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과 달콤한 사랑에 빠진 엘리스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알렉스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알렉스의 동향을 파악하고 결정적인 단서를 잡기 위해 잠시 결탁하고 있지만 그리 마음이 편치는 않다. 닉과 사랑을 나눈 다음날 마을 오솔길에서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다비드를 만났다. 제법 찬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의 아침이었다.

"요즘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엘리스의 위로에 다비드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시를 읊었다.

"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꽃을 더듬는 내 손을 거두지 않는다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에"

"혹시 조르드 상드의 '상처' 라는 시, 아닌가요? 저도 그 시를 좋아해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그럼요. 시에서 덤불 속의 꽃은 꿈과 욕망이고, 꽃의 향기는 행복과 즐거움이지요. 덤불 속의 가시는 욕망의 대가로서 치러야 할 고통이자 아픔이며 시련이겠구요."

그러자 다비드가 다음 연을 읊어본다.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견뎌낸다"

"참 가슴아픈 구절이죠.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상처까지도 견뎌야 하니까요."

다비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늘 엘리스와 마음이 통했군요. "

"다비드, 이제 마을의 소란도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아요. 힘을 내세요."

메로나 마을에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다. 스티브와 알렉스를 비롯한 한시적 체류자들이 일으킨 사태 때문이다. 메로나 마을 사람들은 세상의 불안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마을에 입주한 사람들이다. 비방과 모함이 난무하는 작금의 사태에 처하여 마음속으로 몹시 불편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는 온갖 사악한 세력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다비드가 엘리스에게 독백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사랑이나 욕망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주요 동기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선과 지혜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랑이나 욕망은 그 폐해가 말할 수 없이 크다오. 세상이 완벽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사랑이나 욕망이 본질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사랑이나 욕망이 불안정한 이유는 인간의 심성이 선과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사랑은 쓸쓸하고, 욕망은 허무하며, 기나긴 회한과 미련만이 그 빈자리를 메우기 마련이라오."

엘리스는 다비드의 말에 찔끔했다. '나와 닉의 사랑을 두고 하는 말일까.'  다비드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건 아닌 듯 보였다. 다비드는 마을 주민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스티브나 알렉스 같은 자들에게 윤리위원이나 마을 주민들이 겪을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그저 불쏘시개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겠지요. 그들은 마치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속은 추잡한 욕망과 미망으로 가득차 있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겪을  고통이나 상처는 안중에도 없어요."

"이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메로나 마을은 더욱 성숙하고, 주민들은 자신만의 행복이 아닌 지구와 인류 문명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요?"

엘리스의 말에 다비드가 엘리스에게 오른 손 엄지를 들어올렸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요! "  다비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출처 : PIXNIO)
(출처 : PIXNIO)

 

메로나 마을은 서서히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고 흙탕물 튕기는 이전투구로 변질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스티브나 알렉스가 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면 책임져야할  사람은 윤리위원회와 다비드일 것이고 이 사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퇴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 둥가돌프가 태고마을에 비밀리에  파견했던 요원이 메로나 마을에 돌아왔다.  등가돌프는 마을의 보안국장으로 프랑스 리옹 경찰청 경감 출신이다. 리옹에는 국제 인터폴 본부가 있고 리옹 지국장을 비롯하여  인맥이 두텁다. 얼마전에 등가돌프는  인터폴 리옹 지국장 자크베르에게 메로나 마을 사태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주고 스티브와 알렉스에 대한 긴급 신원조회를 요청하는 한편 보안 요원을 비밀리에 폴란드 태고 마을에 급파하여 면밀히 조사하게 했다. 둥가돌프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비드는 제2차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참석자는 지난번과 같이 윤리위원장 사라폰티와 레이첼 그리고 둥가돌프였다. 보안국장  둥가돌프가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태고 마을 관련 보고서>

1. 조사  대상

한시적 체류자 : 스티브. 알렉스, 발란스키, 헝티나, 샤몽키츠 (이하  D5라 칭함)

2. 조사 목적

-  D5는 메로나 마을에 입주를 신청할 당시 폴란드 태고 마을에서 거주한 사실을 숨겼으며,  이는  특정 목적을 가지고 메로나 마을에 입주를 신청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함. 익명의 제보에  의거  D5의 태고 마을에서의 행적을 조사할 필요성이 긴급하게 대두되었음.

-  D5는 현재 메로나 마을 지도층에  대한 불신을 유도하고 주민을 선동하여 윤리위원회와 주민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음. 윤리위원회에 대한 공격 또한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해 보여 메로나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이들에 대해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음.

3. 태고 마을에서의 행적

- 태고 마을은 마리앙팡 여사를 비롯한 가톨릭 영성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마을로서 스티브와 알렉스도 처음에는 그 취지에 동참하였으나 나중에 관계가 틀어지면서 갈라서게 되었음.

-갈등의 원인 :  알렉스가 신나치주의를 추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앙팡 여사가 알렉스를 멀리하고 경계하면서부터  관계가 틀어지고 태고마을은 갈등과 분열로 치닫게 되었음. 

-알렉스는 스티브를 비롯하여 발란스키와 헝티나, 샤몽키츠를 동원하여 마리앙팡 여사를 태고 마을에서 축출하려고 시도했고 성공하였음. 그러다가 모종의  타협을 하여 최근 마리앙팡 여사는 명예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나 허수아비에 불과한 명예직임.  막판 타협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알렉스는 자신의 추종자를 태고 마을 지도자로 앉혔음.

- 태고 마을을 장악했으나 마을의 기금이 바닥나고 마을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재정이 어렵게 되자  알렉스는 이를 빌미 삼아 메로나 마을의 막대한 기금을 탐내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을 대동하고 메로나 마을에 입주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짐. 

4. 대상자들의 인적 사항

-스티브 : 영국 국적. 쌍둥이 형제가 있으며 스티브는 동생이고 쌍둥이 형 조나단이 있음. 동생 스티브 E. 넬슨은 영국에서 프리랜서 여행작가 겸 수필가로 활동했으며 남부 유럽의 여행기를 수필 형식으로 쓴  '빛과 그리움'이라는 책이 런던에서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음. 형 조나단 E. 넬슨은  강간과 폭행 및 사기혐의로 구속된 바 있는 전과 5범으로 한 때 이슬람 테러 조직에서도 활동한 위험 인물로 알려져 있음.

- 알렉스 : 독일 국적. 본명은 히치파농. 1990년 독일 통일 후, 경제불안, 고실업률로 인해 독일에 수많은 신나치단체들이 생겨났는데 당시 알렉스도 사업실패 이후 신나치조직에서 활동하였음.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소문도 있음. 태고 마을에 입주하기 직전에 신분세탁의 일환으로 이름을 히치파농에서 알렉스로 바꾸었음.

- 발란스키 : 폴란드 국적. 알렉스와 극우 단체에서 만났으며 독일 작센 지방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 알렉스를 따라 태고 마을에 입주하였으며 마리앙팡 여사를 축출하는 데 앞장선 알렉스의 심복임. 현재 메로나 마을에서도  윤리위원회 공격에 앞장서고 있음.

- 헝티나 : 이탈리아 국적. 마리앙팡 여사의 측근이었으며 태고 마을의 어린이 보육원장을 지냈으나 어린이 학대 민원이 발생하자 마리앙팡 여사가 헝티나를 해임하였음. 마리앙팡 여사가 자신을 신임하기 보다는 주민의 말만 듣고 자신을 보육원장에서 해임한 것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되었음. 그 후  알렉스 편에 가담하여 마리앙팡 여사를 모함하여 쫓아내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음. 

-샤몽키츠 : 헝가리 국적. 태고 마을에서 월식 현상이 있던 날 사망했으나 알렉스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알렉스의 열광적인  추종자가 됨. 태고마을에서 마리앙팡 여사의 지지자들을 협박하고 폭행하면서  마리앙팡 여사를 축출하는 데  공을 세운 위험인물임 .

* 특이사항 a : 알렉스는 한때 자신의 몸에 늑대 십자(Wolf's cross)문신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짐.  신나치주의 웹사이트들은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인터넷 서버를 운영하면서  나치들이 사용했던 스바스티카(기울어진 만자, 字), 태양바퀴(Sun Wheel), 늑대 십자(Wolf's cross), 검은 태양(Black sun)을 사용하였음. 

* 특이사항 b : 알렉스가 '검은태양단'이라는 신나치조직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으나 범죄와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 만약 알렉스가 아직도 '검은태양단'과 연계되어 았다면 메로나 마을의 안위가 심히 염려됨. 이에 대비한 별도의 특별 조치가 검토되어야 함.

5. 향후 대응 방안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현재 메로나 마을의 한시적 체류자들은 매우 위험한 인물들로 여겨지며  즉각 추방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사료됨. -  하지만 메로나 마을 자체적으로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

현재 이들을 추방할 법적 근거는 없으며 메로나 마을이 소속되어 있는 레이크포레스트 시 당국에 조치를 의뢰하는 것 외에는 강제적인 수단이 없다는 것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됨.  

   (이상 보고 끝)

 

다비드가 둥가돌프의 보고를 바탕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레이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국 이들은 메로나 마을을 장악하여 기금을 탈취하는 게 목적이었군요."

(출처 :  PIXNIO)
(출처 :  PIXNIO)

그러자 다비드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메로나 마을에 기금이 많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마을 공동체 중에서 제일 재정이 풍부한 마을로 소문이 자자하게 났으니 알렉스도 그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겠지요."

둥가돌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메로나 마을에 기금이 많이 쌓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똥파리들이 몰려들은 셈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면 메로나 마을은 끝장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다비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들의 인적 사항을 주민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생각해봤으나 이는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저들은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보고서 내용은 메로나 마을의 보안 요원이 태고 마을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한 결과일 뿐 객관적인 입증자료도 없다. 이들을 당장 추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다비드는 이들의 범죄행위가 드러날 때까지 보고서 내용을 극비에 부치기로 했다. 일단 이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둥가돌프에게 레이크포레스트 시 당국과 문의하여 이들에 대해 어디까지 법적인 조치가 가능한지 긴밀히 협의하도록 했다.  

이들이 태고마을에서 벌인 행태로 미루어볼 때 머지않아 다비드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올 것이다. 윤리위원회와 자신을 몰아내고 마을의 주도권을 쥐어 기금을 탈취하려는 것이 이들의 최종 목적이다. 이들이 향후 어떤 모함과 음모를 꾸미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레이첼과 사라폰티는 각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사라폰티가 품은 의문은 샤몽키츠의 죽음과 소생에 알렉스가 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둥가돌프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태고마을에서 월식이 일어난 날 밤 샤몽키츠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알렉스가 죽었던 샤몽키츠를 살렸다고 했다. 샤몽키츠는 어떻게 죽었으며  알렉스는 죽었던 샤몽키츠를 어떻게 살려냈을까. 

한편 레이첼도 의문에 잠겼다. 둥가돌프에 의하면 스티브는 쌍둥이 형제 중의 동생으로 여행작가 겸 수필가이고, 형은 전과5범이다. 그 대목이 수상쩍다.  그동안 발언한 스티브의 언행이나  언어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스티브는 수필가나 여행작가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형인 조나단의 이미지에 가깝다. 스티브와 조나단  쌍둥이 형제에 대해 좀더 깊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레이첼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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