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노태임님께 올리는 셋째아들의 글

 

1980년 회갑잔치 때 필자의 어머니 노태임님.
1980년 회갑잔치 때 필자의 어머니 노태임님.

그리운 어머님 , 어머니가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어언 15 년이 다 되어 갑니다 . 어머니가 아기 때부터 키워주시고 늘 손잡고 교회에 다니시던 무남독녀 손녀딸 도란이는 벌써 서른 살이 되어 멀리 타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

오늘 이렇게 하늘나라 어머님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 이제 현직에서 은퇴하고 집에서 지내는 간간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와의 추억의 편린을 주워 모아 글로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

어머님 , 올해도 어김없이 5 월 8 일 어버이날에 충남 천안군 풍산공원묘지에 아버님과 합장해드린 묘소에 부부동반으로 다녀왔습니다 . 아버님 허붕렬( 1986년 6월26일 졸 )·어머님 노태임( 2006년 11월5일 졸 ), 안식하시는 묘소를 돌아볼 때면 , 생전에 부모님을 잘 살펴드리지 못한 불효자로서의 죄책감을 저버릴 수 없답니다 .

1980년 회갑연 때 필자의 아버지 허붕렬님. 어머니보다 3살 위였으나 아버지 뜻에 따라 3년 뒤 부부 함께 회갑을 축하했다.
1980년 회갑연 때 필자의 아버지 허붕렬님. 어머니보다 3살 위였으나 아버지 뜻에 따라 3년 뒤 부부 함께 회갑을 축하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 충남 천안군 성거면 입장 근처에서 빈농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신 아버지는 소학교 3학년만 겨우 마치고 농사일을 돕다가 , 어머니와 혼인한 뒤에는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사도 하고 고향 인근에서 사금 캐는 일도 하시다가 결국 입장 읍내에 싸전을 차려 정착해 7남매를 두셨지요. 그러나 6·25 때 인민군에게 쌀을 모두 빼앗기고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을때 천안 근처 직산에서 사금을 캐다 다친 허리병까지 도지게 된 아버지는 노름으로 시름을 달래시다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지요. 결국 아홉 식구는 1959년에 상경하여 북아현동 단칸방에서 서울살이를 하게 되었구요 .

천안군 병천면 출신으로 15살 때 시집온 어머니는,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친척이 마련해준 과일 노점상을 아버지와 함께 근근이 꾸려나가셨지요 . 아버지는 척추가 심하게 굽어 장애인이 된 고단한 삶의 화풀이를 때때로 어머니에게 퍼부었는데 , 그래도 어머니는 집 근처 감리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가시며 신앙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견디셨던 것 같습니다 .

아버지가 칠순 직전 갑자기 작고하신 뒤에야 어머니는 그 시절 남모르게 힘들게 고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서울 올라와서 처음에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쥐약 먹고 다같이 죽어버리자 ' 고 할 때도 있었니라. 그래도 ‘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 너희들 키운 거여. " 오죽 아득하고 신산한 도시 빈민의 삶이었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

1960 년대 중반 한여름 밤중에 장맛비로 수박 , 참외 등 과일들이 떠내려가 버리고 도난까지 당하자 , 어머니는 아예 굴레방다리 시장 구석의 노점에서 몇달간 쪽잠을 자며 밤새 지키시다가 영양실조로 결핵까지 앓으셨지요 . 그나마 병원비가 없어 지인의 권유로 가게된 삼각산 기도원에 서 기적적으로 치유받고 돌아오신 일도 기억이 납니다 .

어쩌면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으련만 , 어머니는 전혀 좌절을 모르시고 어려운 살림에도 조금씩 돈을 모아 조그만 과일가게 점포를 마련하고 딸 셋까지 출가시키고 , 밑으로 철부지 아들 넷이 중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갈 수 있도록 일숫돈을 얻어서라도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지요 .

그리고 이 못난 셋째 아들이 젊은 시절 한때 불우한 일을 겪자 , 제 옆에 오셔서 묵묵히 의식주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어머니... 그 시절 한겨울에 집 근처 반찬가게 다녀오시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왼쪽 손목 골절상을 입으신 일은 제가 죽어서도 못 갚을 은혜입니다 .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실 때 결국 요양원에 모시는 불효까지 너그러이 받아주신 어머니 , 주말에 면회 갔다가 돌아올 때면 자식 덜 힘들게 하려고 애써 웃어주시던 모습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큰형님 댁으로 모시던 와중에 , 정신이 흐릿하신 중에도 갑자기 또렷한 목소리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 일러주신 성경 구절이 자식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이 되었지요 .

1991년 셋째 아들인 필자 부부(앞줄 가운데)의 혼인 폐백을 마친 뒤 어머니(앞줄 맨왼쪽)와 7남매가 함께한 가족사진.
1991년 셋째 아들인 필자 부부(앞줄 가운데)의 혼인 폐백을 마친 뒤 어머니(앞줄 맨왼쪽)와 7남매가 함께한 가족사진.

요즘 열대야로 잠 못 이루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우리 7 남매가 사는 것’ 자체가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의 못 다한 삶을 이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로 헌신하신 두 분의 삶이 우리 7 남매 모두 바르게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식들도 후손들 잘 키워서 두 분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이제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추석 절기에 묘소로 찾아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

편집 : 김경애 편집위원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난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난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원문보기: https://hani.co.kr/arti/society/media/1009335.html

허익배 편집위원  21hi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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