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7회 학술세미나 소식2

2주제 봉오동전투 서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의 최은주가 지난 100년간 역사학계에서 봉오동 독립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는지 기존의 연구를 모두 살펴보고 학술적 오류와 왜곡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사실 만주지역 무장투쟁사는 대부분의 연구가 일제 밀정보고서 등 일제문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고, 국내에서 사료 발굴이 어려웠던 탓에 교차분석을 통한 학술적 성찰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얼마든지 현장을 답사하고 중국자료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북간도 무장투쟁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숫자가 적은 탓인지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관심이 부족했다한중수교 3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부정확하고 오류가 많았던 60~70년대의 논문을 연구에 재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봉오동 독립전쟁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근거지 봉오동으로 일분군을 끌어들여 승전을 이룬 대규모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전쟁사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이 북간도로 건너와 잠시 머물며 이루어낸 게릴라전으로 묘사되면서 전쟁의 규모도 역사적 사실도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

학술세미나 발표자들과 참석자들
학술세미나 발표자들과 참석자들

1차 독립전쟁 승전이라 불린 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로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운동 열기를 다시 살린 횃불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오동 독립전쟁의 시작과 끝을 본격적으로 살핀 연구논문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봉오동 관련한 연구의 대부분이 홍범도 장군 개인의 일생에 천착하면서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는 그의 영웅적 업적으로만 설명되고 축소되었다.

중국과 수교 후 봉오동 독립전쟁 전투현장 답사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어찌 된 연유인지 한국의 역사학계는 봉오동 독립전쟁의 현장의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료를 바탕으로 얼마든지 비정이 가능했던 전투현장의 위치를 몰랐다는 것은 관련 전문가들이 그만큼 그곳에 대해 집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과학적 근거로 고대사의 흔적도 추정해 내는 시대에, 겨우 100년 전의, 얼마든지 발로 걸어보고 확인할 수 있었던 전투현장의 위치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상촌의 실제 전투 현장과 수몰된 것으로 알려진 저수지는 약 10km 거리다.(구글 어스 지도 위에 표시했다)

1980년 경 봉오동에 댐이 생기면서 봉오동의 원주민들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당했다. 봉오동의 세 마을(상촌 중촌 하촌) 중 제일 아래 마을인 하촌이 물에 잠겼다. 그런데 당시 봉오동을 찾았던 누군가가 봉오동 하촌이 물에 잠겼다는 말을 듣고 봉오동 독립전쟁 전투현장이 물에 잠겼다고 한국에 잘못 전달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 역사학계는 봉오동 독립전쟁의 현장이 모두 댐 아래 잠겨있다고 역사화 했다. 지난 30년 간 모든 책과 논문이, 다큐가 답사단이 전투현장이 수몰되었다고 기정사실화 했고, 그렇게 왜곡된 채 세월이 흘렀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2016년부터 여러 차례의 현장답사와 사료 확인을 통해 봉오동 독립전쟁의 현장은 알려진 것처럼 봉오저수지 아래 수몰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10km 정도 더 산으로 들어간 상촌의 연병장과 그곳을 둘러싼 산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매복했던 참호가 전투현장인 각 산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올해 본부가 있던 중촌에서 대형 연병장터와 막사터도 발견되었다.

1920년 6월 7일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이 몸을 숨겼던 참호에는 지난 100년 간  쌓인 낙엽이 가득차있다. 
1920년 6월 7일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이 몸을 숨겼던 참호에는 지난 100년 간  쌓인 낙엽이 가득차있다. 

19203월과 4월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한 최운산 장군이 무기와 군복, 식량 등 군자금 제공을 약조하여 북간도 독립군 단체들이 통합을 이루었고, 1920519대한군무도독부국민회가 결합하면서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창설이 마무리되었다. 당시 국민회군에 합류해 있던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전투가 발발하기 직전에야 봉오동으로 왔다. 참호를 파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등 치밀한 작전계획으로 전쟁 준비가 완료되어 있을 때였다. 그는 독립전쟁 전체를 지휘하는 위치가 아니라 당시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을 책임지는 연대장이었다. 최은주의 논문은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 사료로 설명하고 확인했다.

1920년의 상해임시정부 군무부가 봉오동 독립전쟁에 대해 발표했던 北墾島我獨立軍의 전투보고와 일본군이 기록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봉오동전투 연구의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가 봉오동전투에서 이긴 것을 강조하고 일본군이 몇 명 전사했는지를 확인하는 참고자료로 발표문의 일부만을 인용했을 뿐, 이 두 문서 전체를 제대로 분석한 연구는 없었다. 그만큼 봉오동 독립전쟁 자체에 대한 구체적 연구 성과가 축적되지 않았다.

1920년 12월에 독립신에 보도된 임시정부 군부부 발표문 "北墾島에 在한 我 獨立軍의 戰鬪 情報(북간도에 재한  아독립군의 전투정보)"

일본군이 왜 다른 곳이 아닌 봉오동으로 쳐들어왔는지,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은 어떤 곳인지, 누가 살고 있었는지, 당시 북간도와 봉오동의 정치사회문화적 배경은 어땠는지, 특히 봉오동을 근거지로 대부분의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고, 봉오동 독립전쟁의 최전선에서 승리의 견인차가 된 정예부대 대한군무도독부는 어떤 독립군부대였는지 주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대한군무도독부가 중심이 되어 봉오동에서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되었으며,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승전한 것은 이순신의 명량대첩 이후 일본군과 겨룬 현대전 최초의 승리라는 역사적 의미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매복전으로 일본군을 대패시킨 전투라고 서술한다. 바른 기록이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매복전은 단순한 숨바꼭질이 아니다. 참호를 파고 전쟁준비를 하는 일은 게릴라전에서는 불가능하다. 군인들이 몸을 숨기고 전투를 할 수 있는 규모의 참호는 하루 이틀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군대가 아니면 미리 준비하기 어려운 작전이다. 또한 매복전은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 군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이다.

목숨을 걸고 전투를 수행 중인 군인이 무기를 든 일본군이 눈앞을 지나가도 총을 쏘지 않고 경계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전투경험이 없는 병사들은 무서움과 긴장감을 못 견뎌 적군이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총을 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대한국로독군부 독립군은 적의 후미가 모두 아군의 포위 중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사령관의 사격개시 총성을 듣고 눈앞의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봉오동 독립전쟁은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준비된 전쟁이었다.

제일 왼편의 반병률 교수가 발언 중이다.
제일 왼편의 반병률 교수가 발언 중이다.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192067일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승전한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 최진동 장군과 실질적으로 봉오동 군사기지를 운영한 참모장 최운산 장군 형제의 업적을 오랫동안 외면했다. 그리하여 봉오동에 독립군기지로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씨 일가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했던 수천 독립군의 목숨 건 헌신까지 모두 잊혀져 버렸다.

봉오동전투에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을 마주한 일본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패전한 직후 기록한 봉오동전투상보에 (독립군)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8백미터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 지형을 이용해서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또 용감하게 싸운다.”고 대한북로독군부의 전투력을 평가했다.

1920년 봉오동 독립전쟁 직후 일본군 이 기록한
1920년 봉오동 독립전쟁 직후 일본군 이 기록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 

 

또 다른 보도서는 봉오동에 있는 독립군부대가 정식의 군복을 착용하고 그 임명 등에 사령(辭令)을 쓰고 있으며 전적으로 정규군과 같은 통일된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며 (대한북로독군부) 병사들의 복장은 상하가 황색이고 모자 또한 같은 황색으로 태극 견장을 달았으며 예복에는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달고 헌병대는 오른쪽에 검은색 흉장을 달았다. 그리고 장교들은 모자와 견장에다 금줄을 넣었다.고 상세히 기록했다. 태극 견장과 매화형 금장과 금줄을 넣은 군복을 입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군인과 장교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며 대한북로독군부가 단순히 전투를 위해 급조한 군대가 아닌 오랜 시간 준비와 양성을 거친 정식 군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무장투쟁의 열기가 뜨거웠던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간도의 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간도는 재외 불령선인단 전 세력이 집중하는 곳으로 이 지역에 있는 각 불령단의 무력은 즉 조선독립 표방자가 가진 위력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상해임시정부도 간도의 무력단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 또 조선 내에 있는 무식한 자들은 간도의 무력단체의 위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자칫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간도의 불령선인단은 조선 내의 치안 유지상 가장 중시해야 한다.”(朝鮮總督府警務局, 間島ケル不逞鮮人團狀況,大正910)

일제는 상해 임시정부가 그 존재를 인정받고 민중들이 독립의 가능성을 믿는 근거가 간도의 무장단체의 위력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 간도의 무장독립군 세력의 중심에 봉오동의 대한북로독군부가 있다. 봉오동전투에 관한 서술에서 북간도에서 역사적 대통합을 이루어내고 봉오동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부대로 대한북로독군부를 분명하게 적시해야 하는 이유다.

좌장을 맡은 반병률 교수는 기존 역사학계에 던지는 최은주가 문제 제기한 내용의 2/3은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역사학계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답을 했다. 문제제기한 내용 중 대한북로독군부 결성에 대해 자신이 표현했던 대한군무도독부, 국민회, 대한독립군 3단체연합이라는 규정을 역사학계가 오랫동안 재인용했는데, 오류였음을 인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여러 쟁점은 앞으로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고 정리했다.

봉오동 독립전쟁사는 앞으로 확인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채로 남아있다. 당시 일본과 중국의 외교문서를 비롯 중국 각 지역의 관련 보고서, 러시아의 자료에 대해서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봉오동 독립전쟁사는 100년이 지난 최근에야 그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사학은 해석학이다. 한두 문장으로 기록된 사실에 역사의 옷을 입혀가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을 비롯한 북간도 무장투쟁사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이유로 옷을 잘못 입었다면 이제라도 역사의 진실이라는 깨끗한 새 옷을 다시 입게 해야 한다.

 

편집: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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