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음전님께 올리는 막내딸의 글

2019년초 필자의 어머니 91살 생신 때 셋째딸네 집에 모인 6남매와 증손자 가족. 맨뒷줄 오른쪽 둘째가 필자, 셋째가 고 박음전님이다
2019년초 필자의 어머니 91살 생신 때 셋째딸네 집에 모인 6남매와 증손자 가족. 맨뒷줄 오른쪽 둘째가 필자, 셋째가 고 박음전님이다

 

그리운 엄마~,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200일이 훌쩍 넘었습니다. 32년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을 맞으니, 새삼 엄마를 지켜내지 못한 애통함에 사무칩니다. 하지만 엄마를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용기를 내었습니다.

엄마를 잃고 나자 세상이 온통 낯설고 슬픔 투성이입니다. 엄마 없는 큰오빠 생일엔 모이지도 못했고, 엄마 없는 큰언니 칠순에는 자매들만 모였습니다. 엄마가 안 계시자 끈 떨어진 풍선처럼 모두 뿔뿔이 흐트러진 모양입니다. 엄마의 고장 난 시계를 고쳐 손목에 두르고, 엄마의 원피스를 꿰매어 입고, 엄마 양말을 신고, 엄마 잠옷을 입고 누워 보아도 엄마의 부재는 채워지지 않아 꺼이꺼이 울고 맙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은아들 밥 걱정과 막내딸 우는 걱정은 절대 놓치 못하신 엄마, 이제 자리 잘 잡으셨을까요? 누운 자리는 편안하신지 다시 여쭙니다.

엄마는 1929년 12월 23일 태어나 19살에 25살이던 아버지와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농사일을 혼자 책임지다시피 하시면서도 자식들 공부하는 모습 보는 걸 가장 좋아하셨어요. 엄마가 풀을 매는 밭머리에서 수학책을 펼쳐 놓고, 명절 음식 하느라 분주하실 때에도 책만 붙잡고 있으면, 우리 딸 공부한다고 무조건 기뻐하셨지요. 돌이켜보면 그때 희숙 언니처럼 호미를 들고 전을 부쳐 엄마 일손을 돕는 게 옳았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회상 끝에 눈물의 끝은 항상 ‘엄마 죄송해요’가 됩니다.

1970년 7살 때 막내딸인 필자가 아버지(이종수) 어머니(박음전)와 함께 했다.
1970년 7살 때 막내딸인 필자가 아버지(이종수) 어머니(박음전)와 함께 했다.

 

“할머니! 할머니가 포대기로 업어 길러주셨는데 제가 할머니 관 끈을 잡았어요!”하며 오열하던 은이가 이제 대학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엄마는 칠순 훌쩍 넘기고도 담이, 은이를 길러주면서 틈틈이 노인대학에 다니셨지요. 부러 한자반에 들어가 모르던 글자를 배우는 기쁨을 엄마의 일기에서 봤어요. 제게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물어서 원리를 이해하시곤, 장 담글 때나 24절기를 달력에서 찾을 때 더 이상 동물 그림으로 짐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며 즐거워하셨어요. 제가 한문 선생이 된 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거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지난 3월 1일 고 박음전님의 삼우제에 온종일 비가 내렸지만 거의 모든 가족들이 모였다. 필자의 조카가 사진을 찍으며 웃기는 바람에 모두 울다 웃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지난 3월 1일 고 박음전님의 삼우제에 온종일 비가 내렸지만 거의 모든 가족들이 모였다. 필자의 조카가 사진을 찍으며 웃기는 바람에 모두 울다 웃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82살 때 뇌졸중을 이겨내시고, 그뒤 두 번의 고관절 수술을 받고도 거뜬히 일어나 걸었던 엄마여서 92살 겨울에 병석에 누우셨을 때에도 금방 쾌차하실 줄 알았습니다. 엄마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그저 일어나시려니 기대했습니다. 93살 생신을 축하하는 노래를 눈물로 부르자 작은오빠가 덮어 준 무릎 포대기에서 손을 힘겹게 빼어 박수를 치시고는 “희숙이, 희경(복순)이, 후순이, 니네 왜 우니?” 하셨지요. 우리가 결혼해 자녀를 두자 엄마는 더 이상 이름을 부르면 안되고 누구의 에미, 애비로 호칭하시는 것이 어른으로 대접하는 법도라고 하셨는데, 그날은 어릴 때 이름으로 불러 주셨지요.

돌아가시기 보름 전이었는데도 곧 쾌차하실 줄 알았으니 미련하기만 하였습니다. 이날부터 엄마를 밤새 지키고 엄마 방에서 함께 모시고 잤으면, 엄마를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작은오빠는 지금도 슬퍼합니다. 100살, 장담하셨는데 뜻을 받들지 못하여 더욱 죄송하고 안타깝고 그립습니다.

엄마는 뒤늦은 막내의 결혼에, 다 보내고 나니 자다가도 웃을 만큼 행복하다 하셨지만 93년 일생, 얼마나 힘에 부치고 서럽고 고단한 삶이셨습니까? 이제 무거운 삶의 짐 벗었으니 평안하게 쉬세요. 엄마가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에게 큰 그늘막이 되고 형제와 이웃에게 조금씩 나누고 갚으며 근면하고 검소하게 평생 배움의 자세로 지혜롭게 늙어가겠습니다.

엄마 잃은 2남4녀 모두 구심점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만, 차차로 엄마의 뜻 되새기며 형제간 우애하고 보시기에 좋도록 살아가겠습니다. 엄마 너무나도 그립고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4s부천/이희경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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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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