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슈만과 함께 명상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던 레이첼은 지난 주에 주문한 책이 생각났다. <빛과 그리움>이라는 책이었다. 저자는 여행 작가 스티브 E.넬슨 이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아 한나절이면 다 읽을만한 내용이었다. 책의 첫 구절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 그리움은 빛을 타고 흐른다. 사랑하는 님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한숨을 쉬기도 하고 영욕의 세월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그리움은 빛을 타고 흘러간다. 광활한 우주 공간에 펼쳐져 있는 무수한 별빛을 따라 영원한 미래를 꿈꾸며 거침없이 흐르기도 하고, 달빛에 머물러 애잔한 마음으로 서글픈 과거의 한 때를 회상하기도 하면서 그리움은 하염없이 흐른다.  달빛과 별빛을 타고 흐르던 그리움은 수십 억 광년의 시공을 가로질러 꿈과 황홀의 경지를 넘나들다가 드디어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만나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긴 여행에 지쳐 쉴 곳을 찾던 그리움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어느 정체모를 희미한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해 질 녘의 노을은  빛과 그리움의 절정이다. -

 (출처 : Pixabay)
 (출처 : Pixabay)

 

 책을 다 읽은 레이첼이 숲속의 오솔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은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는 글이다. 내면 깊이 인간의 심성에 다가가는 영성 가득한 책이었다. 여행 작가로서 유럽을 돌아다니며 저자의 느낌을 담아 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스티브가 썼다는 말인가. 암만 생각해도 이 책을 스티브가 썼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에서 풍기는 언어는 스티브가 커뮤니티에서 토론하거나 사석에서 말할 때  구사하는 언어와는 사뭇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어구사뿐만 아니라 언어 수준과 품격이 다르다. 스티브의 저급한 사고방식이나 언어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스티브에게 찾아가 본인이 쓴 책이 맞냐고 따져서 될 일도 아니다.  

마침 스티브에 관한 안좋은 소문이 무성하게 일고 있었다. 메로나 마을 주민들은 스티브가 술을 먹으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곤 한다며 스티브를 비난했다.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일삼는가 하면 상스러운 막말을 하기도 하여 주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자신이 한때 수필가 겸 여행작가였다고 자랑을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주민은 없었다. 

스티브가 술자리에서 언젠가 술이 곤드레가 되어 자신이 과거 소시적에 런던에서 어리고 예쁘장한 소녀들을 여러 명이나 겁탈했다며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이 자랑삼아 얘기했다는 출처불명의 소문도 들려왔다. 스티브와 술자리에서 어울리며 스티브의 성품을 잘 아는 커뮤니티 회원들은 스티브에 대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색을 했다.

레이첼은 이 책의 저자가 스티브라는 사실에 대해 추리를 이어나갔다. 이  책의 저자가 스티브가 맞다면 현재 메로나 마을에 있는 스티브는 가짜 스티브일 것이다.  가짜 스티브가 진짜 스티브 행세를 하고 있다면 가짜 스티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메로나 마을에서 스티브 행세를 하는 자는 누구일까. 혹시 스티브의 쌍둥이 형인 조나단이 스티브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 가짜 스티브의 정체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그때 문득 다비드가 떠올랐다. 다비드를 찾아가서  확인할 게 있다. 레이첼이 다급하게 다비드를 찾아갔을 때 마침 다비드는 둥가돌프로부터 스티브에 관한 보고를 받은 뒤였다. 보고에 따르면  스티브와 조나단 쌍둥이 형제의 모친인 넬슨 여사로부터 조나단에 대한 실종신고가 들어와 런던 경시청에서 조나단의 행방에 대해 수소문 중이라고 한다. 다비드는  레이첼을 반갑게 맞이했다.

"무슨 비상사태라도 터진 거요? 표정이 몹시 다급해보이는구만."

"몇 년 전에 실시했던 행복 경시대회를 기억하시나요?"

"그걸 기억하지 못하면 저 세상에 가야지. 행복 경시대회는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요?"

"급히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그때 참가자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아직 간직하고 계시다면 그 답안지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레이첼의 요청에 다비드는 의아해 하면서도 당시의 답안지를 찾아 보여주었다. 레이첼은 그 중에서  스티브의 답안지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레이첼이  다비드에게 답안지에 쓰인 스티브의 필체를 보여 주며 말했다.

"필체를 자세히 보세요. 이 필체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글씨체입니다."

"아니, 필체만으로 어떻게 그것을 단정지어 말할 수 있다는 말이오?"

"잘 보세요. 큰 글씨체와 작은 글씨체가 뒤섞여 있고, 빠르게 휘갈긴 글들이 보이지요. 게다가 글들이 다른 글들을 서로 침범하고 있어요. 또한 펜으로 눌러쓴  필압이 매우 강합니다. "

레이첼이 알고 있는 바에 의햐면 필체에는 사람의 심리와 그 사람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다. 글씨체에는 성격과 성장 과정, 취향, 빈부가 집약될 수 있다. 지나치게 불규칙하거나 글자가 다른 글자의 공간을 침범하는 경우는 주로 범죄자에게 많이 나타나는 글씨체이다.

다비드가 생각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그런 걸 필적학이라고 하지요.  시몬 드 보부와르의 '위기의 여자'라는 책에서도 글씨로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는 내용이 나오긴 합니다만." 

레이첼이 그에  덧붙여서  말했다.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필적학에서는 글씨의 크기나 필압, 속도, 기울기 등에 따른 형태, 글자간의 간격과 행간이 주는 전체적인 조화 등을 분석하여 글을 쓴 사람의 심리적 상태와 의도, 나이, 성별 등의 정보를 얻어냅니다. 그 덕분에 필적학은  범죄 수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비드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레이첼은 생물학 박사로 알고 있는데  범죄수사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이 많군요."

"별 말씀을요.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어서 조금 들여다봤을 뿐인걸요."

그러자 다비드가 물었다.

"이런 글씨체가 소시오패스의 특징이다?  그래서 스티브가 소시오패스라도 된다는 말이요?"

"여기 쓰여진 스티브의 글씨체는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글씨체인 것이 분명합니다."

                                                                                  (사진 출처 : PxHere)

 

한 때 모사드에 근무하면서 범죄심리학을 공부할 때 레이첼은 글씨체로 소시오패스를 판별하는 법을 배웠다. 소시오패스는 겉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여성의 인권을 두둔하며 훌륭한 사상과 인격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약자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일수이며 거의 매일밤 포르노 비디오에 묻혀서 살기도 한다. 그렇게 살다가 기회가 되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다비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레이첼에게 말했다.

"소시오패스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하지요. 하지만 소시오패스라고 해서 무조건 냉혹한 살인자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어요. 마사 스타우트 하버드대 교수는 소시오패스가 반드시 살인자는 아니며 모든 살인자가 소시오패스인 것도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어요."

레이첼이 다비드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을 타고나기 때문에 소시오패스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설마 그러겠어'라고 이들의 악행을 믿지 못하거나 선의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소시오패스를 대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함정이고, 소시오패스는 이를  이용한다는 게 문제지요."

"토론은 나중에 하고,  어서 스티브의 필체를 근거로 하여  스티브의 정체를 파헤쳐 봅시다."

다비드의 재촉을 받은 레이첼은  스티브의 답안지를 스캔으로 떠서 잘 알고 지내던 런던 경시청 간부에게 보냈다. 런던에서 한 시간도 안되어 조사결과를 보내왔다.

- 그 글씨체는 쌍둥이 형제중의 형인 조나단의 글씨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따라서 그 글씨체의 주인공은 스티브가 아니고 폭행과 사기, 강간을 저질렀던 전과 5범 조나단입니다. -

그 근거로 런던 경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나단의 글씨체를 보내왔다.다비드가 보기에도 행복경시대회에서 스티브가 제출했던 답안지의 글씨체와 똑같았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보다 확실한 증거를 위해 스티브가 제출했던 답안지 원본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레이첼이 즉시 특급 항공편으로 스티브의 답안지 원본을 특수 비닐에 싸서 런던에 송부했다.  경시청에서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답안지에 묻어있는 지문을 확인한 결과 전과자 조나단의 지문과 100퍼센트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레이첼과 다비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로나 마을에 있는 스티브는 실제의 스티브가 아니라 스티브의 쌍둥이 형인 조나단이다. 사기와 강간 전과가 있는 조나단이 현재 스티브 행세를 하는 자의 정체였다.  마을을 어지럽히던 똥파리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다비드는 즉시 윤리위원장 사라폰티와 보안국장 둥가돌프를 불러  이 사실을 알렸다. 

                                                      (쌍둥이 형제 - 사진출처 : PxHere)

 

소식을 전해들은 사라폰티가 흥분되어 말을 했다.

"필적은 '뇌의 흔적'이라는 말이 있던데 레이첼이 뇌의 흔적으로 범인을 찾았군요."

둥가돌프가 통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필적을 통해 스티브 행세를 하는 조나단의 뇌를 발견한 셈이군요."

그러자 레이첼에게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알았어요. 행정실장 디루카송이 서류 처리 과정에서 스티브와 시비가 붙은 것도 어쩌면 쌍둥이 형인 조나단이 스티브로 서류를 위조했기 때문에 벌어진 게 분명해요."

다비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디루카송에게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요."

다비드와 레이첼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레이첼의 비상한 노력으로 쌍둥이 형 조나단이 여행작가를 사칭하며 동생인 스티브 행세를 해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레이첼은 다비드가 메로나 마을의 현자라고 불리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레이첼은 궁금한 것은 못 참는다. 다비드에게 질문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시고 헹복경시대회를 여신 건가요? 행복경시대회에서  행복에 대한 답변을 이메일로 보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회의장에 모여서 펜으로 답안지를  직접 작성하게 하셨잖아요."

기실 다비드는 행복경연대회를 열면서 그걸 염두에 두었던 건 사실이다. 글씨체를 통해 주민들의 성격과 품성을 알아 볼 겸 해서 그리 한 것이다. 다비드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걸  미리 예상했다면 내가 여기 있겠어요? 유명한 점쟁이가 되서 떼돈을 벌고 있겠지."

레이첼도, 사라폰티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쨌든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제 스티브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메로나 마을이 조용해질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알렉스라고 해도 한 풀 기가 꺾일 것이다.

다비드는 새삼  레이첼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레이첼은 마치 외계의 프레데터에 대항하여 싸우는 여전사 같아요. "

레이첼이 놀랍다는 듯이 답변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얼마전에  여전사가 되어 프레데터를 무찌르는 꿈을 꾸었거든요."

한편 런던 경시청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넬슨 여사의 신고로 조나단이 실종되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메로나 마을에 조나단이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수사방향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실종자는 조나단이 아니라 스티브였다. 휴대폰 추적 결과 스티브의 휴대폰이 메로나 마을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조나단이 스티브 행세를 하며 스티브의 휴대폰으로 모친인 넬슨 여사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형 조나단이 동생 스티브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스티브를 살해하고 스티브의 휴대폰으로 스티브 행세를 해왔을 거라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뿐 물증이 없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메로나 마을의 조나단을 용의대상자로 올리고 스티브의 시신을 찾는데 주력했다.  

넬슨 여사는 쌍둥이 형제가 집을 방문한 날 형제가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조나단이 성격이 거칠고 포악하여 온순한 스티브에게 폭행을 가한 건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폭행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런던 경시청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일주일 간 넬슨 여사의 자택 주변을 집중 수색한 결과, 넬슨 여사 자택에서 2백미터 떨어진 늪에서 목에 칼에 찔린 흔적이 있는 스티브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스티브를 죽인 칼이나 조나단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시청에서는 일단 조나단을 살해 용의자로 간주하고, 메로나 마을에 형사를 급파하여 조나단의 행적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여차하면 체포할 수 있도록 조나단을 밀착 감시하도록 했다.

<4부>  /  <끝>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