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한 '6월 7일'을 국군의날로 제안한다

101일은 국군의 날이다. 국군의 날이 시작된 것은 6.25 당시 3.8선을 넘은 날을 기념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역사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국군의 날은 미군이 3.8선을 넘은 10월1일이 아니라 일제와 독립전쟁을 했던 만주독립군 창설일을 국군의 시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옳은 생각이다

그런데 만주독립군 중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 대안으로 논의되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광복군은 19419월 17일에 창설되었다. 그보다 20년 이상 앞서 대한민국 군대가 일본군을 격파한 승리의 역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있다. 어떻게 대한민국의 군대가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1920년 6월 7일 봉오동 독립전쟁과 이어졌던 10월의 청산리 독립전쟁 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군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만주 지역에는 이미 많은 독립군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봉오동의대한군무도독부를 위시하여, 대한국민회군, 북로군정서, 신민단, 광복단, 의군부 등 여러 무장 독립군 부대가 있었다. 그중 봉오동에서 운영하던 사병조직을 바탕으로 신한촌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확대 건설하고 1912년 '봉오동사관학교'를 창설해 무장독립군을 양성하던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은 1919년 임정이 수립되자 '도독부'를 '대한군무도독부'로 전환하며 형제들과 함께 투신했다. 대한민국의 군대임을 자임했던 것이다.

장기간의 훈련과 신형무기를 보유해 충분한 실전 능력을 가졌던 대한군무도독부는 1919년  하반기부터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온성, 경성, 회령 등 두만강변의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를 습격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봉오동 독립군의 공격에 당한 일본군은 대한군무도독부의 실력에 놀라워하며 국경수비 병력을 늘리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외교적으로는 봉오동에서 대규모 독립군이 세를 과시하고 있으니 방관하지 말것을 요구하며 중국을 압박하기도 했다.       

봉오동 독립쟁 승리후 기념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주 독립군의 (질서 정연한 정예군의 모습이다)
봉오동 독립쟁 승리후 기념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주 독립군의 (질서 정연한 정예군의 모습이다)

 

독립전쟁을  하기로 방침을 세운 임시정부가 1920년 1월 독립전쟁 원년의 해를 선포하자 만주 독립군들은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설립 배경과 지도력이 달랐으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군자금이었다. 무기와 군복, 식량을 제공한다는 최운산 장군의 약조가 있었고, 수차레의 회동 끝에  통합이 결정되었다.  1919년 5월5일 "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在北墾島各機關協議會誓約書)" 문서는 이를 기록하였다. 

<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서약서>

"본 협의회는 북간도 각 기관의 정신 통일과 사업 발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서약을 체결한다.

본 협의회의에 참가한 신민단·군정서·도독부·광복단·국민회·의군단은 5월 11일(음력 3월 23일)에 모연대를 소환한다.

각 기관 내 군적軍籍에 등록한 군인은 상호 강제 로편입할 수 없게 한다.

차후로는 지방기관 설립과 인원모집은 민의에 따른다.

각 기관은 모금이 필요할 시에는 협의회의 의결에 의한다.

어떤 기관과 어떤 기관이 쌍방 암의頷意로 연합할시는협의회에서찬성한다.

각 기관의 지방기관에 대하여 상호 침해할 수 없다.

자단체自團體의 통신기관에 대하여는 물론 각 단체의 통신을 급속, 신실하게 전달한다.

각 단체의 어느 기관을 불문하고 경보警報 있을 시는합력 구원한다.

사업진행상의 비의卑狋 기관의  능력으로 처결할 수 없을 시는 협의회에 제출한다.

금일 회의에 내참來參하지  않은 단체에 대하여 상호 성의로 권고하여 본회에 참가한다.

협의회 기관보를 발행한다.

매월1일·15일을 협의회 정기회기로 정한다.

특별사항이 있을 시에 2개 기관 이상이 동의하면 특별회의를 개최한다.

협의회 의원은 각 기관으로 부터2인씩 매차每次 파견한다.

금일 이후 새로운 단체가 생기면 협의회에서 이를 取消한다.

일후日後 긴요 사정에 의하여 위의 제반 조건은 협의회의 결의로 증산增刪할 수있다.

이상 조약에 위반하는 기관이 있을 시는 2차 권고로 반성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쓴다.

위 서약 기일은 오는11일일로 한다.

대한민국2년 5월 5일

신민단 대표 김준근·이흥수, 군정서 대표 나중소·김좌진, 군무도독부 대표 최진동·이춘범,

광복단 대표 전성륜·홍두극, 국민회 대표 김병록·김규찬, 의군부 대표 김종헌·박재눌"

곧이어 5월 19일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국로독군부>가 창설되었다.

<誓約書>

"我兩機關은 민족정신의 통일과 軍務勢力의 확장을 하기 하기 위하여 永久合一할 것을 확실히 서약한다.

국민회의 군무위원회와 군무도독부의 명칭을 취소하여 기관을 통합하여 大韓北路督軍府라고 개칭한다.

국민회는 행정기관, 대한북로독군부는 군사기관으로 하여 사무를 각각 집행하는 것으로 하여 국민회는 북로독군부를 보조하고 일체 군무를 籌備할 것.

대한군무도독부의 지방기관인 地方局은 국민회에 귀속할 것.

위 서약은 양 기관 대표 날인일로부터 시행한다.

대한민국2년 5월 19일

전 대한군무독군부 대표 최진동, 대한국민회 대표 김병흡, 군무위원 대표 안무"

이렇게 독립군들은 봉오동에서 대통합을 이루었고 단결된 힘으로 6월 7일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대한민국2년(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 독립전쟁 승리와 결과에 대해 <대한북로독군부>군이 어떤 작전을 준비했는지, 어떻게 전투가 전개되었고 어떤 결과는 얻었는지 독립신문에 공식 발표했다.

대한민국2년 임시정부 군무부는 독립신문에  대한민국 독립군의  활약에 대해  발표했다. 
대한민국2년 임시정부 군무부는 독립신문에  대한민국 독립군의  활약에 대해  발표했다. 

 

<봉오동鳳梧洞 부근의 전>

1. 아군은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1연대를 봉오동 상촌 부근에 있는 연병장에 집합시켜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각 부대의 전투 구역 및 임무를 정하였다.

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를 하였다가

적이 도래할 때 적의 전위부대가 입구를 통과케 한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하고 있는 포위 중에 들어오면 호령하여 사격하게 하고연대 장교 이원은 본부의 잔여 중대를 인솔하고 서북산간에 위치하여 병원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 보급 등의 임무를 주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은 부하 일 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 북편 1200m 되는 고지와 동북 편 촌락 앞쪽에 약간의 병사를 나눠서 잠복하게 하였다가 적이 들어오거든 개전하여 전진을 지체시키다가 거짓으로 봉오동 방면으로 퇴각시키고,

사령관 최진동과 부관 안무는 동북산 서간 최고봉 독립수 아래에 위치하여 지휘하게 하였다.

2. 전투의 상황 (적은..... 유안진 대안으로 퇴각하야)

공격받은 적은 다시 부대를 정돈하여서 동일 오전 1130분에 출발하여 봉오동을 향해 전진하여 그날 오후 약 1시에 적의 첨병이 봉오동 상촌에 도착하였다.

아군은 더욱 은폐하여 잠복부동 하니 적의 전위가 통과하였고, 그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삼면 포위 중에 들어왔을 때, 사령관의 지휘 호령에 의하여 맹렬한 급사격을 하니 적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하고 생존자는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그때 제2중대장 강상모가 부하를 인솔하고 맹렬히 진격하여 적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그 지점에 부하 중대를 잠복시켰다가 적의 응원대가 들어올 때 약간의 사격을 하다가 교묘히 거짓 퇴각하니 서쪽 길로 들어오던 적은 서로 총을 난사하여 적화로 적을 사살케 하였다대패한 적군 수천 명은 온성 유원진 방면(두만강변)으로 퇴각하였다.

3. 피아의 손해 수

적군의 사망 157,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요아군의 사망자는 장교 1인 병원 3, 중상자 2인이다.

적의 유기물이 다량으로 있었으나 우리 군이 적의 유기품까지 운반할 마차가 없었고, 전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전이 아니라 불시에 치른 전투였기 때문에 다 수취하지 않았다. 다음 기회를 위해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보병총 약간 정만을 수취하였다.

4. 아군은 당장의 전투를 목적한 것이 아니었기에 안전 지역으로 퇴각하고 적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음날 두만강을 건너 우리 국내로 귀환하였다.

임시정부가 아군이라 부른 독립군! 대한민국2년 5월19일 창설되어 공문에 대한민국의 연호를 쓰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싸워 승리한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는 대한민국의 군대였다.

국군의 날을 재논의 한다면 대한북로독군부의 창설일인 ‘519이나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전일인 ‘67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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