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7회 학술세미나 3

이번 세미나에서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의 생애와 친일 논쟁을 다룬 장우순 박사(안중근평화연구원)의 논문이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최진동 장군의 친일논란을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대하고 있었다. 주장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일이라는 단어의 선정성에 갇혀 학자들도 외면하고 있었기에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러한 주장이 단지 소문으로 존재했을 뿐 학계에서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미나에서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의 생애와 친일 논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장우순 박사 
세미나에서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의 생애와 친일 논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장우순 박사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이 친일이었다는 주장은 그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독립군 병사 한 명의 배반이라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일 텐데 북간도 수천 무장독립군들을 지휘하던 총사령관이 친일을 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분노할 일인가! 만약 그가 정말 친일을 했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친일행각을 했는지 소상히 드러내고 단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무장투쟁을 전공한 역사학자들조차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과 최진동 장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말 친일행위가 있었는지, 억울한 누명은 아닌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논란이 있는 인물이니 학자들이 일부러 기피했거나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지금까지 최진동 장군의 삶을 다룬 논문이 단 한편도 생산되지 않았다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면 북간도 무장투쟁사와 최진동 장군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데 연구자가 없으니 소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다후손들도 모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라 소문에 대응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최진동 장군은 당시 북간도 독립운동사의 중심적인 인물이라 그에 대한 사료는 얼마든지 구해서 분석할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실에서 최진동혹은 최명록을 검색하면 최명록이 258, 최진동이 240건의 관련 자료가 있다고 나온다. 자료의 양이나 내용면에서 대한민국의 무장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학술적으로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었던 사안이 수십 년 간 방치되면서 선정적 논란만 커져갔던 것이다

chlwlsehd wkdrnsdl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에게서 권총과 군복을 선물받고 홍범도 장군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chlwlsehd wkdrnsdl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에게서 권총과 군복을 선물받고 홍범도 장군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최진동은 동생 최운산과 함께 봉오동에 무장독립군기지를 건설했고 자신들의 재산으로 군자금을 감당하며 정예 독립군을 장기간 양성했다. 사재를 털어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군의 무기를 구입해 오는 등 전쟁에 완벽하게 대비했던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과 그 일가의 헌신이 있어 일본의 정규 군대와 격돌했던 봉오동과 청산리의 독립전쟁에서 우리 독립군 대한북로독군부가 대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전쟁을 총지휘한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을 최진동이 아니라 홍범도로 잘못 알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역사학계에서 그런 오류가 수정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발제자인 장우순 박사는 그 근원에는 친일파를 복권시켜 정권의 기반으로 활용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한 이승만이 있다고, 과거 이승만 정권은 권력을 독점하고 유지하기 위해 민족운동 세력을 빨갱이로 몰고, 독립운동의 성과를 독점하려 했음을 상기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유공자 서훈제도인 건국공로훈장령19494월에 제정되지만, 이승만 정권에서 서훈을 받은, ,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둘 뿐이다.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독점하고자 획책한 이승만의 파렴치한 자가 서훈이었다. 이승만 정권 기간 독립운동 유공자들은 탄압과 감시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20년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의 성과를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과장된 망설을 늘어놓은 이범석 등이 매설한 날조된 반공과 민족의 담론들이 더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이범석은 1971우둥불이란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1920년 북간도 독립전쟁의 중심을 봉오동이 아니라 청산리전투로 설정하였고, 김좌진과 자신의 역할을 과도하게 과장했다. 정치권력자가 묘사한 왜곡된 독립운동의 상은 정치적 담론으로 유통되면서 북한의 항일무장전통에 대응하는 독립운동의 유일한 정통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고 분석했다.

우둥불은 그동안 북간도 무장투쟁에서 살아남은 중요 독립군 지휘관의 증언이라는 이유로 마치 정사처럼 북간도 독립운동사 학술연구의 기본 사료로 오랜 기간 인용되었다. 그러나  그 책은 실명을 사용한 소설에 가깝다는 것이 최근 학계에서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유력한 정치가라는 이유로 한 개인의 증언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역사학계의 반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장우순 박사는 북간도 무장투쟁사의 왜곡이 이처럼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한국사회의 많은 적폐가 청산되거나 정상의 길을 찾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영역이 과거의 유령과 공존하고 있다. 아마 역사학도 그런 분야의 하나일 것이다. 창조된 전통과 이데올로기가 사실을 가리고, 사실을 주장하면 이단아가 될 수 있는 영역,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진영의 논리 속에만 존재하는 영역이 바로 역사를 다루고 연구하는 분야다.” 라고 연구문화의 폐쇄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많이 늦었지만, 지금의 이 논의가 한국 사회에서 최진동과 봉오동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관련 연구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논의를 전개한다.”며 자신의 발제가 지금까지 역사학계의 오류를 수정하는 단초가 되길 희망했다. 그는 최진동 친일의 근거라며 보훈처가 내놓은 문건에 대해 같은 시기 다른 문서에는 최진동은 불량선인의 수령이라는 완전 반대가 되는 내용의 첩보문서가 존재하고 그 이후 최진동은 독립전쟁을 더 가열차게 추진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는 문서가 존재한다.”며 전후 맥락과 행간을 살피지 않고 제기되는 친일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사실 이러한 소문은 공산국가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 최진동이 공산당을 반대한 지주라는 이유로 친일로 매도당하면서 생겨난 풍문에서 비롯되었다.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한 연변역사학자가 실체는 없지만 선정적인 '최진동 친일'이란 소문을 한국에 전달했던 것이다. 

당시 보훈처에서도 이에 대해 재조사를 했으나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정리된 사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2019년에 한 역사학자가 이 문제를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는 가짜 독립군이 드러나는 등 독립유공자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할 때였다. 그는 조사 대상에 오르지도 않은 최진동 장군이 친일이라며 곧 서훈이 취소된다고 단언하며 한 신문사에 제보를 했다. 서울신문은 전문가인 그의 말을 신뢰해 크게 보도(2019.7.17)했다. 그리고 보훈처 공훈심사위원회는 위원장인 그의 의견대로 최진동 장군이 친일이라고 판단하는 공식 절차를 진행했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후손들에게 소명 절차를 알려주고 응하라고 제대로 요청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가능했을까?

장우순 박사는 친일파는 일제의 침략기나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제에 이익이 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한 사람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제시하면서 최진동이 친일파라는 근거로 제시된 문헌이나 기록들은 한결같이 그를 친일파로 확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는 빈약하다.”고 확언하면서, “이 정도로 빈약한 근거를 들어 친일을 주장하는 사람은 어떤 그릇된 신념이 있거나 관련 지식이 많이 부족한 사람일 거라고 혹평했다. ‘스스로 정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린 뒤, 판단에 맞추어 그 자료를 제시했다면 이는 연구의 절차상으로도, 행정적 절차상으로도 본말이 전도된 커다란 오류라는 것이다.

또한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을 거친 뒤, 판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일반적인 절차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미리 판단을 내리고 난 뒤에 그 판단을 밀어붙이기 위해 문제가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연구자라면 쉽게 범할 수 없는 이렇게 크나큰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최진동이 친일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조악한 근거를 제시하였다면, 이 주장 뒤에는 분명 특정 세력이나 특정인의 이해, 혹은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독립유공자를 평가하는 일은 이보다 훨씬 더 예의를 갖추고,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유공자들을 마치 시정잡배 다루듯이 문서 하나 툭 던져놓고 친일파라고 낙인찍는다면 누가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누가 조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고 논란의 중심에 있는 국가보훈처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제7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제7회 학술세미나 포스터 

또한 절차적 정당성과 학문적 엄밀함이 결여된 평가가 보훈처의 독단으로, 혹은 뒤에서 사주하는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다면 더 이상 국가보훈처의 공훈심사기능은 존속될 이유가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사의 기준이 달라지고 심사위원이 바뀔 때마다 심사의 결과가 달라진다면 이런 심사가 왜 필요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심사기능을 외부의 위원회를 만들어 이전하거나 국회 내에 설치하여 정권의 향배와 관계없이 지속성과 원칙을 담보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심사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거의 유일한 해결의 방책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보훈처의 혁신을 강조했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 폐쇄적인 역사학계의 분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의 외침에 감사를 전한다. 역사학은 해석학이다. 죽어있는 과거를 파헤치는 학문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학문이다. 최진동 장군은 북간도 무장투쟁의 중심에서 절대로 비켜갈 수 없는 인물이다. 중국에서 발간된 책을 참고하고 있어 가족사를 정리한 부분에 오류가 많이 있지만  광복 77년 만에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첫 논문이 발표되었다.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의 대서사를 제대로 밝히는 첫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