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노태임님께 올리는 셋째아들의 글
그리운 어머님 , 어머니가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어언 15 년이 다 되어 갑니다 . 어머니가 아기 때부터 키워주시고 늘 손잡고 교회에 다니시던 무남독녀 손녀딸 도란이는 벌써 서른 살이 되어 멀리 타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
오늘 이렇게 하늘나라 어머님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은 , 이제 현직에서 은퇴하고 집에서 지내는 간간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와의 추억의 편린을 주워 모아 글로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
어머님 , 올해도 어김없이 5 월 8 일 어버이날에 충남 천안군 풍산공원묘지에 아버님과 합장해드린 묘소에 부부동반으로 다녀왔습니다 . 아버님 허붕렬( 1986년 6월26일 졸 )·어머님 노태임( 2006년 11월5일 졸 ), 안식하시는 묘소를 돌아볼 때면 , 생전에 부모님을 잘 살펴드리지 못한 불효자로서의 죄책감을 저버릴 수 없답니다 .
일제 강점기인 1917년 , 충남 천안군 성거면 입장 근처에서 빈농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신 아버지는 소학교 3학년만 겨우 마치고 농사일을 돕다가 , 어머니와 혼인한 뒤에는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사도 하고 고향 인근에서 사금 캐는 일도 하시다가 결국 입장 읍내에 싸전을 차려 정착해 7남매를 두셨지요. 그러나 6·25 때 인민군에게 쌀을 모두 빼앗기고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을때 천안 근처 직산에서 사금을 캐다 다친 허리병까지 도지게 된 아버지는 노름으로 시름을 달래시다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지요. 결국 아홉 식구는 1959년에 상경하여 북아현동 단칸방에서 서울살이를 하게 되었구요 .
천안군 병천면 출신으로 15살 때 시집온 어머니는,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친척이 마련해준 과일 노점상을 아버지와 함께 근근이 꾸려나가셨지요 . 아버지는 척추가 심하게 굽어 장애인이 된 고단한 삶의 화풀이를 때때로 어머니에게 퍼부었는데 , 그래도 어머니는 집 근처 감리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가시며 신앙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견디셨던 것 같습니다 .
아버지가 칠순 직전 갑자기 작고하신 뒤에야 어머니는 그 시절 남모르게 힘들게 고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서울 올라와서 처음에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쥐약 먹고 다같이 죽어버리자 ' 고 할 때도 있었니라. 그래도 ‘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 너희들 키운 거여. " 오죽 아득하고 신산한 도시 빈민의 삶이었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
1960 년대 중반 한여름 밤중에 장맛비로 수박 , 참외 등 과일들이 떠내려가 버리고 도난까지 당하자 , 어머니는 아예 굴레방다리 시장 구석의 노점에서 몇달간 쪽잠을 자며 밤새 지키시다가 영양실조로 결핵까지 앓으셨지요 . 그나마 병원비가 없어 지인의 권유로 가게된 삼각산 기도원에 서 기적적으로 치유받고 돌아오신 일도 기억이 납니다 .
어쩌면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으련만 , 어머니는 전혀 좌절을 모르시고 어려운 살림에도 조금씩 돈을 모아 조그만 과일가게 점포를 마련하고 딸 셋까지 출가시키고 , 밑으로 철부지 아들 넷이 중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갈 수 있도록 일숫돈을 얻어서라도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지요 .
그리고 이 못난 셋째 아들이 젊은 시절 한때 불우한 일을 겪자 , 제 옆에 오셔서 묵묵히 의식주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어머니... 그 시절 한겨울에 집 근처 반찬가게 다녀오시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왼쪽 손목 골절상을 입으신 일은 제가 죽어서도 못 갚을 은혜입니다 .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실 때 결국 요양원에 모시는 불효까지 너그러이 받아주신 어머니 , 주말에 면회 갔다가 돌아올 때면 자식 덜 힘들게 하려고 애써 웃어주시던 모습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큰형님 댁으로 모시던 와중에 , 정신이 흐릿하신 중에도 갑자기 또렷한 목소리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 일러주신 성경 구절이 자식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이 되었지요 .
요즘 열대야로 잠 못 이루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우리 7 남매가 사는 것’ 자체가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의 못 다한 삶을 이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로 헌신하신 두 분의 삶이 우리 7 남매 모두 바르게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식들도 후손들 잘 키워서 두 분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이제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추석 절기에 묘소로 찾아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
편집 : 김경애 편집위원
원문보기: https://hani.co.kr/arti/society/media/10093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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