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15리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15리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봉오동의 가을이 그립다.

가을이 오면 봉오동을 둘러싼 예쁜 단풍이 눈에 선하다. 만주 봉오동은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저 멀고 황량한 만주 벌판 어디쯤이 아니라 독립군이 되고자 마음먹은 청년들이 얼마든지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두만강에서 15km, 보통 걸음으로 두세 시간, 훈련된 장정이면 한 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한 거리다.

직접 가서 확인해보니 봉오동은 두만강변의 도시 도문에서 차로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약속이 없이 봉오동에 도착해 도문에 살고 있는 6촌에게 전화하면 자전거로 15분 정도 걸리니 금방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답을 들을 수 있었던 가까운 거리였다.

일본군의 퇴각로 알려진 길,  봉오동에서 비파동으로 나가는 길목
일본군의 퇴각로 알려진 길,  봉오동에서 비파동으로 나가는 길목

봉오동 독립전쟁 당시 6월4일 강양동전투 이후 봉오동 독립군기지 토벌을 결정한 일본군이 66일 밤 10시가 넘어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도강을 마친 일본군이 봉오동 앞 안산에 도착했을 때 독립군의 기습으로 새벽 330분경에 한 차례 전투를 치렀다. 안산 전투 후 일본군은 봉오동으로 가는 길을 따라 들어오지 않고 봉오동을 둘러싼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 독립군기지를 급습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그러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이미 그들의 작전을 간파하고 고려령 1500m 고지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일본군은 새벽 6시반경에 또 다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렇게 밤새 두 번의 전투를 치른 후 다시 대열을 정비한 일본군이 산을 넘어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본부가 있는 봉오동의 중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독립군이 모두 기지를 떠나버린 것을 확인한 뒤 봉오동 상촌으로 들어와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가 시작된 시간이 오후 1시경이었다. 세시반과 6시반에 두 차례 전투를 치르고 무거운 무기수레를 끌고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산을 넘어 왔음에도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는데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던 거리다.

봉오동 대한북로독군부 연병장을 둘러싼 봉오동 산의 가을 모습
봉오동 대한북로독군부 연병장을 둘러싼 봉오동 산의 가을 모습

 

그 가까운 곳을 찾아가는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다. 내가 좀 더 젊었을 때 고향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과 후회에 자주 가슴을 치곤 한다. 처음 봉오동을 방문한 것은 2015년 가을이었다. 마을과 산을 돌아보면서 그곳이 봉오동 독립전쟁전쟁터였던 시간만이 아니라 그보다 오랜 세월 우리 가족들의 삶터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고향. 분명 낯설어야 하는데... 첫눈에 무언가 익숙한 느낌. 마을을 품에 안은 것 같은 봉오동을 둘러싼 뒷산의 편안한 품새를 내 몸과 마음이 먼저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늘이 눈부시게 맑았던 2015년 봉오동의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맑았던 2015년 봉오동의 가을 

봉오동 첫 방문 때 고향을 지키고 살던 고종 6촌 오빠를 만난 것은 예상하지 못한 큰 선물이었다. 오빠부부가 증조할아버지 연변 도태 최우삼의 산소 위치를 알고 있었다. 1997,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노년의 아버지는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5년이 지나서야 봉오동을 찾으셨다. 건강이 점점 나빠져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아버지의 발길을 재촉했었다. 1945년 고향을 떠난지 52년 만이었다.

아버지는 마을 가까운 산중턱에서 증조부의 산소를 찾아내셨고, 그곳에 살고 있던 조카 부부에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당시 북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일본군과 무장투쟁에 헌신하던 진동과 운산 두 아들이 안타깝게도 모두 감옥에 있던 때라 일부러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연변도태 최우삼의 손자인 아버지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내년에 봉오동에 비석을 세우러 다시 오마고 조카들에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지병인 당뇨와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더 이상 여행을 하실 수 없었다. 마지막 2년여 투석치료까지 받으시며 투병하시다 2001년 돌아가셨다. 건강도 나쁜 노년의 아버지가 힘들게 찾은 고향길에 동반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오래 간직하고 있던 우리 5남매는 아버지를 대신해 봉오동 증조부 묘소에 비석을 세워드리기로 했다.

2016년 10월 9일  우리 형제들이 증조부 연변 도태 최우삼의 산소에  비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준비하고 있다. 
2016년 10월 9일  우리 형제들이 증조부 연변 도태 최우삼의 산소에  비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 말기 간도의 정착민들을 돌보셨던 증조부 연변 도태 최우삼의 삶을 기리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리고 싶었다. 조선이었던 연변의 관리였던 분이니 조선식 갓비석을 세워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중국땅에 조선식 비석을 세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연변의 비석공장에서 조선식 비석을 만들기 어렵다고 해 비용이 들더라도 한국에서 비석을 완성해 중국으로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원로 언론인 박래부 선생님이 초안을 잡아주셨고 역사학자들의 조언으로 비문을 완성했다. 그런데 운반방법을 확인하다가 글자가 새겨진 돌은 통관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한국 비석공장에 설계도면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설계도면을 가지고 연변으로 갔다. 석공들이 모두 중국인이라 한글로 된 비석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연길, 왕청, 석현, 등 여러 도시의 석재공장들을 돌아다니다 도문시에서 설계도면 대로 비석을 만들 수 있겠다는 곳을 찾았다.

2016년 19월 연변도태 최우삼의 산소에 세운 갓비석 
2016년 19월 연변도태 최우삼의 산소에 세운 갓비석 

 

봉오동에 있는 연변도태 최우삼의 비석에 한글로 비문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한국에 돌아와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우리 집안 족보를 찾았고, 증조부 최우삼의 생몰연대와 집안 내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심끝에 중국인 석공이 비석에 한글을 새길 수 있도록 비석과 같은 크기의 고무판에 비문을 파서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설계도면 대로 외형은 완성할 수 있었지만 중국인이 한글을 새기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결국 목단강에서 더 유능한 석공을 불러와 비문을 새겨야 했다. 그 작업을 하는 사이에 우리 형제들이 모두 연변에 도착했다. 마무리된 비석에서 몇 군데 오류를 수정하고 비석을 완성했다.

이제 산으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때 일꾼들이 비석이 크고 무거워 크레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원래 포크레인으로 옮기기로 했었는데 크레인이 없으면 작업을 못한다고 버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크레인이 올라갈 수 있도록 산에 길을 내는 작업을 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일정과 비용이 확 늘어났지만 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나마 임시로 산길을 낼 수 있도록 수남촌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비석 운반 작업을 계획한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려 땅을 말려야 해 또 사흘을 더 기다렸다. 결국 처음 계획보다 몇 배의 비용이 들었다. 1년여 작업을 진행하면서 매순간 과연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었다. 힘들 때마다 당신들은 온 일생을 목숨 걸고 사셨는데 이런 현실적 어려움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마다 많은 분들이 손을 내밀어 주셨다. 함께 하신 분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한글 비석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정말 기적처럼

함께 제막식을 준비한 연변 도태 최우삼의 증손자들 (최우삼의 아들독립투사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손자들이다.)
함께 제막식을 준비한 연변 도태 최우삼의 증손자들 (최우삼의 아들독립투사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손자들이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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