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벌어진 시각으로 가늠한 봉오동의 위치

북간도 봉오동은 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만나게 되는 곳이다. 저 멀고 황량한 만주 벌판 어디쯤이 아니라 독립군이 되고자 마음먹은 청년들이 얼마든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두만강에서 15, 보통 걸음으로 두 시간 정도, 훈련된 장정이면 한 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한 거리에 봉오동이 있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니 두만강변의 도시 도문에서 차로 5분만에 봉오동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알리지 않고 봉오동에  도착해 두만강변 도시 도문에 살고 있는 6촌에게 전화하니 자전거로 금방 갈 테니 15분만 기다리라고 답을 들었던 곳이다.

1920년 6월 봉오동 독립전쟁 당시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독립군기지를 발본색원하기로 결정한 일본군 토벌대가 두만강을 건너 공격해온다는 것을 첩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각 연대의 본부를 미리 산위에 옮겨 주둔케 하고 진입로가 보이는 위치에 참호를 파고 매복전을 준비하는 등 철저한 대비를 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64일 대한북로독군부의 공격으로 강양동전투를 치른 일본군은 이틀 동안 봉오동독립군기지 토벌을 준비했다. 봉오동 공격준비를 모두 마친 일본군이 66일 밤 10시에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처음 계획대로 도문시를 거치지 않고 거리가 짧은 안산 쪽을 택해 밤새 강을 건넌 일본군이 대오를 정비하고 진군하던 중 봉오동으로 가는 길목 안산에서 독립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했다. 새벽 330분경이었다.

안산에서 한 차례 전투를 치른 일본군은 봉오동으로 향하는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봉오동을 둘러싸고 있는 고려령을 넘기 시작했다. 몰래 산을 넘어 봉오동 독립군기지를 급습하는 작전을 실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과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는 이미 그들의 작전을 간파하고 고려령 1200m 고지에 분대장 리화일과 병사들을 배치해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새벽 6시반경 고려령에 도착하자마자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또 전투를 치러야 했다.

구글 사진으로 본 봉오동. 두만강을 건너 면  바로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구글 사진으로 본 봉오동. 두만강을 건너 면  바로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위 사진을 확대한 것으로 아래쪽에 보이는 길쭉한 검은 부분이 그동안 봉오동전투 현장으로 알려졌던 봉오동저수지다.   그곳에서 2~3km 더 들어가야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가 있고 그곳에서 4~5km 더 들어간 곳이 통합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와 연병장이 있던 곳이자 봉오동전투 현장이다. 
위 사진을 확대한 것으로 아래쪽에 보이는 길쭉한 검은 부분이 그동안 봉오동전투 현장으로 알려졌던 봉오동저수지다.   그곳에서 2~3km 더 들어가야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가 있고 그곳에서 4~5km 더 들어간 곳이 통합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와 연병장이 있던 곳이자 봉오동전투 현장이다. 

밤새워 봉오동으로 진격하는 사이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른 일본군은 대열을 재정비하고 산을 넘어 통합군단의 주축인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이자 최운산 장군의 저택이 있는 봉오동 중촌에 도착한 것이 1130분경이었다. 그런데 마을 전체가 마치 이주라도 한 듯 모두 집을 버리고 떠난 상태였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는 연병장이 있는 상촌으로 옮긴 뒤였으니 최운산 장군의 저택도 텅 비어 있었다. 마을을 샅샅이 살펴본 일본군은 우리 독립군들이 기지를 버리고 도망친 것으로 오해했다.

최운산 장군의 저택에서 마구간에 묶여있던 말 몇 마리를 발견한 일본군은 그 말들을 탈취했다. 한 마리는 지휘관이 올라타고 나머지 말에 일본군 무기수레를 대신 지웠다. 무거운 무기수레를 끌고 온 말이 산을 넘느라 지쳤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산 위에 독립군들이 참호를 파고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일본군은 독립군을 뒤쫓기보다 산을 돌아 회군하기로 결정하고산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대열을 이루고 나팔을 불며 행진하던 일본군이 독립군 연병장이 있는 봉오동 상촌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후미가 거의 연병장으로 들어왔을 무렵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공격 개시를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이렇게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가 시작된 시간이 오후 1시경이었다. 일본군은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공격에 맞닥뜨렸다. 엄청난 총소리에 깜짝 놀란 말이 높이 뛰어올라 자신을 타고 온 일본군 장교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무기수레를 끌고 온 말은 무기를 내릴 새도 없이 마을을 향해 거꾸로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7~8백미터 거리의 산위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진 일본군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오후 내내 전투가 이어졌다. 몇 시간동안 전투를 치르며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이 공격을 강화하던 4시반 경 그동안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계속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퇴각을 결정했다.

당시 패배를 인정한 일본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대한북로독군부 제2중대장 강상모가 부하를 이끌고 비파동 방향으로 퇴각하는 일본군 앞질러가 100여 명을 사살하고 다시 교묘히 본부로 돌아왔다. 그러자 당시 본진에 뒤이어 봉오동으로 들어오던 일본군 응원부대와 퇴각하던 일본군 본진이 폭우로 어두워진 날씨로 인해 서로를 확인하지 못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로인해 일본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 정규군을 완벽하게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봉오동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이 봉오동 길목을 지키던 대한북로독군부군의 공격을 받고 새벽 3시 반과 6시 반에 두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무거운 무기수레를 끌고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고려령 산을 넘어 왔음에도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는데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던 거리에 봉오동 독립군기지가 있다. 그 가까운 곳을 찾아가는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후손인 우리 형제들이 좀 더 젊었을 때 고향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과 후회에 가슴이 저리다.

처음 봉오동을 방문한 것은 2015년 가을이었다. 마을과 산을 돌아보면서 그곳이 봉오동 독립전쟁전쟁터였던 시간만이 아니라 그보다 오랜 세월 우리 가족들의 삶터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고향. 분명 낯설어야 하는데, 첫눈에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을을 품에 안은 것처럼 보이는, 봉오동을 둘러싼 여러 산들의 편안한 품새를 내 몸과 마음이 먼저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투현장인 상촌의 연병장을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와 연병장이 있었던 곳이다.
전투현장인 상촌의 연병장을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와 연병장이 있었던 곳이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생전 처음 찾아간 북간도 봉오동에서 고향을 발견했다. 사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은 우리 가족에게 늘 타향이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땐 부산 말을 편하게 사용하면서도 부산 사투리는 언제나 거칠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부산말보다 더 강력한 할머니의 함경도 사투리가 부담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할머니의 말을 통역해주면서도 창피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연변 말투로 기억되는 부모님과 할머니 사이의 따뜻하고 재미있는 대화는 진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세월이 너무 지나 이젠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던 그 말들이 처음 찾아간 봉오동에서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투박하지만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말씨, 강하면서도 친숙한 느낌의 함경도 말투에서 자연스레 고향을 느끼고 있었다. “맏아매(큰엄마)”, “올찌새미(올케)” 등 잊은 줄 알았던 단어들이 자연스레 할머니와 부모님을 불러냈다. 봉오동을 방문한 우리 형제들은 기억의 저편에서 소환되어 온 그리움으로 젊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봉오동을 걸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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