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기념사업회 제7회 학술세미나 소식 1

지난 623일 국회 제3세미나실에서 독립군기지 봉오동의 주역 최진동과 최운산 형제를 주제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7회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2022년 6월 23일 축회 제3세미나살에서 열린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7회 학술세미나 

국회에 도착해 세미나 준비를 시작할 무렵부터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학술세미나를 마친 참석자들과 함께 폭우를 뚫고 뒷풀이 장소로 가야 했다. 신발도 옷도 등에 맨 가방도 물에 잠긴 것처럼 다 젖어버렸다. 우산을 쓰고도 속절없이 비에 젖으며 걷다보니 자연스레 102년 전 67일 봉오동전투의 그날을 떠올렸다

만주엔 겨울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 봉오동전투에 등장하는 독립군 여러 명이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다. 그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만주독립군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러나 독립군들의 근거지 북간도는 겨울만 있는 동토가 아니다. 북간도의 날씨는 봄이 남쪽보다 한 달 정도 늦게 오고 겨울은 한 달 빨리 온다. 겨울이 조금 더 길 뿐이다. 어떤 전쟁이든지 날씨는 중요한 변수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를 비롯해 많은 전쟁사에서 적군이 아니라 추위나 더위와 싸운 이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봉오동전투가 있었던 67일은 북간도에서도 봄이 한창일 때다. 그 한봄에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토벌대와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격돌한 봉오동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격렬한 총격전이 4시간 이상 지속되던 중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가 쏟아지며 아이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졌다. 날씨가 나쁠 때는 지형지물을 잘 아는 그 지역 군대의 전술이 유리한 법이다. 봉오동전투 승리 후 봉오동의 독립군들은 위기의 순간에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고 믿었다. 전투의 승리를 넘어 대한민국의 독립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독립군기지 봉오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평가"에 대해 발표하는 김영환 박사

 

1주제 독립군기지 봉오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평가” -최운산·최진동 형제의 역할을 중심으로- 발제를 맡은 김영환 박사는 우리에게 전투공간으로만 기억되고 있는 만주 봉오동이 사실은 최운산 장군과 그 형제들에 의해 오랜 기간 준비된 군사기지였다는 것, 그리고 토지와 사람, 자금이 있어야 군대가 운영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봉오동은 192067일 단 하루의 전쟁이 벌어진 곳이 아니라 명실공히 당시 북간도 제1의 군사기지였으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독립군기지 봉오동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후손들의 기억과 연변지역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전설처럼 남아있는 봉오동 독립전쟁 역사가 바르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봉오동이 전투공간만이 아니라 대규모 무장독립군기지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의 장군이 10여년의 노력을 기울여 건설한 군사기지 봉오동의 역사를 되살려야 왜곡되고 축소된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전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환 박사는 육사 출신으로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을 전공한 젊은 학자다. 그는 구글어스라는 최신 프로그램을 역사연구에 활용해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의 중촌에서 대형 연병장터와 막사터를 찾아냈다. 그는 1915년에 연병장과 막사 3동을 건설에 함께 했다는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의 구체적 증언에 유념했고, 군인의 눈으로 현장을 보면서 100년 전 봉오동에 대규모 군대가 상주했다는 물적 증거를 직접 확인한 것이다.

구글어스 지도에 최운산 장군이 소유했던 지역 중 기록이에 남아있는 지역에 표시했다.
구글어스 지도에 최운산 장군이 소유했던 지역 중 기록이에 남아있는 지역에 표시했다.
 지도에 표시한 최운산 장군 소유지들의  실제 직선거리
 지도에 표시한 최운산 장군 소유지들의  실제 직선거리
 구글 어스로 확대해 본 군사기지 봉오동. 상촌,중촌,하촌으로  구성되어 있고 1920년 6월 7일 격렬한 전투가 벌아진  전투현장은 가장 깊숙이 들어간 상촌이다.
 구글 어스로 확대해 본 군사기지 봉오동. 상촌,중촌,하촌으로  구성되어 있고 1920년 6월 7일 격렬한 전투가 벌아진  전투현장은 가장 깊숙이 들어간 상촌이다.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가 있던 봉오동 중촌에  지금도 연병장터와 막사터가 남아있음이 획인되엇다.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가 있던 봉오동 중촌에  지금도 연병장터와 막사터가 남아있음이 획인되엇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 1915년  독립군의 숫자가 수백명으로 늘어나자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 숲을개간해  대형 연병장을 만들고 그 숲에서 베너낸 나무로 3동의 대형 막사를 지었고,  분부 주위에 폭 1m의  대형 토성을  건설했다고 증언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 1915년  독립군의 숫자가 수백명으로 늘어나자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 숲을개간해  대형 연병장을 만들고 그 숲에서 베너낸 나무로 3동의 대형 막사를 지었고,  분부 주위에 폭 1m의  대형 토성을  건설했다고 증언했다. 

구글어스로 확인한 실제크기는 다음과 같다.

연병장 추정지 : 둘레 417.8m, 면적 9,362.97(2,832.2)

막사 추정지(1) : 둘레 220.93m, 면적 2,556.62(773.3)

막사 추정지(2) : 둘레 242.99m, 면적 2,807.94(894.4)

막사 추정지(3) : 둘레 170.66m, 면적 1,488.52(450.2

수백 명이 아니라 수천 명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이 중촌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촌에도 연병장이 있고, 대형 맷돌과  우물이 상촌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역사학자들이 사료만으로 찾아낼 수 없는 눈에 보이는 역사가 봉오동 현장에 지금도 남아있다. 기존 사료를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마음을 열 때 역사의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론을 맡은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김영환 박사 논문의 가장 핵심적 성과는 연병장과 막사터를 추정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2020년 육사에서 열린 봉오동 독립전쟁 100주년 기념세미나에서 구굴어스 지도에 일본군과 독립군의 위치를 비정해 발표했던 역사학자다. 그는 일본군의 봉오동전투상보를 분석해 당시 봉오동에 들어왔던 일본군의 숫자가 보고서의 기록만으로도 500명이 넘는다는 것을 밝혀냈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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