교사대중조직이다. 89년 교육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당시 전교조는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의 미래를 위한 아이들의 희망으로서 양식 있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슬픔과 함께 89년 전교조 결성 투쟁으로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시간이 흐르고 어설픈 복직과정을 통해 다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1994년 그렇게 영등포여자고등학교로 복직했습니다.

당시엔 인문계 고등학교가 공부하는 분위기라 담임교사를 하는 게 정신적으로 그리 힘든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선 4년 내내 담임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인즉 “아이들을 의식화시킨다!”는 학교장의 황당한 태도였습니다. 

전교조 해직교사를 대하는 태도가 대단히 왜곡돼 있었지요. 4년 근무 중 담임을 맡고 싶었던 해도 있었는데 단 한 번도 담임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교장은 2년 만에 행정내신을 내어 강제로 저를 다른 학교로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불신의 시작은 복직하면서 「출근부 날인」을 거부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은 「출근부 날인」제도가 없어졌지만 당시엔 교사들이 출근과 동시에 출근부(정식 명칭 출근보조부)에 날인을 강요받았습니다. 저는 다른 교사와 함께 계속 「출근부 날인」을 거부했고 학교장은 ‘경고장’을 날리며 수시로 위협했습니다. 교장실을 나오면서 ‘경고장’을 찢어 휴지통에 던졌습니다. 교사를 통제하는 방식이 매우 천박했습니다.

교육청 장학관도 학교장과 한통속이 돼 우리를 교육청으로 무작정 호출했습니다. 다른 전교조 교사가 “자신이 다 감당하겠다!”며 혼자 교육청으로 쳐들어갔는데 싱겁게 끝났습니다. 정작 호출한 장학관이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지요. 

「출근부 날인」문제로 교사를 겁박하는 데 학교장과 교육청 관료가 한 몸이 돼 있던 시절 교육계 풍경이었습니다. 결국 행정내신으로 강제 전출시키려던 학교장의 의도는 전교조 출신 어느 교육위원의 도움으로 무산되었고 저는 그대로 학교에 남았습니다.

이후 「출근부 날인」제도는 2001년 교육부-전교조 간 단체협약이 체결되면서 「학습지도안」과 함께 전격 폐지되었지요. 일제치하로부터 100년 넘게 지속된 「학습지도안」검열이 폐지되면서 출근부도 폐지돼 학교현장에서 영구히 사라졌습니다. 

황당한 것은 여름 방학 때 이해할 수 없는 교감의 행동이었습니다. 다방에서 만나자고 해 나갔더니만 교감은 “하선생이 학교장에게 사과하는 형식을 취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이상하게 회유했습니다. “그러면 학교에 남게 해주겠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내비쳤습니다.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지요. 이미 끝난 일인데 자신이 행정내신을 통해 강제로 전출시키려던 의도가 무산되자 구겨진 체면을 회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렇게 재미없는 학교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여학생이 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와의 때 이른 사별로 슬픔을 이겨내질 못하던 한 가녀린 여고생이 쓴 글인데 글 가운데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순간 깜짝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 속에서 그 아이를 특정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았습니다. 

그리곤 담임 선생님 도움을 받아 생활기록부를 한 장씩 넘기며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경찰들이 수사망을 좁혀나가는 방식으로 며칠을 두고 그 아이를 찾아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를 불러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냈지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이의 슬픔과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이 가져온 상심과 마음 속 상처가 아이의 영혼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 아이의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이의 상실감과 슬픔에 공감한 뒤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이 아버지에게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고 아이 상태를 전했습니다. 새엄마까지 만나지는 못했는데 그 전에 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는 한 손에 다량의 수면제 봉지를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죽음에서 끌어올린 그 아이의 손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건네받은 것으로 저는 작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후 무사히 졸업을 했고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교사로서 조금은 죄책감을 덜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용산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기면서 항상 1호선 전철을 타야했습니다. 한강철교를 건널 때면 매일같이 한강에 투신한 제자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언제나 마음에 깊은 짐이 되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교사로서 조금만 더 제자에게 다가가 내면을 이해했더라면...  제자가 힘들어했을 때 왜 나는 교사로서 그 아이의 고통을 모르고 있었는지... 제자의 삶과 고통에서 교사인 나는 무엇이었는지... 두고두고 지울 수 없는 죄의식과 회한, 그리고 먹먹한 교육현실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만 살아 꿈틀거렸습니다. 

제자의 해맑은 모습을 가끔은 가슴 아리도록 보고 싶습니다. 지금 살아 있다면 올해 나이 오십일 텐데... 세월은 한참을 흘렀어도 슬픔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제자의 죽음은 시간을 정지시킨 채, 잊히지 않는 죽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니 이 땅에서 교사 노릇 제대로 하려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죽음이고 언제나 내 가슴에 고이 간직해야 할 죽음이 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자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 노동동지가 2011년 6월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85호 크레인은 2003년 구조조정 정리해고와 손배가압류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서 불의한 노동현실에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노동동지가 고공농성을 했던 곳이다. 한진중공업 사측의 노조 탄압으로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노동동지들이 의문사 당하거나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맞서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방식으로 투쟁해 왔다. (출처 :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자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 노동동지가 2011년 6월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85호 크레인은 2003년 구조조정 정리해고와 손배가압류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서 불의한 노동현실에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노동동지가 고공농성을 했던 곳이다. 한진중공업 사측의 노조 탄압으로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노동동지들이 의문사 당하거나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맞서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방식으로 투쟁해 왔다. (출처 :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Ⅱ. 
2003년 10월  17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님은 몇 천원의 「임금 인상」과  「정리해고 반대」, 그리고 부당한「손배 가압류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 중이었습니다. 35m 상공 85호 크레인 위에서 129일을 외롭게 고공농성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사로서 조선소 노동자 김주익님의 죽음은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노동동지 김주익님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 나는 아내와 같이 택시를 갈아타고 어떻게든 골목골목 샛길을 달려 부산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만장과 장례인파에 밀려 부산대교를 넘을 순 없었지요. 기차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1시간이 걸렸고 기차는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조금의 원망도 없이 기차 계단에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5시간을 넘게 걸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가슴 속엔 노동자 김주익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으로 침울했습니다. 부산대교를 어렵게 넘어갈 때 보았던 수많은 만장들과 민주노동당 차량, 그리고 김주익 동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동자 행렬, 부산시민의 슬픈 모습이 차례차례 교차하면서 한 노동자의 죽음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세 자녀에게 약속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주지 못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며 슬픔과 사랑이 담긴 유서 글을 남긴 채, 아버지는 마흔의 나이로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크레인이 자신의 무덤이 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을 유서로 남긴 채, 스스로 자신의 목에 걸 밧줄을 매듭지으며 잔인한 노동현실에 저항했습니다.  

아무 죄 없는 노동자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2003년 전국을 강타한 살인적인 태풍 「매미」의 폭풍우 속에서 40톤이 넘는 크레인이 세 바퀴 반을 미친 듯이 돌았습니다. 그 굉음소리와 함께 85호 크레인이 몇 번을 휘감아 돌았어도 노동자 김주익 동지는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진 시간을 버텨냈던 한 노동자가, 한진 자본의 노동탄압과 노무현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외롭고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 중공업지회장 김 주익! 
그의 죽음으로 손바닥 뒤집듯 노동조합을 무시해오던 회사 측은 「임단협」(임금인상 단체협약)을 이행하였고 해고시킨 노동자 17명을 즉각 복직시켰습니다. 한 노동자의 피 값이자 목숨을 대가로 얻은 투쟁의 결실이었습니다. 그것이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발생한 참담한 노동 현실이었습니다. 

“자살로 목적을 이루려는 노동운동”이라며 참여정부는 노동계를 맹비난했지요. 게다가 참여정부는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라”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참여정부의 배반된 태도가 참으로 역겨운 시절의 살풍경한 노동계 현실이었습니다. 

1970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고발했던 노동현실이 33년이 지나도록 변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간직했던 스물두 살 청년이 근로기준법 <법전>과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저항했던 암울한 노동계 현실이 33년이 지난 시점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2020년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전태일 동상 앞에서 섰다.(출처 :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20년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전태일 동상 앞에서 섰다.(출처 : 한겨레 박종식 기자)

전태일이 죽음으로 저항한 방식과 수십 년이 지나 김주익 열사가 택한 죽음의 방식이 왜 그리도 똑같아야만 했을까요? 그렇게 죽어야만 야만적인 노동 현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의 몸짓을 보였습니다.  

‘노동 해방’을 꿈꾸며 우리 사회 야만적이고도 불의한 노동현실을 고발한 김주익 노동동지가 산화한 지 오늘로서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5년 전 기차 시간에 쫓기며 장례 만장과 숱한 인파 속에서 허둥대던 그 날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교사로서 오늘을 살아가면서 외롭게 투쟁했던 김주익 노동동지의 마음을, 그 헌신성과 책임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1/10이라도 닮고 싶습니다. 

적어도 이 시대 교사 노릇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잊힐 수 없는 죽음이자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자랑스럽게 가슴에 새기고 기억해야 할 <전태일의 또 다른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 이 글은 2008년  김주익 노동동지의 추모기일인 10월 17일에 쓴 글을 다시 고쳐 썼습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 양성숙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